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공무원시험, 이의제기도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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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험생은 문제 오류 발견해도 ‘공식 루트’ 없어… 시험마다 이의제기 방식도 제각각

어떤 사람이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출제된 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자.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해당 시험을 본 수험생을 직접 섭외해 공식 이의제기란에 글을 올리도록 시키거나 시험 주관 부처에 직접 전화를 걸어 글이 아닌 말로 오류 내용을 알려주는 비공식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수험생이 아닌 사람은 공식적인 절차로 문제의 오류를 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험을 주관하는 부처별로 이의제기 방식, 기출문제 공개 여부도 제각각이다.

여러 가지 국가시험 중 응시자가 많은 것은 교육과정평가원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능 모의고사, 교원 임용고사, 행정안전부의 공무원시험, 법무부의 사법시험, 경찰청의 경찰공무원시험 등이다. 수만명이 몰리는 국가시험의 대부분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기출문제를 공개하고, 시험이 끝난 뒤 일정 기간 응시생에 한정해 시험문제에 대한 이의제기를 실시하고 있다. 응시생 여부를 가리지 않고 이의제기 접수를 받는 곳은 교육과정평가원뿐이었다. 공식적인 이의제기 절차가 아예 없는 시험도 있었다.

서울시 공무원시험을 마친 응시생들이 응시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서울시 공무원시험을 마친 응시생들이 응시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오랫동안 학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친 경력이 있는 신승욱씨(41)는 현재 공무원시험 교재를 집필하고 있다. 신씨는 교재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최근 치러진 국가직 7·9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 기출문제를 행정안전부 사이버국가고시센터에서 다운받았다.

서울시 공무원시험 이의제기 제도 없어
신씨는 출제된 한국사 문제들 중 이상한 문제를 발견했다.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내용이 확정된 것처럼 나온 선지가 포함된 것이다. 신씨는 사이버국가고시센터 이의제기란에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올리려 했지만 수험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올릴 수 없었다. 신씨는 “행안부 측은 수험생을 섭외해서 이의제기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현직 공무원 강사가 아닌 입장에서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동안 신씨는 여러 차례 국사편찬위원회, 교육과정평가원에 교과서와 수능시험 문제의 사실관계 오류를 지적해 왔다. 신씨는 그동안의 사례와 달리 행안부 사이버국가고시센터를 통한 공식적인 이의제기가 불가능하게 되자 공무원시험 수험생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다. 신씨가 지적한 문제의 오류가 한 매체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신씨는 그제서야 행안부 측으로부터 “지적한 부분도 같이 확인해보겠다”는 답을 받았다고 한다. 신씨는 “국가시험에 대한 이의제기를 공식 루트로 할 수 없고 개인적으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야 처리된다. 국가시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공무원시험의 이의제기가 수험생으로 한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행정안전부 시험출제과의 한 관계자는 “이의제기 절차에 대해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고 내부 지침에 따라 수험생 본인의 당락이 걸린 문제인 만큼 수험생에게만 오픈하고 있다. 학원강사, 대학교수 등 모든 사람들이 이의제기를 할 수 있으면 행정적인 낭비가 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수험생들도 학원강사 등 외부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는다. 국가시험 이의제기는 학문적인 논쟁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시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제3자가 이의제기를 하다보면 오히려 당사자인 수험생들이 선의의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며 “아직까지는 이의제기 대상을 확대하라는 요구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부 전문가의 개입으로 잘못된 문제가 바로잡힌 사례도 있다. 2007년 한국물리학회는 2008년도 수능시험 과학탐구영역의 한 문제에 대한 오류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당시 교육과정평가원은 이 이의제기를 무시했다. 이후 수능시험 오류 논란이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자 그제서야 평가원은 오류를 인정하고 복수정답을 인정했다.

평가원 출제관리팀 관계자는 “내부 지침에 따라 평가원에서 주관하는 모든 시험에는 이름과 전화번호만 남기면 누구라도 이의제기가 가능하다. 국가시험을 주관하는 부처마다 이의제기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순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의제기 제도 자체가 없는 곳도 있다. 행안부와 별도로 실시되는 서울시 공무원시험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서울시 인재개발원 측은 “다른 시험과 달리 서울시 공무원시험은 문제은행 방식”이라는 이유로 필기시험 이후 문제를 공개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문제에 대한 이의제기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문제은행 방식이란 출제자들이 미리 일정량의 문제를 만들어 두고, 매회 시험을 치를 때마다 문제은행에서 특정 문제를 골라 출제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기출문제가 차후에 다시 출제될 가능성도 있다.

출제자 편의 벗어나 국민 알권리 충족시켜야
서울시 인재개발원이 문제은행 방식을 고수하는 근거는 1999년 서울행정법원에서 내려진 한 판결에 있다. 1999년 7월 2일 재판부는 임모씨가 행정자치부 장관을 상대로 사법시험 1차 문제와 정답의 공개를 거부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벌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1999년 치러진 사법시험이 현행 서울시 공무원시험과 마찬가지인 ‘문제은행 방식’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수험생들은 “이미 고시학원을 중심으로 기출문제가 다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이의제기 자체를 막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회]공무원시험, 이의제기도 못하나

서울시 인재개발원 관계자는 “지속적으로 시험문제 공개를 요구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시행하지 못했고 현재는 공개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동안 공식적인 이의제기 절차는 없었지만, 인터넷 등으로 비공식적 민원을 제기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민원이 들어오면 내부적으로 검토를 거쳐서 잘못된 문제가 있으면 정정을 해서 발표를 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국가시험의 정답 공개와 이의제기는 전반적으로 불투명했다. 1999년과 2000년 연속으로 사법시험 수험생들이 제기한 재판과정에서 문제의 오류가 계속해서 드러나면서 2001년부터 사법시험 문제가 전면 공개되고, 공식적인 이의제기 창구도 개설됐다. 같은 해 5급 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에도 이의제기 제도가 생겼다.

2007년에는 7·9급 공무원시험, 2009년에는 경찰공무원시험이 각각 문제와 정답을 공개하면서 이의제기 제도를 신설했다.

경찰공무원시험 경험자인 최기성씨(가명·27)는 “2009년 이전에는 시험을 보고난 뒤 이의제기를 할 수도 없고, 문제가 공개되지도 않아 가채점 결과가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고 말했다. 사법시험을 치른 적이 있는 김진수씨(가명·28)는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인 만큼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다. 현재처럼 문제 공개를 아예 하지 않거나, 이의제기 대상을 수험생들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출제자 측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일선에서 국가시험을 주관하는 공무원들도 일관성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국가시험 관계자는 “각 부처의 재량에 맡기기보다 명확한 제도가 있어야 실무자 입장에서도 좋다”고 말했다. 이의제기 창구가 막혀 있어 비공식적으로 민원이 들어오는 것은 실무자 입장에서 힘들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개인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가능한 한 모든 시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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