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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딸들 갤러리에서 뛰쳐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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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경영 참여 증가… 백화점·패션·호텔업에서 ‘자존심 대결’

재벌가 여성의 경영 참여에도 트렌드가 있다. 과거 재벌가 여성은 갤러리나 미술관 관장 역할을 많이 맡아 기업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경영에 직접 나서지 않고 내조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하지만 재벌가 여성 2~3세대로 내려오면서 직접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이들이 진출하는 분야는 백화점·명품 수입 등의 유통업, 호텔 등의 서비스업, 패션 등이 대부분이다.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꼼꼼함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쉽게 실적을 낼 수 있는 분야에만 진출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재벌가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유통업, 서비스업, 패션 분야에 진출한 재벌가 여성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순으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유통업, 서비스업, 패션 분야에 진출한 재벌가 여성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순으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섬세함 무기로 호텔업계 ‘두각’
6월 8일 현대그룹이 서울 강북의 유일한 6성급 호텔인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을 1635억원에 인수했다. 재계에서는 현정은 회장의 호텔 인수가 장녀인 정지이씨의 사업 확대를 위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지이씨는 현대그룹 IT계열사인 현대유엔아이 전무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호텔 인수는 정지이 전무와 상관이 없다. 계열사 하나가 늘어난 일”이라며 “금강산 호텔 경험도 있고, 신사업을 찾다보니까 호텔을 인수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호텔을 인수하면서 호텔사업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호텔사업을 통해 사업가의 수완을 보여주고 있는 재벌가 여성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녀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 이명희 신세계 회장 차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셋째딸 정윤이 현대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 등이 꼽힌다.

이부진 사장의 경우 2001년 9월 호텔신라 기획부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해 호텔신라 CEO까지 올랐다. 호텔사업을 통해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조현아 대표이사는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고, 1999년 대한항공 호텔 면세사업본부 팀장으로 입사하면서 호텔사업에 뛰어들었다. 기내식에 비빔국수 등을 내놓아 대한항공 기내 서비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1996년 조선호텔 등기이사에 오르면서 경영일선에 나선 정유경 부사장은 10여년 동안 조선호텔에 공을 들여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정윤이 전무는 드러나지 않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 대기업 관계자는 “호텔 업무 자체가 섬세한 면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인력이 많은 업종”이라며 “요즘 호텔 경영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예전처럼 낙하산 인사라고 보기 어렵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수익을 쉽게 낼 수 없는 호텔업계에서 수익도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면세점과 백화점, 명품 수입도 선호하는 분야다. 명품 수입과 연결되어 있고, 여성의 장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재벌가 여성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한 분야이기도 하다. 롯데면세점 신영자 사장(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 사이에 벌어졌던 면세점 유치 경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재벌가 딸들 갤러리에서 뛰쳐 나오다

삼성·현대차 여성 CEO, 광고시장 양분
2009년 매물로 나온 AK글로벌을 두고 신 사장과 이 사장이 경쟁을 펼쳤지만 신 사장이 승리를 했다. 면세점을 두고 반전이 일어난 것은 ‘루이비통’ 유치전이었다. 2011년 9월 이부진 사장이 신라면세점에 루이비통을 입점시키고 화려한 개장식을 열었다. 루이비통은 인천공항 면세점 매출을 견인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개장 이래 올해 5월까지 총 매출이 762억원에 이르는 것. 인천공항에 있는 70여개 단일 매장 가운데 매출 1위다. 루이비통 매장 입점을 두고 신 사장과 이 사장이 치열하게 경쟁을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일모직 이서현 부사장은 2008년부터 해외 고급 브랜드 수입을 이어오고 있다. 이세이미야케, 띠어리, 토리버치 등이 제일모직에서 수입한 브랜드들이다. 미국 명문 파슨스디자인대학을 나온 것을 무기로 패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정유경 부사장도 해외 명품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신세계인터내셔널을 통해 코치, 조르지오아르마니, 돌체앤가바나 등의 명품 브랜드를 수입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패션 브랜드 ‘톰보이’도 인수하면서 명품과 패션 분야의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광고시장에서도 재벌가 여성의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서현 부사장이 이끌고 있는 제일기획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 맞붙고 있다. 이노션은 설립 3년 만에 방송광고 기준 매출액 순위 2위에 오를 정도로 그룹의 광고물량에 힘입어 제일기획에 이어 광고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2011년 제일기획은 7200억원의 매출액을 올렸고, 이노션은 34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중견기업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관계자는 “재벌가 여성들이 실적을 낼 수 있는 사업에 진출하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기업이 중소기업 분야까지 침해를 하는 것은 동반성장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때 재벌가 여성에게 사랑받았던 갤러리·미술관 관장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2008년 6월 삼성 비자금 사태로 사퇴했다가 2011년 3월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으로 복귀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아내 박문순씨는 성곡미술관장,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부인 노소영씨는 아트센터 나비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여성 부호 대부분 증여·상속으로 재산 형성
대기업 홍보실 관계자는 “재벌가 여성이 경영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성의 감성이나 장점이 잘 발휘될 수 있는 분야가 서비스업이나 유통이라고 판단을 한 것 같다”면서 “재벌가 여성들이 그런 분야에 서로 진출하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LG그룹은 여성의 진출이 거의 없다. 구본무 회장은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장녀는 결혼을 했고, 차녀는 아직 학생이다. 구 회장의 딸은 그룹 경영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 구 회장의 아버지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구훤미, 차녀 구미정씨 역시 그룹 지분만 가지고 있을 뿐 경영에 참여를 하지 않고 있다.

LG그룹 관계자는 “LG그룹은 전통적으로 딸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벌가 여성의 재산은 얼마나 되나?
삼성가 여성들 상위권 차지

지난해 10월 재계전문사이트 재벌닷컴이 ‘한국 400대 거부들’이라는 조사자료를 발표했다. 1813개 상장사와 1만4289개 비상장사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을 대상으로 본인 명의로 보유한 주식, 배당금, 부동산 등 등기자산을 평가한 결과다. 국내 400대 부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여성은 총 37명이다.

범 삼성가 여성의 재산평가액이 대부분 상위권을 차지했다. 재산이 가장 많은 여성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으로 주식지분가치를 포함한 재산평가액이 1조9220억원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재산평가액은 1조515억원으로 여성부자 2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과 홍라희 리움 관장이 차지했다.

1조원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여성부자는 이명희 회장, 이부진 사장, 이서현 부사장이다.

여성 재산 순위에서 눈에 띄는 것은 37명의 여성부호 중 경영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증여나 상속으로 재산을 형성한 여성들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오리온그룹 이화경 사장,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승산 허인영 대표이사, 이노션 정성이 고문,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 푸른그룹 구혜원 회장 등이 직접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대표적인 여성들이다. 스스로 창업해 성공한 자수성가형 부자는 게임업체인 JCE 김양신 회장이 꼽힌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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