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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공간 ‘진보 독무대’ 시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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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난 지 2년 남짓한 유머사이트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기존 인터넷 커뮤니티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랭키닷컴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PC를 통한 접속 기준으로 지난해 12월 한 달간 일베를 방문한 사람의 수는 약 211만여명이다. 이는 만들어진 지 12년이 되는 진보성향의 MLB파크(야구 커뮤니티), 클리앙(IT 정보공유 커뮤니티)의 월간 방문자 수와 거의 비슷한 수치다.

현재까지 드러난 성과만 보면, 일베는 짧은 시간에 기존의 보수 인터넷 매체와 보수 시민단체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셈이다.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뉴라이트전국연합, 국민행동본부, 바른사회시민회의 등 보수적 시민단체들이 등장했지만, 참여연대 등 진보성향의 시민단체를 넘어섰다는 평가는 받지 못했다. 보수 인터넷 매체도 우후죽순으로 나타났지만, 뉴데일리·데일리안만이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프레시안에 비견되는 수준으로 성장했을 뿐이다.

지난해 3월 제주 강정마을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보수 시민단체들이 진보 시민단체들을 넘어서지 못한 것과 달리 일베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3월 제주 강정마을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보수 시민단체들이 진보 시민단체들을 넘어서지 못한 것과 달리 일베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보수적 시민단체 활동가, 언론인들은 일베의 등장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수적 시민단체들의 모임인 한국시민단체협의회의 최인식 집행위원장(55)은 “그동안 인터넷 공간은 좌파 성향 사람들의 독무대였지만,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인터넷 공간의 균형이 맞아가고 있다”며 “일베는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수 인터넷 언론운동 1세대인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45)는 “일베에서 젊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대선에서 야당 후보들의 문제점을 찾아내기도 했다. 보수층이 모일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은 높게 평가할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도 일베가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어떤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대선 기간 중 일베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를 기사화한 뉴데일리의 전경웅 기자(41)는 “국장 지시를 받고 일베 측과 접촉을 시도했는데 연락처도 없더라”고 말했다.

지난 1년간 방문자수 4배나 늘어
전 기자와 뉴데일리는 대선전이 본격적으로 붙기 전부터 일베의 동향을 보도해 왔다. 지난해 8월 일베 사용자들은 현역 군인들이 군 내부를 사진에 찍어 자신의 홈페이지, SNS 등에 올린 사실을 밝혀냈다. 전 기자는 이를 받아 보도했다. 이후 뉴데일리는 민주통합당 진성준 대변인이 일베를 비판한 논평을 낸 데 대한 일베 사용자들의 반응, 일베 학력인증 사건, 대선 이후 일베 사용자들의 반응 등을 기사로 다뤘다. 일베 사용자들이 의혹을 제기한 문재인 후보의 ‘고가 의자 논란’ 역시 뉴데일리에서 기사화했다. 전 기자는 “대선 과정에서 일베 사용자들이 ‘팩트검증’이라며 자료를 조사한 것이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보이는 걸 확인취재한 뒤 사실관계가 맞는 것이 있으면 기사화했다”고 말했다.

랭키닷컴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일베는 PC 방문자 기준으로 4배가량 방문자 수가 늘어났다. 스스로를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20대 대학생이라고 밝힌 일베 운영자 ‘새부’는 중앙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일베에서는 기존의 허례허식을 신경쓰지 않는 직설적인 대화, 희화화가 이뤄진다. 이런 게시물을 보며 기존의 상식이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며 일베의 인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보수 인사들은 이런 일베의 성장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새누리당 인터넷 관련분과에서 일했던 ㄱ씨는 최인식 집행위원장이 말했던 ‘인터넷의 보편화’를 자세하게 해설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만 해도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가 진보 일색이었고, 사실상 2030세대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든 보수층의 인터넷 활용이 늘어났다. 2년 전만 해도 50대의 인터넷 사용률은 50%, 60대는 25% 정도로 나타났는데, 지금은 50대의 65% 이상, 60대의 30% 이상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베에는 젊은 사용자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60대·70대라고 밝히는 사용자들도 있다.

전경웅 기자는 일베가 탄생한 배경에 대해 “기존 인터넷 공간의 대다수를 MLB파크 등 진보성향 커뮤니티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 지겹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전 기자는 “진보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주도하면서, 이들 주도그룹의 성향과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배척되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서 패러디·희화화가 많이 이뤄지는데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매번 보수 정치인들만 희화화했다”고 말했다. 일베의 출현은 일종의 ‘반작용’적 성격이 강하다는 의미다.
일각에서는 일베가 기존의 보수진영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민주통합당 진성준 대변인은 대선 5일 전인 지난해 12월 14일 현안 브리핑을 통해 “새누리당의 불법 댓글부대가 적발됨으로써 마침내 십자군 알바단(십알단)과 일베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일부의 말투 때문에 ‘본질’ 흐려질 수도
새누리당 전직 인사 ㄱ씨는 “인위적으로 사이트를 만들고, 보수매체에서 이것을 띄워줄 수는 있었겠지만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수평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할 순 없다. 십알단 같은 것을 한다고 얼마만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수 인사들이 일베의 모든 면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인사들은 일베의 호남지역 비하, 반여성적 발언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최인식 집행위원장은 일부 일베 사용자들의 문제적 언어 사용에 대해 “인터넷이 갖고 있는 어두운 면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일부 사용자들의 말투 때문에 본질(보수적 주장을 뜻함)이 다른 방향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레 여과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누리당 전직 인사 ㄱ씨도 “일베에서 오가는 내용이 ‘그들만의 리그’로 느껴지는 점이 있어서 한두 번 보고 말았다”며 “우리끼리 말하면 그게 무슨 소통인가. 우리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소통이다”라고 말했다.

전경웅 기자는 “특정 시각으로 일베 사용자들의 행동을 규정짓기보다 가만히 놔두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전 기자는 “일베의 소통방식은 사회가 터부시하는 삼류 문화다. 삼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면 ‘특이하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된다”며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곳은 일베 말고도 많지 않나”라고 말했다.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는 일베처럼 젊은 보수 네티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존 보수 인사들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신 대표는 “젊은 보수들이 인터넷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보수 쪽 원로들이 젊은 보수들을 많이 도와줘야 하는데, 이 원로들이 자기희생을 잘 안 한다”며 “일베 이전에도 노노데모 등 보수 커뮤니티가 있었지만, 기존 보수층의 자기희생 부족으로 결국 많이 위축됐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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