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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배자 신분 숨기고 학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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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중학교를 비롯해 과학고·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와 자율고등학교(자율고) 모집 과정에서 사회적 배려 대상자(사배자) 전형을 악용한 예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고소득층 가구 자녀가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로 입학하는 비율이 갈수록 늘었다.

소득계층에 따른 교육 및 진학 기회의 형평성을 맞추고자 한 사배자 전형 도입 과정에서의 취지가 퇴색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0년 특목고와 자율고에 사배자 전형이 도입될 때 입학해 올해 고교를 졸업한 두 학생을 만나 사배자로 학교생활을 한 경험을 들어봤다. 두 학생 모두 3년 내내 사배자인 자신을 의식하고 지내야 했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사배자 전형이 악용되는 현실은 실제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더 괴롭게 만든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서울 강북구 영훈국제중에 들어서고 있다. | 이상훈 기자

학부모들이 서울 강북구 영훈국제중에 들어서고 있다. | 이상훈 기자

올해 대학에 입학한 전수영씨(가명·‘한부모가족 보호대상자’로 사회적 배려 대상자)는 외국어고 출신이다. 전씨는 2010년 서울지역 외국어고들이 처음 사배자 전형을 도입해 모집하던 해 입학했다. 당시 학교별로 5명씩 사배자를 선발했지만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원자가 정원에 미달했다. 전체 학생에 비해 극히 미미한 인원만 있었기 때문에 전씨가 1학년일 때에는 주변 친구들 대부분도 사배자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2011학년도부터 외국어고 등 특목고의 사배자 정원이 20%를 목표로 단계적으로 높아지자 학생들 사이에서도 사배자란 말이 가끔 언급되기 시작했다. 전씨는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번은 친구들과 얘기하다 이번 신입생들 중에는 사배자 전형으로 들어오는 애들도 있다는 화제가 나왔다. 그런데 한 친구가 ‘우리 동기 중에도 그걸로 들어온 애 있어’라고 말해 내가 사배자인 걸 아는 건가 싶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돈 없어서 특혜 받았다”란 편견에 주눅
본의 아니게 3년 동안 사배자임을 감추고 다닌 전씨는 돌이켜보면 당시 꽤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사배자 전형도 일반전형도 똑같은 방식으로 뽑는데 ‘돈 없어서 특혜를 받았다’거나 ‘미달이라 거저 들어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친구들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지 못해 속상했다”는 전씨는 “3학년 때는 1학년 학생이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 전학을 가게 됐는데 ‘돈으로 들어왔다가 영어실력이 너무 안 좋아 부끄러워 도망간 사배자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배자란 이유로 왜 편견을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돈 주고 들어온 애들은 돈 때문에 주눅들 일은 없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역시 2010년 첫 사배자 전형 입학생으로 자율고에 들어간 김종훈씨(가명·‘차상위계층 자녀’로 사회적 배려 대상자)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특목고와는 달리 모집 첫 해부터 정원의 20%를 사배자 전형으로 뽑은 자율고에는 비교적 많은 사배자 학생들이 있었다. 김씨의 학교에선 일반전형 모집은 정원을 넘는 학생들이 지원한 반면 사배자 전형은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김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일반 학생들에게 사배자 학생들은 ‘미달로 들어와 운이 좋은’ 학생이거나 ‘학교에 배경이 있어 들어온’ 학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경제사정 때문에 사배자로 들어온 애들은 거의 나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계속 유지됐다”면서 “지금 보니 그때부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들어온 애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지만 김씨의 시각에서 학교의 학생은 세 부류로 나눠졌다. 자율고 입학생과 일반고 입학생, 그리고 사배자 학생이었다. “처음 입학했을 때 2·3학년들은 일반고 시절 입학한 선배들이었다. 우리 학교는 (자율고로 들어온) 1학년만 성적이 좋은 우등반을 나눠 그 반 학생들한테는 가장 실력 있는 선생님들만 붙여줄 정도로 대우가 좋았지만 선배들한테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김씨는 “자기가 사배자라고 말하는 애들은 없지만 사배자 학생끼리는 대충 눈치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잘 사는 집 친구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사배자인 친구와는 어울리기가 좀 꺼려졌다”고 말했다. 대체로 사배자 학생들의 성적이 낮은 편이었다는 점이 김씨가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을 가까이하지 않은 이유였을 수도 있다.

