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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치평론가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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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총선, 대선을 맞아 정치평론이 범람하고 있다. 여러 직함을 단 ‘전문가’들의 말이 신문 지면, TV, 라디오 방송, 인터넷 뉴스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해진다. 평론가들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높아졌다.

최근 대중이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만한 사건이 있었다. YTN과 연합뉴스 노동조합이 자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54)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출연 정지를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고 평론가를 “박근혜 후보를 노골적으로 편드는 발언을 자주해 정치적 편향성이 심각하다”(10월 4일 YTN 노동조합 성명) “편파 해설로 유명한 정치평론가”(10일 연합뉴스 노동조합 성명)라고 비판했다.

<주간경향>은 이번 논란을 계기로 평론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특히 전업 평론가들은 어떤 인생 경로를 통해 평론가가 됐는지, 그들이 평론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무엇인지, 평론철학은 무엇인지 물었다. 아울러 직업으로서의 ‘전업 평론가’의 생활도 함께 알아봤다. <편집자 주>

고성국 정치평론가

고성국 정치평론가

고성국 평론가는 자신을 둘러싼 ‘정치 편향’ 논란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고 평론가는 최근 한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을 대신 이야기했다.

“토론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진행자가 누가 이번 대선에서 이길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분들은 구체적으로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저는 야권단일화의 과정이 아름답게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박근혜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습니다.”

‘정치 편향’ 논란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이어 그는 ‘오해’를 불식시킬 평론을 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평론을 구체적으로 하다보니 오해가 생길 수도 있죠. 방금 전과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박근혜에게 편향됐다는 오해와 억측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게 조언하는 사람들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두루뭉술한 평론은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제 철학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 조언은 고맙지만 아직 그걸 못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고성국 평론가의 인생은 ‘친박’과 거리가 멀었다. 1986년 그는 다산, 보임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고 평론가의 성향은 지금으로 치면 진보신당과 유사한 것이었다. 한 좌파 정치단체 활동가는 고 평론가에 대해 “지하조직 시절 고성국 박사는 정확한 정세분석으로 유명했다. 그때 훈련된 감각 때문에 지금도 정치평론가로서 잘 활동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1988년 고 평론가는 노태우 대통령 취임에 맞춰 단행된 사면복권에서 특별사면 대상자로 선정돼 풀려난다. 고 평론가는 “감옥을 나오고보니 예전처럼 비합법 진보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후 학술단체협의회 활동, 진보정당 운동 등을 하던 고 평론가는 1988년 11월 창립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지원활동 과정에서 알게 된 기자, PD들의 추천으로 1989년부터 간간이 방송 출연을 하게 된다. 고 평론가는 “당시만 해도 시사프로에 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수들이었다. 당시 박사학위도 없었던 저로서는 좋은 활동공간이 주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교수들이 주로 출연하던 시사·정치평론계에 고 평론가는 ‘정치평론가’라는 직함을 내밀었다. 최초의 전업 평론가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고 평론가는 당시를 회상하며 “방송 출연을 시작한 이후 정치평론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나름대로 소박한 꿈을 가졌다. 전업으로 정치평론을 해도 생활이 가능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성국 평론가, 시사프로 진행 경험
1992년 CBS <시사자키>를 진행하던 중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불리한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할 수 없이 방송을 그만둔 적도 있었지만, 한동안 고 평론가의 ‘전업 평론가’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방송 출연뿐 아니라 월간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한국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하여> 등의 저서에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고 평론가는 KBS <추적 60분> 진행자로 활동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997년 5월 KBS 노동조합은 “고성국은 김현철의 인맥”이라고 비판했고 이후 그는 스스로 진행자에서 물러났다. 고 평론가는 “결과적으로 KBS에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998년 1998년 11월에는 고 평론가가 ‘총풍 사건’ 연루자인 오정은 청와대 전 행정관과 함께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비선 참모 조직’으로 활동했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보도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고 평론가는 “저는 총풍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당시 언론이 여론재판 식으로 저를 최고 책임자처럼 그렸다. 검찰에서 저를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는 이회창 비선 조직의 일원이 아니었으며, 이회창 팀이나 김대중 팀에 있는 후배들이 일하다가 가끔 저에게 물으러 오면 조언해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문민정부의 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고 평론가는 문민정부가 IMF사태로 마무리된 이후 “서울에서 제일 먼 곳이기 때문에” 제주도로 떠나 3년 가량을 머물렀다. 이후 이수인 전 평화민주당 의원 등 민주당계 인사들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왔다. 고 평론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직책을 걸고 뭘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조용히 뒤에서 거들었다”고 말했다. 방송활동은 2005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2006년부터 글로는 자신이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인 프레시안에 ‘고성국의 정치분석’, 정치인 연속 인터뷰인 ‘고성국의 정치in’을 연재했고, 2008년 5월 16년 만에 CBS <시사자키> 진행자가 됐다. 고 평론가는 “오랜만에 시사자키에 돌아왔는데 이명박 정부에 의해 또 잘렸다. 경제위기로 다들 어려우니 내부 MC가 진행을 맡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는데, 자를 때 다들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성국 평론가처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는 신율 교수,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장,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등이 있다. 하지만 고 평론가와 마찬가지로 ‘전업’으로 일정한 자리에 오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유창선 박사(52), 김종배 평론가(46)가 있다.

