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1960∼70년대 농민들은 유신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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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농민의 일기에 나타난 생각, “유신 찬반투표는 부정투표의 현장”

1972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비상계엄령을 내린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투표율 91%, 찬성 91.%로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유신헌법에 대한 높은 지지율과 박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3연속 승리한 사실을 근거로 1960~70년대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노년층이 박정희 정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주장의 또다른 근거는 현재 여론조사다. 50대 이상 연령층의 다수는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박 후보에 대한 지지도는 도시보다 농촌에서 높다. 또한 저소득층, 저학력층일수록 박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높다.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1960~70년대에 농촌에서 30~4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박정희 정권을 적극 지지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

김영미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가 덕성여대 평화교육원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 백철 기자

김영미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가 덕성여대 평화교육원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 백철 기자

1929년생인 신상림씨(가명)는 박정희 정권 시절을 농촌에서 보냈다. 신씨는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근대식 초등교육을 받았고, 중·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으로 복무했다. 신씨는 김영미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가 14일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열린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어느 농민의 생활세계와 유신체제> 논문의 주인공이다.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에 살았던 신씨는 근대식 교육을 받고, 서울생활과 군생활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 농민’이었다.

정의와 민주주의가 판단 기준
박정희 정권시절 신씨는 박 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마을에서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신씨가 1959년부터 2005년까지 꼼꼼하게 적은 일기장을 보면 신씨의 공화당 지지가 결코 적극적인 차원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와 뒤이어 일어난 4·19 혁명이 신씨가 사는 마을에 어느 정도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던져줬다고 분석했다.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7월 치러진 총선 당시 신씨는 일기장에 “탄압과 압력의 독재에서 벗어난 오늘 선거는 과연 민권을 수호하는 자유 그대로의 선거다”라고 적었다.

‘정의’와 ‘민주주의’는 이후에도 신씨의 판단 기준이 됐다. 1960년 5·16 쿠데타 당시 신씨는 “라디오에서 이상스러운 말이 들려와 깜짝 놀랐다. 쿠데타가 아닐까? 자리의 탐냄이 아닐까. 장면 정권이 큰 잘못은 없다. 불과 8~9개월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 기간도 안되었다”라고 적었다. 1963년 대선 때는 “마땅히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들이 사무를 전폐하고 (공화당을 위한) 선거운동을 다니고 있다. 자유당과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물론 신씨는 박정희 정권과 유신헌법에 반대한 ‘투쟁가’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1963년 대선 직전 집안의 권유로 공화당에 입당했다. 이후 여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했다. 1973년에는 마을회의에서 이장으로 선출돼 3년간 이장직을 맡으며,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새마을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박정희, 김대중 두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펼친 1971년 대선 직후 벌어진 총선 때의 일기를 보면, 신씨의 ‘박정희 지지’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나는 평택군의 발전을 위해 여당(공화당)에 깨끗한 한 표를 줬다. 허나 발전이 된 도회지에서는 야당 의원이 많이 나타나 개헌 저지선을 이뤄주기를”(총선 직전) “내 바라는 대로 도회지인 서울과 부산에선 야당이 압도적 다수”(총선 직후)

또한 신씨의 일기장에는 박정희 정권시절 저질러진 부정선거 사례가 자세히 기록돼 있어, 유신헌법에 대한 압도적 지지가 과연 자발적인 것이었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다. 신씨는 1971년 대선 직전인 4월 7일,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가 갑자기 내려온 사실을 기록했다. 1973년 총선이 치러지기 직전에도 정부는 신씨가 사는 마을에 시멘트를 내려보냈다.

1972년 11월 21일은 유신헌법 국민투표일이었다. 당시 신씨는 국민투표 지도계몽요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참관인 모두 (유신헌법) 절대 지지자이다. 나 역시 찬성표를 했으나 공명투표가 아니어서 불쾌했다. 민주의 싹은 공명투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헌안에 찬성은 하나 대통령의 권한이 외국에 비해 특권적이며 대통령이 종신을 하게 되지 않나 생각. 비상계엄 하의 개헌도 좋은 결과는 아닌 것이다.”

“개헌 찬성하나 공명선거 아니라 불쾌”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이 날로 거세지자 박 전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과 자신에 대한 국민 찬반투표를 벌였다. 2월 12일 국민투표 결과 투표율은 80%, 유신헌법 찬성률은 73%로 나타났다. 당시 투표종사원으로 투표 참여를 독려했던 신씨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명선거는 말살되고 대리투표가 전면이며, 정부의 홍보활동으로 개표는 하나마나다. 참다운 민주주의는 어디 가고 부정투표의 현장이다.” 이 외에도 신씨의 일기장에는 공화당에서 선거운동을 해달라며 돈봉투를 주고, 술과 음식을 대접한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다.

김 교수는 신씨와 같은 ‘새 농민’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구술사 연구자이기도 한 김 교수는 “정치적 의식을 가진 농민의 상당수는 신씨와 같은 ‘새 농민’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마을마다 한두 명씩은 있었다. 이들 ‘새 농민’이 각자 마을에서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씨처럼 박 전 대통령과 공화당을 흔쾌히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 교수와 마찬가지로 구술사 연구자이자 이번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나선 이용기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현재 노년층의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강한데, 실제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의 지지 내용과 정도는 다른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비자발적인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나중에 과거의 기억을 윤색했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일전에 한 마을을 방문했던 이 교수는 “새마을운동과 박정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한 노인을 만났다. 하지만 이 사람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아니었다. 실제 새마을운동을 지도했던 사람은 박정희 정권에 시큰둥한 평가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이 교수는 “1980년 실시된 여론조사 중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비슷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미 교수는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노동자와 달리 농민은 보수적인 성향이고,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지지를 했을 것이라고 봤지만 그건 가설일 뿐이었다. 농민들도 라디오나 신문을 통해 사회를 보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또한 김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아픈 과거’를 정확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는 민족이 훌륭한 민족이다. 과거에 대한 성찰 없이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우리의 태도는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일본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신상림씨의 일기 내용은 가독성을 위해 원문과 다르게 일부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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