“경제적 격차 커 같이 놀기 부담스러워”

[표지이야기]“사배자 신분 숨기고 학교 다녔다”

우등반에 들지 못했던 김씨는 오기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의 의욕만큼 성적을 올리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학원비가 부족해 ‘인강’(인터넷 강의)에만 의지한 김씨와는 달리 대부분의 친구들은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수능 모의고사는 그렇게 낮은 성적이 아니었는데 내신은 유독 안 좋았던 이유를 알아보니 학원에 가면 시험기간마다 예상문제에 집중해 수업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갈 때도 김씨는 부모님이 자가용으로 데리러 온 친구들을 보며 지하철역까지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사배자여서 느낀 학비 부담이 크진 않았다고 말했다. 자율고의 등록금은 일반고의 3배 수준이다. 하지만 김씨의 경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바로 위 단계 저소득층인 차상위계층 자녀라 방과후 학교 수업료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와 같은 학업 외 활동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김씨는 “부모님이 자율고에 가라고 하셨을 때도 사배자는 등록금을 지원받는다는 걸 알고 보내셨던 거다. 급식비까지는 (지원이) 나왔지만 자습비나 참고서 값, 수련회 비용 같은 건 우리집 형편에는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전씨 역시 한부모 가정 자녀이기 때문에 지자체와 교육청으로부터 수업료와 학교운영비 등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김형태 서울시교육의원이 공개한 사례를 보면 지난 2010년 서울시내 한 국제중에 다니던 사배자 학생이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일반 중학교로 전학한 경우도 찾을 수 있다. 가정의 경제사정상 학비의 50%를 지원받던 학생에게 학비 지원을 중단하고 감면된 학비를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의 조사 결과 교육청은 학교측에 교육청이 지원할 수 없는 부분을 학교가 지원하도록 안내했으나 학교측이 이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배자로 학교에 다니며 느끼는 가장 큰 고충 가운데 하나는 교우관계였다. 김씨는 “학교 공부 때문에 힘든 점도 있었지만 거의 다 잘 사는 집 애들이라 왠지 친해지기 힘든 점이 있었다. 나 스스로 위축된 것도 있지만 돈 쓰는 수준이 나와는 많이 달라 같이 노는 게 부담스러웠다.”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고교 친구보다는 대학 친구들이 편하다는 김씨는 “수능을 마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사람은 주변 친구들 중에 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논술·면접 과외 받고 스키장에 놀러도 가고 하는 걸 보며 심리적으로 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3년의 우정을 쉽게 대체할 정도로 경제적 격차가 미치는 영향이 컸던 것이다.

“부자가 꼼수 쓰면 약자들 기회 줄어”
전씨도 일반고로 진학한 친구들과 외국어고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도 섞이기 어렵다는 점을 느꼈다. “외국어고 친구들의 평소 옷이나 신발, 가방 같은 걸 보다 중학교 시절 같은 동네 친구들을 보면 차이가 확 났다. 용돈 액수 자체가 차이가 나니까 노는 방식도 다르더라. 그래도 사정이 비슷한 동네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마음이 편한데, 그 친구들은 내가 외국어고 간 걸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했다.” 전씨는 “외국어고 친구 앞에서 돈 없는데 있는 척하기도 힘들고, 돈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아는 동네 친구들 대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표지이야기]“사배자 신분 숨기고 학교 다녔다”

사배자 전형을 편법으로 활용하는 실태에 대한 의견은 두 사람이 사뭇 달랐다. 전씨는 “사배자 전형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원래 목적은 좋은 것이었다고 본다”면서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원하는 학교에 보내려고 꼼수를 쓰면 그만큼 약자들에게 돌아갈 기회가 줄어들고 불평등해진다. 문제점을 고쳐 가난한 집 자식들도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면 김씨는 “사배자를 배려하는 게 맞다는 건 알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냥 명문 학교에만 들어갈 수 있게 한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건 없다”면서 “어차피 집안사정에 따라 공부시킬 수 있는 여유가 차이가 나는데,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친구들에게 돈뿐만 아니라 성적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어린 나이에 더 괴로울 수 있다. (학비가) 비싼 학교는 낼 만한 집 학생만 받든가, 아니면 아예 없애버리든가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이 입학할 당시와 같이 외국어고와 자율고의 사배자 정원 미달사태는 지금도 이어지지만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졌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차상위계층과 같은 경제적 취약계층은 경제적 배려 대상자로 분류되는 반면 다자녀 가정 등은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에 속한다. 서울지역 외국어고 6곳 중 4곳이 2012년과 2013년 두 해에 걸쳐 사배자 전형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자율고의 경우 서울의 25개 자율고 중 사배자 입학 정원을 채운 학교는 2012년 4곳, 2013년 7곳에 그쳤다. 게다가 2013학년도 입학생 통계를 살펴보면 사배자 중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외국어고에선 62%, 자율고에선 5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배자 학생을 위한 정원이 전체의 20%로 보장돼 있지만 전씨와 김씨의 사례처럼 경제사정에 따른 소외를 겪을 것을 우려해 저소득층 자녀는 입학에 소극적인 반면 고소득층 자녀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이다. 김형태 교육의원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배자 학생들이 그만큼 외고와 자율고를 학비만 많이 드는 귀족학교로 인식하여 외면했다는 결과”라며 “사배자 전형이 일부 부유층, 특권층들이 입학하는 통로로 악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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