유창선 평론가가 지난 9월 4일 경향신문 등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발언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유창선 평론가가 지난 9월 4일 경향신문 등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발언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유창선 평론가는 연세대 재학 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학보사 기자를 하던 때 5·18 광주항쟁이 벌어졌다. 이후 유 평론가는 출판업,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등 진보적 학술운동에 매진하다가 14대 국회 때인 1992년, 이부영 당시 민주당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다. 보좌관 시절인 1993년 12월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1651명의 학력, 출신학교, 재산내역 등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유 평론가는 “나는 원래 방송보다는 글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국회 보좌관 경험을 살려 학술지, 월간지 등에 정세분석 글을 기고하던 유 평론가는 1998년 우연히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별한 직함도, 박사학위도 없던 그는 ‘정치평론가’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유 평론가는 “2002년 오마이뉴스와 함께 민주당 대선 경선 인터넷 생중계를 같이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 이후 이름이 알려지고 하루에 라디오, TV 방송을 합쳐 6~7군데 정도 출연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상파 3사와 각종 케이블 채널에 출연하던 유 평론가는 2009년 초 고정출연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하차를 통보받았다. 다른 방송에서도 줄줄이 하차 통보가 왔다. 유 평론가는 당시를 “MB에게 마이크를 빼앗긴 것”으로 묘사했다. 이후 다른 방송에서도 줄줄이 하차한 유 평론가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인 아프리카TV에 개인 시사·정치평론 방송을 열었다. 지난해 말부터 유 평론가의 방송 출연은 다시 많아졌지만, 아프리카TV와 SNS를 통한 평론활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김종배 평론가는 다른 두 사람처럼 전업 평론가지만, 기성 정치권 밖의 일에 관한 평론도 줄곧 한다. 김 평론가는 대학 시절 학보사 편집장을 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졸업 이후 “잠깐이라 생각했던”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부터 2년간은 기자협회보 기자, 1993년부터 4년간은 전교조가 발행하는 ‘우리교육’ 기자, 1997년부터 5년간은 미디어오늘 기자로 일했다.

유창선 평론가, 인터넷 정치평론 길 열어
미디어오늘 기자 시절인 1999년, 김 평론가는 MBC <아침을 달리다>의 뉴스브리핑을 담당했다. 미디어오늘에서 언론비평을 담당하며 보인 ‘감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 인연은 <아침을 달리다>의 후속 프로그램인 <손석희의 시선집중>으로 이어져 2011년까지 계속됐다. 김 평론가는 “시사평론가라는 직함은 초기부터 사용했지만 뉴스브리핑을 평론이라 보긴 어렵다. 2005년 오마이뉴스에 시사칼럼을 연재한 때가 평론가가 된 기점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오마이뉴스의 팟캐스트 방송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 진행을 맡고 있다. 김 평론가는 “여기저기서 고정출연 요청이 많지만 아직은 하지 않고 있다. 이털남을 진행하는 동안 외부 기고를 거의 하지 못했는데 슬슬 발동을 걸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평론가로서의 자질은 무엇일까? 고성국 평론가는 “구체적인 평론, 생활언어로 말하는 살아있는 평론”을 중요시했다. 그는 “절반 이상 틀릴 각오를 하고 아는 만큼은 끝까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평론가가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그걸 가지고 논쟁할 수가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평론을 하기 위해 고 평론가는 자신만의 프레임과 현장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꼭 논문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사논문을 받을 정도의 지적 훈련을 통해 자신만의 시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고 평론가는 “현장을 가지 않은 평론은 오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수치를 가지고 해설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잘 감지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고 평론가는 특정 지방이 쟁점으로 떠오르는 등 필요한 때가 있으면 직접 해당 지역에 사는 지방의 부동산 중개업자, 소상공인, 호프집 손님들 등을 만나며 자기가 알고싶은 부분과 실제 현장의 분위기가 맞는지 알아본다고 설명했다.

