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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맥주간판 줄고 커피간판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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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퍼브로 대표되는 주류문화가 커피와 바리스타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영국의 오늘이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영국 출신의 한 유명 건축가는 TV에 출연해 자신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유가 커피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커피를 마시면 측은하게 보기 일쑤고, 심지어 경찰은 수갑이라도 채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고 했다. 물론 커피를 좋아한다며 웃자고 한 얘기다. 단지 홍차와 맥주의 나라 영국에서 커피는 비주류라는 점을 과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그 건축가는 미국살이를 후회할지도 모른다. 영국이 다시금 ‘커피의 나라’로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바리스타 그윌림 데이비스가 2009년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 위키백과

영국의 바리스타 그윌림 데이비스가 2009년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 위키백과

212대 1. 영국 중동부 도시 노팅엄에서 최근 기록한 취업 경쟁률이다. 영국에서 최대 다방 체인인 코스타(Costa) 커피가 노팅엄에 새 점포를 열면서 바리스타 8명의 구인광고를 냈더니 지원자가 1701명이나 몰렸다. 경제난 때문이거니라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코스타도, 언론도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코스타 측은 “경제난을 실감하게 하기도 하지만, 커피가 얼마나 빠르게 영국 사회에서 대중화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바리스타 모집 경쟁률이 212대1
영국 일간신문 가디언은 바리스타 일자리에 왜 이토록 사람들이 몰리는가에 대한 분석기사를 내놓았다. 우선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12대 1의 경쟁률은 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런던의 코스타 다방 체인의 경우 바리스타의 임금수준이 나쁘지는 않다. 매장의 고참 바리스타는 시간당 8파운드를 받는다. 우리 돈으로 1만3000원쯤 된다. 1년 연봉으로 약 2만6500파운드(약 4380만원) 수준이다. 런던의 지난해 생활임금(living wage·가계를 꾸리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임금수준)은 시간당 8.55파운드에 못미친다. 돈만 보고 바리스타의 길에 뛰어드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가디언은 영국 사회에서 ‘바리스타(Barista)’란 외래어가 자연스럽게 쓰이는 분위기에 주목했다. 사실 바리스타란 이탈리아어가 ‘커피를 내리는 전문가’라는 뜻을 갖게 된 것에 대해 홍차를 홀짝거리는 영국의 보수적 식자층은 코웃음을 친다. 이탈리아어의 바리스타나 프랑스의 ‘름플로이 드 바(L‘employe de bar)’나 영국의 ‘바맨(Barman)’이나 바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뜻은 같다. 나라마다 바의 문화가 다를 뿐이다. 이탈리아의 바에서 커피 시중을 드는 이를 가리키던 ‘에스프레소 바리스타’가 지금의 바리스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니 홍차가 음료의 최고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겐 바맨이 아니라 바리스타라며 ‘커피 전문가’로 대접하는 게 못마땅할 수도 있다. 동네 선술집 퍼브(Pub)에서 왁자그르르하게 맥주를 마시는 술꾼들에겐 바리스타가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홍차와 퍼브로 대표되는 주류문화가 커피와 바리스타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영국의 오늘이다. ‘프로젝트 카페 2012’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이래 영국의 다방산업은 15년 새 10배나 커졌다. 영국 전역에 다방 수도 1만5700여개를 헤아린다. 문화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한 영국에서 그 변화의 속도는 이례적이다. 2009년에 비해 다방을 찾는 인구가 3년 새 2배나 늘었다. 커피를 대하는 영국인의 태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국 런던의 패딩턴 역에 위치한 코스타 커피점의 모습. | flickr mattbuck4950

영국 런던의 패딩턴 역에 위치한 코스타 커피점의 모습. | flickr mattbuck4950

2012년 말 현재 코스타가 1500여개로 단연 앞서가고, 스타벅스가 780여개, 카페 네로가 530여개로 뒤를 따른다. 다방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대기업들이 속속 다방 브렌드를 만들어 커피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그만큼 시장이 다방산업의 전망을 밝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5년 내 영국의 다방 수가 25%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수와 합병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영국의 커피붐은 역사적으로도 흥미롭다. 지금은 홍차가 대세지만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받아들였고,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다방 수가 3000여개를 헤아리는 유럽 최대 커피 소비국이었다. 런던에 다방이 1663년 82개에서 1700년엔 500개로 늘었다. 당시 다방은 1페니만 내면 누구든 커피를 마시며 토론할 수 있다고 해서 ‘페니 대학’이라 불릴 정도였다.

17세기 말까지 유행했던 ‘커피의 부활’
물론 남자들로 북적였다. 남편을 다방에 뺏긴 아녀자들이 1674년에 남자의 성기능을 약화시킨다며 커피 금지를 요청하는 탄원을 내기도 했다. 18세기 들어 인도와 중국의 차로 눈을 돌리면서 커피붐은 급속히 식었다. 식민지에서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 차를 두고 남의 제국에서 비싸게 커피를 소비하는 걸 상인과 정치인들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영국인들은 다시 커피에 빠지고, 바리스타가 유망 직업이 되고, 다방산업 투자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영국의 다방산업은 우울한 경제의 예외가 되고 있다.

다방 붐은 퍼브의 쇠퇴와 비교되기도 한다. 퇴근길에 퍼브가 아니라 다방에서 한숨 돌리는 런던의 직장인이 늘고 있다.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현대식 다방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둘러본다는 것이다. 이러니 런던 거리에서 퍼브의 맥주잔 간판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방의 커피잔 간판이 들어서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지난해의 경우 영국 전역에서 매주 18개꼴로 퍼브가 사라졌다. 프랑스의 카페가 그러하듯, 영국의 퍼브는 달리 술집으로 대체할 수 없는 문화 그 자체다. 퍼브에서 식사하고, 술 마시고, 축구경기를 함께 보고, 정치도 논하고, 이웃 얘기도 듣는다. 그런 퍼브가 문을 닫는다는 건 술꾼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국 사회를 지탱하는 공동체 정신의 쇠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퍼브의 퇴조가 다방 탓은 아니다. JD 위더스푼과 같은 대자본 술집이 동네 퍼브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대자본의 문제는 코스타나 스타벅스에 밀려나는 골목 다방도 마찬가지다.

제3의 물결 맞고 있는 커피문화
커피 대중화가 세계화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만, 영국의 커피문화는 새로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영국인 바리스타 그윌림 데이비스는 영국 커피문화가 제3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결건조 방식의 인스턴트 커피가 커피 소비를 늘린 게 제1의 물결이라면, 제2의 물결은 다방을 고급화하고 표준화한 스타벅스화(Starbucksification)이다. 데이비스는 커피의 대중화와 개성화를 결합한 새로운 영국식 커피문화가 제3의 물결이라고 말한다. 커피에 대해 각별한 열정을 지닌 바리스타와 자신만의 특별한 커피를 추구하는 소비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영국에서 바리스타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요인이라고 얘기한다. 실제 영국에선 같은 스타벅스, 같은 다방에서도 바리스타가 맛을 좌우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영국인들은 커피를 찾고 있다. 젊은이들은 바리스타를 꿈꾸고 있다. 영국에서 커피의 부활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유병선 경향신문 국제부 선임기자 yb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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