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가의 서재

“책에서 배운 것 실천하며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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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최진영씨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똑바르게 가서 아무런 문제 없이 끝난 적이 없다. 그 때문에 화가 나고 일이 그릇되는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또 그렇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삶의 다른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그렇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자랐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 그렇게 책이 많았나 하는 걸 알고 조금은 무섭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과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아는 책 세상도 딱 그만큼 테두리를 친 상태로 머물렀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무역회사에 다니는 최진영씨(35)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아는 알퐁스 도데는 <별>과 <마지막 수업>을 쓴 작가로만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최씨가 내게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그 순간 내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은 오랜 친구 같았던 알퐁스 도데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최진영씨가 침대 옆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다.

최진영씨가 침대 옆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다.

석촌역 근처, 골목을 몇 번 돌아 도착한 최씨의 집은 크지 않은 빌라 원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화장실이 있고, 거기서 두어 발만 더 내디디면 침대와 싱크대가 허리높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본다. 책장은 침대 끝에 붙여 놓았다. 책은 많지 않았지만 한 번 둘러보니 이 책장 주인은 관심사가 꽤 다양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책장은 세 단이다. 가장 아래는 무거운 책, 주로 패션잡지가 나란히 줄 맞춰 들어 있고 중간과 가장 위에는 소설 몇 권, 산문, 그리고 인문학 책이 간간이 보인다. 평소에 책을 많이 보는 편인데 서울로 이사 와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가장 먼저 책이 큰 짐이 된다. 그래서 가진 책들을 대부분 이리저리 처분하고 남은 것은 고향 집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하고 있다. 거기엔 전라도 익산이 고향인 최씨가 어릴 적부터 모은 패션잡지들도 가득하다. 그는 중학생 때 국내에 처음 소개된 <엘르 코리아>를 창간호부터 매달 사모았다고 한다.

무척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 옷차림새나 건물 모양, 인테리어 등에 관심을 가졌던 최진영씨는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던 <소라의 멋내기> 같은 ‘소라 시리즈’를 열심히 봤다. “뿐만 아니라 하이틴 잡지들도 꽤 많이 봤어요. <댕기>나 <윙크>, 그리고 <행복이 가득한 집> 같은 잡지들을 달마다 사봤어요. 특히 어릴 적 잡지에서 기사를 보고 좋아했던 <윙크>의 오산소 기자(본명은 오경은씨인데 당시 같은 이름을 가진 선배와 구별하기 위해 ‘O2’라고 불렀고 그것이 오산소라는 별칭이 됐다)를 어른이 되고나서 제가 잡지회사에 다닐 때 인터뷰 때문에 만났던 일이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치 훗날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될는지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어릴 때 머릿속으로 혼자 그려보던 그림을 어른이 되어 실천하며 사는 경우는 드문데, 최씨는 그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며 꾸준한 마음으로 살아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드는 생각이지만, 역시 사람에게 어린 시절 환경은 그의 인생을 세우는 주춧돌이다. 삶을 올려놓는 바닥이 탄탄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고 쓰러지는 일이 많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찾아서 읽어볼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슨 책을 읽어야 좋을지 정보가 많지 않던 때니까요, 무조건 교과서에 단편적으로 실린 것들을 찾아서 읽었어요. 그런데 제겐 그 책들이 다 어렵더라고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도 그냥 읽은 책들이 많아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그때 제가 속셈학원엘 다녔는데 몸이 비쩍 마르고 입술이 푸르스름한 오빠가 한 반에 있었어요. 그 오빠가 무슨 얘길 들려주면 그렇게 재미가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얘기 대부분이 소설 책 내용이었어요. 그 때 알게 된 알퐁스 도데의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는 무척 오랫동안 기억이 날 만큼 충격적인 얘기였어요.”

대학에 가려고 준비를 하던 때 최씨는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두 가지 전공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 하나는 패션이고 나머지는 건축이다. 고등학생 때는 건축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 이전부터 패션잡지를 통해 마음속에 그린 모습 때문이었는지 의류학과를 지원하게 된다. “패션과 건축을 단지 옷과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저에겐 그 둘이 비슷해요. 어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저는 어릴 적부터 그 둘을 비슷하게 좋아했고 관심이 많았어요. 결국 패션 공부를 선택했고,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그쪽 일이에요. 처음 하게 된 일이 패션잡지 <엘르 코리아>의 어시스턴트니까 제겐 무척 의미가 있었어요.”

패션잡지부터 소설, 인문학 책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최씨의 책꽂이.

패션잡지부터 소설, 인문학 책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최씨의 책꽂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최씨의 책 읽기는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는다. “그 이전까지는 매거진이나 가벼운 소설들만 읽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인문학적 소양이 사람에게 정말 중요하단 걸 알겠더라고요. <서른 살 직장인, 책읽기를 배우다>라는 책을 봤는데, 거기서 배운 게 많았어요. 이제는 책을 재미로 읽거나 남는 시간 보내기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책을 읽으면 그로 인해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어요. 회사 다닐 때 늘 <논어>를 옆에 끼고 사는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의 실제 생활은 그 책과 전혀 달라서 실망했던 일이 기억나요.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고 한들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책과 꿈, 행동과 실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다 최씨에게 기억에 남는 책이 무어냐고 묻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두 권을 보여줬다. 그 중 한 권은 지금은 절판된 단편 모음집이다. 얼마 전 헌책방에 책을 팔러 갔다가 거기에 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책 판 돈으로 다시 책을 사왔다고 한다. 품절되어 사라졌다고 생각되더라도 어디선가 또 발견되는 마음속에 품은 책처럼, 끊어지지 않는 꿈을 늘 간직하고 사는 최진영씨의 쾌활한 웃음소리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글·사진  윤성근<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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