김종배 평론가(오른쪽)가 진행자인 <이슈 털어주는 남자> 녹음 현장. | 정원식 기자

김종배 평론가(오른쪽)가 진행자인 <이슈 털어주는 남자> 녹음 현장. | 정원식 기자

김종배 평론가는 여의도 정치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사회문제를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점점 순수 정치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부분은 줄어들고 있고, 사회문제로 분류됐던 것도 결국 정치문제화한다”고 말했다. 국회와 청와대에서 연일 4대강, 한·미 FTA, 제주강정마을 등이 이슈가 되듯 기존 언론에서는 사회면에서 다룰 법한 문제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김 평론가는 “또한 시민정치 등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강화하는 시점에서 여의도에 갇혀 있으면 흐름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평론가의 역할을 명사와 명사를 잇는 ‘조사’에 비유하며 “대중들도 단편적으로 나오는 뉴스에 대해선 다 알고 있다. 평론가의 역할은 뉴스를 연결해 흐름과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평론’의 선구자격인 유창선 평론가는 자신처럼 SNS(사회관계망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6만명 가량의 팔로어(친구맺기 신청을 해온 사람)를 보유한 유 평론가는 “방송, 신문 등에 나온 내 의견에 대한 반응이 즉각즉각 온다”며 “때로는 네티즌들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짚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현장 방문과 SNS 활용을 통해 여론을 읽는다 하더라도, 평론가들이 일상적 취재활동을 벌이는 기자들만큼 잘 알 수는 없지 않을까? 기자 출신인 김 평론가는 “그런 가정도 성립될 수 있지만 기자가 방송에서 독자적인 의견을 내면 그것이 마치 언론사의 입장인 것처럼 오도될 수 있다. 기자들의 몫은 칼럼과 해설, 분석기사를 통해 현실을 평가하는 것이고, 평론가처럼 출연하는 것은 직업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고 평론가의 ‘친박 논란’으로 불거진 평론가의 ‘공정성’ 논란에 대해서 다른 평론가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김종배 평론가는 “여러 명이 나오는 토론프로에서 자신의 편향을 드러내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단독 패널로 출연하는 경우에는 균형감이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경우에도 중요한 판단 잣대는 얼마나 사실에 근거하느냐다. 객관적 사실에 입장을 넣느냐, 주관적 견해를 앞세우고 객관적 사실을 변형, 왜곡시키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종배 평론가, “단독패널은 균형감 갖춰야”
김 평론가는 정치컨설팅, 선거기획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정치평론에 나서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과거 특정 정치세력이 몸담고 있었던 경험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평론을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정치세력과 연결된 관계자들이 객관적인 것처럼 평론에 나서는 것은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유 평론가는 평론가를 섭외하는 언론사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조중동 신문과 방송 출연 거부를 공개표명한 유 평론가는 “특히 종편의 경우 공정하다고 보기 어려운 극우 성향의 인사가 평론을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종편에서 ‘출연해서 자유롭게 소신껏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섭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미 특정 방향으로 분위기가 짜여진 상태에서 출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일 수 있다”며 “이를테면 토론 아이템이 ‘안철수의 사생활’일 경우 어떻게 공정한 토론이 이뤄질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론 흐름도 잘 읽고 있고, 공정성도 겸비한 교수, 여론조사 전문가 등은 나서서 정치평론을 해도 되는 것일까? 유창선 평론가는 “겸직으로 평론하는 사람들이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짚어낼 때도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기사를 읽고 분석하는 평론가와 달리 겸직으로 하는 경우는 인상비평으로 흐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독자적 ‘전업 평론가’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고성국 평론가는 “외국의 평론가들은 한국처럼 여기저기 보따리 장사하듯 다니지 않고 자기만의 연구를 계속하면서 높은 평론 수준을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

고 평론가는 더 나아가 전업적 평론가들을 키워보고 싶다는 희망도 밝혔다. 그는 “한국에 전업적 여성 평론가가 한 사람도 없다. 열약한 환경에서도 10년씩 전문성을 키워가는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 중에 전문적으로 평론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며 본인이 직접 그런 사람들을 발굴해내고 싶다고 말했다.

문제는 직업적 안정성이다. 아무리 이름난 평론가라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방송과 지면에서 쫓겨나면 생계를 유지할 방도가 없다. 유창선 평론가는 “10여년을 평론가로 살아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고성국 평론가도 “스스로 소진된다는 느낌”으로 평론을 하러 다닌다고 말했다. 그는 수준 높은 평론을 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언론진흥재단이나 방송사에 기자, PD 교육과정이 다 있습니다. 평론가의 말도 기자, PD가 만드는 콘텐츠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평론가의 존재를 중요한 영역으로 다룰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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