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공포영화 걸작
여름이면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원고 청탁을 받곤 한다. 지난해 여름에도 <주간경향>을 통해 ‘여름휴가-피서 대신 영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그 전해 여름엔 다른 매체를 통해 ‘공포영화 감독과의 가상 인터뷰’라는 테마로 글을 싣기도 했다. 이번의 주제는 ‘여름에 즐길 수 있는 무서운 영화’다.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전 세계의 온갖 희귀한 영화들을 다 구경할 수 있는 IT강국에서, 합법적인 경로로 볼 수 있는 영화들을,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중심으로 독자들에게 추천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넓고 볼 영화는 많다. 오늘의 지면은 마우스 클릭이 여전히 두렵고 불법적으로 영화를 다운받는 것이 마냥 신기한 당신을 위해 바친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시민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숨은 공포영화 걸작들’이다.
0원의 공포
‘한국은 자국 영화 보존과 복원에 인색하다’는 개념은 이제 옛이야기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꾸준히 자국 영화의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로 이제 우리는 편하게 집안에 앉아 소문으로만 접하던 한국의 고전 걸작품들을 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VOD로 접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국영상자료원은 전 세계 동영상의 보고인 유튜브에까지 진출을 했는데, 고정 채널을 통해 이제 일부 영화들을 전 세계인들이 무료로 접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 채널을 통해 제공되는 무료 영화들 가운데 필자가 추천하는 작품들은 다름아닌 김기영 섹션이다. 김기영 섹션을 통해 총 7편의 영화가 서비스되고 있는데, 이 중 이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들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와 <화녀 82>, 그리고 <육식동물>이다.
김기영은 유현목, 신상옥과 함께 시대를 대표한 트로이카로 손꼽히면서도 작가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한국의 대표적인 거장이다. 그의 후반기 작품들은 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이 일그러지는 순간들을 묘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세 작품은 김기영의 그로테스크함이 절정을 이룬 작품으로, 장르 영화의 팬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걸작들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당신이 올 여름 무료로 볼 수 있는 가장 기이하고 웃긴 영화임이 틀림없다.
500원의 공포
럭키 맥키 감독의 2002년도 데뷔작 <메이>는 사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해외에서는 종종 지난 10년간 등장한 가장 훌륭한 공포영화들의 리스트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걸작이다. 내용은 이렇다. 어릴 적부터 심한 약시로 인해 해적 안대를 하고 다녀야만 했던 소녀 메이에게 생일에 찾아올 친구란 없었다. 그런 메이에게 엄마는 인형을 선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친구가 없으면, 직접 만들면 돼.” 이후 성인이 된 메이는 여전히 사교성의 부재로 인하여 타인의 취향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런 메이는 또래의 젊은 친구들에게 일종의 독특한 괴물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결국 소통과 신체의 불안정함에서 비롯된 메이의 불안과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가고 급기야 그녀는 최후의 결심을 한다. 주변 사람들의 신체를 모아 자신만의 친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신체 부위를 모아 또다른 생명체의 창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의 변주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면에서 소통에 관한 우화이기도 하다. 국가지도자에게 그 어떤 소통조차도 기대하길 포기한 우리 시대에 <메이>의 존재란 거의 기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의 부재가 과연 어떤 괴물을 만들어내는지 영화를 통해 느끼시라. 이 영화는 다음과 네이버 포털사이트에서 유료로 다운로드 서비스가 제공된다. 가격은 네이버가 500원으로 반값이다.
2000원의 공포
<고갈>(2008)은 비타협영화집단을 자처하는 ‘곡사’의 김곡 감독이 연출한 2008년도 작품이다. 곡사는 <화이트:저주의 멜로디>로 자본의 수혜를 입기 전까지 <자본당 선언> 같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독립영화계에서도 가장 거칠고 도전적인 집단으로 손꼽혔다. <고갈>은 그들의 독립영화 시절의 대표작이면서도 최고의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악몽’이다. 슈퍼8㎜로 촬영되어 35㎜로 확대된 영상은 마치 60년대의 아방가르드 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 거친 입자와 질감으로 인해 시종일관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반복적이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주는 악몽이 너무나 그럴싸해서 이 영화의 내용을 함축해서 표현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마지막 30분간 이어지는 충격의 연속적인 장면들은 21세기 한국에 데이빗 린치가 재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감상하고 놀라고 불쾌해 하시라. 다음과 네이버 포털사이트에서 2000원에 감상할 수 있다.
이맘 때쯤 한국 장르영화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론 무더위고, 다른 하나는 바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다.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장르영화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올 부천국제영화제가 막 폐막을 알렸을 시점일 것이다. 지금 소개하는 <타임 크라임>도 몇 해 전 부천을 통해서 국내에 소개됐던 작품이다. <타임 크라임>은 단연코 21세기 영화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시간여행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망원경으로 벌거벗은 여인을 훔쳐보다가 얼굴에 붉은 붕대를 한 괴한에게 공격을 당한다. 결국 남자는 괴한을 피해 외딴 공장으로 피신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슬래셔 영화의 법칙을 따른다. 하지만 이 공장이 알고 보니 비밀리에 운영되는 시간여행 연구소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환된다.
곧이어 영화는 우연히 시간여행 소용돌이에 휘말린 남자의 자기 존재 지키기의 처연한 투쟁을 보여주는데, 공포로 시작된 영화가 SF를 거쳐 천연덕스럽게 코미디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타임 크라임>은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최근 일련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시간을 다룰 때 평행우주라는 다소 안일한 방법을 택하는 동안 <타임 크라임>은 저예산의 아이디어만으로도 얼마나 훌륭하게 타임 패러독스를 다룰 수 있는지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올 여름 극장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본다면 그건 <다크 나이트 라이즈>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당신에게 집에서 한 편의 영화를 더 볼 여유가 주어진다면 이 영화를 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SK 브로드밴드 IPTV가 설치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이성원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