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자기 성찰·타인과 소통이 가장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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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말하는 ‘40대 남성의 성장통’

[조명]“자기 성찰·타인과 소통이 가장 필요”

20년 넘게 40·50대 중년 남성의 정신건강을 연구해온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40대 남성이 겪는 불안감과 외로움은 그 시기 남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고 말한다. 또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중요한 단계”이며 “40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성찰과 가면을 벗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과 소통하기”라고 덧붙인다. 정 박사에게 한국의 40대 남성이 혼돈의 시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들어봤다.

왜 40대 남성의 정신건강을 논의하는 게 필요한가.
“개인의 각성(깨달음)은 살면서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중추적 연령이면서도 각성 면에서는 가장 진도가 늦은 그룹이 40대예요. 왜냐하면 한국의 남성들은 페르소나(Persona:연극 등의 등장인물)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기 때문이죠. 광대가 왕의 가면을 쓰면 왕이 되고 거지가면을 쓰면 거지가 되지만, 무대에서 내려와 가면을 벗으면 본래 자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의 40대 남자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주문하면, 자기의 역할을 이야기해요. 심리적 진도가 여기까지만 도달한 탓이에요. 정신과에서는 ‘사회적 성공은 곧 자기 억압의 결과’라고도 이야기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억압으로 인한 개인적 대가나 비용은 몹시 많이 치르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 정신적으로는 더 황폐화돼 있다는 이야기인가.
“예를 들어 기업의 과장이나 대리는 임원이 되면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것이고, 삶도 안락해질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예요. 실제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루었을 때 또 다른 이면들도 동시에 갖게 된다는 것을 남자들이 알 필요가 있어요. 40대의 남성은 지위가 높건 낮건 돈이 많건 적건 누구나 본질적인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어요. 모두 굉장히 불안해하죠.”

40대 남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뭔가.
“직장에서의 관계의 어려움도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 40대 남성들이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가족과의 갈등이에요. 그리고 가족과의 문제보다 더 힘겹고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죠. 자기 자신의 무능함, 삶에 대한 불안감, 자신이 걸머지기엔 너무도 무거운 짐들이 40대를 버겁게 만들어요. 사회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성공한 사람도 스스로 무능감에 시달리죠.”

왜 40대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가.
“성장환경이 달라도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40대만의 집단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40대는 인간에게, 특히 남자들에게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느끼는 시기예요. 여자들은 40대 전에도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통해 스스로 돌아볼 기회가 많지만 남자들은 학력, 일, 지위, 경력 등 무언가 성취하거나 결혼해 안정된 가정을 갖게 되면 심리적으로도 안정될 것이라고 흔히 착각하거든요. 그것을 1차적 목표로 삼고 살아온 남자들이 자기가 꿈꿨던 것을 어느 정도 도달한 즈음에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시기가 40대인 거예요. 때문에 30년 전의 40대나 지금의 40대인 386세대나, 30년 후의 40대나 동일하게 이런 시기를 거치게 돼요.”

학자들은 아들을 키우는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래에도 40대가 같은 고민을 할 것이라는 것은 교육도 영향력이 없다는 얘기인가.
“40대의 문제는 미국이나 유럽이나 똑같이 존재해요. 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사망률, 자녀와의 관계 등 한국의 40~50대 남자들이 그 시기에 겪는 지표는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비관적이에요. 유난히 한국 중년남자들이 스스로 조절이 안 될 만큼 가혹한 상처를 받는다는 얘기예요. 우리나라 문화나 교육 등 사회적 환경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체계라는 게 굉장히 물질적이잖아요. 그런 영향이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부모의 교육보다 선행해야 할 것은 사회적·문화적인 집단의 성찰이에요. 40대 남자들의 문제를 계기로 아이들의 문제, 부모들의 문제는 물론, 일터에서 사람의 문제까지 들여다보는 성찰이 되어야 해요.”

40대는 유난히 외도에 대한 욕망과 유혹에 휘청댄다. 아내 외 지적 대화가 가능한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도움이 될까.
“그런 욕망은 큰 맥락에서 외롭고 무기력하고 큰 혼란에 빠졌을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감각이 살아나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마침내 사회적 페르소나와 거리가 생기는 거죠. 다만 한 인간에게는 성장의 기회이고 인생에서 굉장한 중요한 시기지만 이런 약한 모습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여러 부작용도 있어요. 여자친구가 도움이 된다 안 된다는 지엽적인 문제예요.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겨 지금까지 덮개로 감춰온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놓고 다시 숨기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좋은 일이거든요. 그게 아내일 수도, 동성친구일 수도, 애인일 수도 있어요. 어떤 남자는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최초로 드러내는 상대가 술집 마담이기도 해요.”

속내를 보여주는 대상이 아내이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사이가 멀어진 채로 살아왔다면 회복이 힘들지 않나.
“멀어진 관계라도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복원이 가능해요. 하지만 시작이 쉽지 않은 탓에 지레 포기하는 부부가 많은 거죠.”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외에 유효한 자기성찰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남자로서 또 역할로서의 나를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자극이면 좋겠죠.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내놓으면서 자기를 찾고,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공감하고 지지해주면 ‘아, 내놓아도 되는구나. 사람들은 다 이러고 사는구나’ 하면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돼요. 또 그런 도식이 생기면 자기에 대해 과도하게 방어하고 살지 않게 되니까 자기로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지죠. 시나 소설, 수필과 같이 다른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서적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도움이 돼요. 대다수 40대 남자는 책은 영어서적이나 리더십 관련 서적, 자기계발서 등만 읽고 TV는 뉴스와 다큐멘터리 정도만 본다고 말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인간관계의 본질, 이런 것을 일상에서 간적접이든 직접적이든 경험하는 게 좋아요.”

자녀와의 관계를 잘 풀지 못하는 40대 가장이 많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부모가 자식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듯이, 자식도 부모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평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자기가 보여주거나 말해주는 대로만 자식이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자녀와 문제가 생겼을 때 수평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아요. 가령,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내가 너무 슬프다. 내가 그동안 너에게 어떻게 했기에 네가 그런가 싶어 마음이 착잡하다’와 같이 진솔한 말부터 해야 해요. 그런데 ‘내가 그동안 너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힘들었는데, 네가 옳지 않다’와 같이 주장하거나 설득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럼 자녀는 속으로 ‘웃기고 있네’ 하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내 생각이나 내 가치관, 내 의견을 이야기해선 인간 대 인간의 대화가 불가능해요. 내 느낌이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중요해요. 이런 방식의 소통은 아이가 7살만 넘으면 가능해요.”

직장에서 얻는 스트레스도 만만찮다. 고용 불안도 그렇고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
“고용 불안과 같은 외부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중요한 것은 동일한 자극에도 가족을 포함해 타인과 관계에서 소통을 잘 해온 사람은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거예요. 이건 사교적인 것이나 마당발의 개념과는 다른 얘기예요. 그런 점에서 과거 하버드대가 졸업생을 상대로 30년간 추적 조사한 연구 결과는 주목할 만해요.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안정적으로 잘 유지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만족감을 갖고 정신적으로 건강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고 하잖아요.”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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