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더위 탈출! 무서운 영화에 빠져보시라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숨은 공포영화 걸작

여름이면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원고 청탁을 받곤 한다. 지난해 여름에도 <주간경향>을 통해 ‘여름휴가-피서 대신 영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그 전해 여름엔 다른 매체를 통해 ‘공포영화 감독과의 가상 인터뷰’라는 테마로 글을 싣기도 했다. 이번의 주제는 ‘여름에 즐길 수 있는 무서운 영화’다.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전 세계의 온갖 희귀한 영화들을 다 구경할 수 있는 IT강국에서, 합법적인 경로로 볼 수 있는 영화들을,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중심으로 독자들에게 추천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넓고 볼 영화는 많다. 오늘의 지면은 마우스 클릭이 여전히 두렵고 불법적으로 영화를 다운받는 것이 마냥 신기한 당신을 위해 바친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시민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숨은 공포영화 걸작들’이다.

왼쪽부터 김기영감독의 <육식동물>, <화녀 82>,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영화 포스터.

왼쪽부터 김기영감독의 <육식동물>, <화녀 82>,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영화 포스터.

0원의 공포
‘한국은 자국 영화 보존과 복원에 인색하다’는 개념은 이제 옛이야기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꾸준히 자국 영화의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로 이제 우리는 편하게 집안에 앉아 소문으로만 접하던 한국의 고전 걸작품들을 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VOD로 접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국영상자료원은 전 세계 동영상의 보고인 유튜브에까지 진출을 했는데, 고정 채널을 통해 이제 일부 영화들을 전 세계인들이 무료로 접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 채널을 통해 제공되는 무료 영화들 가운데 필자가 추천하는 작품들은 다름아닌 김기영 섹션이다. 김기영 섹션을 통해 총 7편의 영화가 서비스되고 있는데, 이 중 이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들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와 <화녀 82>, 그리고 <육식동물>이다.

김기영은 유현목, 신상옥과 함께 시대를 대표한 트로이카로 손꼽히면서도 작가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한국의 대표적인 거장이다. 그의 후반기 작품들은 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이 일그러지는 순간들을 묘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세 작품은 김기영의 그로테스크함이 절정을 이룬 작품으로, 장르 영화의 팬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걸작들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당신이 올 여름 무료로 볼 수 있는 가장 기이하고 웃긴 영화임이 틀림없다.

500원의 공포
럭키 맥키 감독의 2002년도 데뷔작 <메이>는 사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해외에서는 종종 지난 10년간 등장한 가장 훌륭한 공포영화들의 리스트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걸작이다. 내용은 이렇다. 어릴 적부터 심한 약시로 인해 해적 안대를 하고 다녀야만 했던 소녀 메이에게 생일에 찾아올 친구란 없었다. 그런 메이에게 엄마는 인형을 선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 <메이>의 스틸사진 | (주)디지털 네가

영화 <메이>의 스틸사진 | (주)디지털 네가

“친구가 없으면, 직접 만들면 돼.” 이후 성인이 된 메이는 여전히 사교성의 부재로 인하여 타인의 취향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런 메이는 또래의 젊은 친구들에게 일종의 독특한 괴물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결국 소통과 신체의 불안정함에서 비롯된 메이의 불안과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가고 급기야 그녀는 최후의 결심을 한다. 주변 사람들의 신체를 모아 자신만의 친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신체 부위를 모아 또다른 생명체의 창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의 변주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면에서 소통에 관한 우화이기도 하다. 국가지도자에게 그 어떤 소통조차도 기대하길 포기한 우리 시대에 <메이>의 존재란 거의 기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의 부재가 과연 어떤 괴물을 만들어내는지 영화를 통해 느끼시라. 이 영화는 다음과 네이버 포털사이트에서 유료로 다운로드 서비스가 제공된다. 가격은 네이버가 500원으로 반값이다.

2000원의 공포
<고갈>(2008)은 비타협영화집단을 자처하는 ‘곡사’의 김곡 감독이 연출한 2008년도 작품이다. 곡사는 <화이트:저주의 멜로디>로 자본의 수혜를 입기 전까지 <자본당 선언> 같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독립영화계에서도 가장 거칠고 도전적인 집단으로 손꼽혔다. <고갈>은 그들의 독립영화 시절의 대표작이면서도 최고의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악몽’이다. 슈퍼8㎜로 촬영되어 35㎜로 확대된 영상은 마치 60년대의 아방가르드 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 거친 입자와 질감으로 인해 시종일관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타임크라잉> 스틸사진 | (주)소나무 픽쳐스

<타임크라잉> 스틸사진 | (주)소나무 픽쳐스

반복적이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주는 악몽이 너무나 그럴싸해서 이 영화의 내용을 함축해서 표현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마지막 30분간 이어지는 충격의 연속적인 장면들은 21세기 한국에 데이빗 린치가 재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감상하고 놀라고 불쾌해 하시라. 다음과 네이버 포털사이트에서 2000원에 감상할 수 있다.

이맘 때쯤 한국 장르영화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론 무더위고, 다른 하나는 바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다.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장르영화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올 부천국제영화제가 막 폐막을 알렸을 시점일 것이다. 지금 소개하는 <타임 크라임>도 몇 해 전 부천을 통해서 국내에 소개됐던 작품이다. <타임 크라임>은 단연코 21세기 영화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시간여행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망원경으로 벌거벗은 여인을 훔쳐보다가 얼굴에 붉은 붕대를 한 괴한에게 공격을 당한다. 결국 남자는 괴한을 피해 외딴 공장으로 피신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슬래셔 영화의 법칙을 따른다. 하지만 이 공장이 알고 보니 비밀리에 운영되는 시간여행 연구소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환된다.

<고갈> 스틸사진 | 서울독립영화제

<고갈> 스틸사진 | 서울독립영화제

곧이어 영화는 우연히 시간여행 소용돌이에 휘말린 남자의 자기 존재 지키기의 처연한 투쟁을 보여주는데, 공포로 시작된 영화가 SF를 거쳐 천연덕스럽게 코미디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타임 크라임>은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최근 일련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시간을 다룰 때 평행우주라는 다소 안일한 방법을 택하는 동안 <타임 크라임>은 저예산의 아이디어만으로도 얼마나 훌륭하게 타임 패러독스를 다룰 수 있는지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올 여름 극장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본다면 그건 <다크 나이트 라이즈>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당신에게 집에서 한 편의 영화를 더 볼 여유가 주어진다면 이 영화를 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SK 브로드밴드 IPTV가 설치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이성원 <자유기고가>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