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용산 후유증,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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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 23가구 정신적·경제적 고통… 재개발 지연으로 함바집 운영도 늦어져

“지금 사는 게 말이 아니에요.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나아진 건 없어요. 그때 일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네요.”

용산4구역. 3년 전,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곳이다. 당시 용산4구역에는 23가구의 철거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참사가 벌어진 2009년 1월 20일부터 장례가 치러진 2010년 1월 9일까지 355일을 정부와 싸웠다. 병원 장례식장과 폐허가 된 남일당 건물, 서울시청 앞이 주요 농성장이었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시냐’는 물음에 ‘그 얘기라면 안 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두 차례의 요청 끝에 인터뷰에 응한 김정애씨(가명)도 그랬다. 김씨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날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끔 꿈도 꾼다. 악몽이다.

2009년 12월 용산참사 유족과 철거민들이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공정한 수사를 요구하며 흐느끼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09년 12월 용산참사 유족과 철거민들이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공정한 수사를 요구하며 흐느끼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김씨는 현재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60대 초반인 김씨의 몸은 불편해 보였다. 정부와 싸웠던 1년 동안 집에 들어가 편히 쉬었던 날이 없었다. 장례식장 구석에서, 임시천막에서 쪽잠을 잤다. 싸움이 끝나자 몸이 먼저 무너졌다. 부인병이 도졌고, 하지정맥류로 다리가 심하게 부어 올랐다. 어느날 아침에는 허리디스크로 병원에 실려갔고, 왼손이 쓸 수 없을 정도로 저려 왔다. 수술만 네 번을 했다.

생계 어려워지면서 마음마저 무너져
“내가 움직여 벌어야 해.” 뻣뻣한 왼손을 들여다보며 김씨가 말했다. 김씨는 장애가 있는 작은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김씨가 일을 해야만 한다. 디스크 때문에 힘든 일은 못해도 설거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왼손을 수술한 지 두 달이 지난 얼마 전, 식당 설거지 일을 구했다. 하지만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나절 일을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돌아왔다.

“내 장사 할 때는 넉넉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하고 살았는데.” 김씨는 용산에서 실내포장마차를 했다. 25년 전 4500만원을 투자해 시작한 일이었다. 나갈 때 받은 평가금은 720만원. 1년간의 싸움 끝에 조합으로부터 3200만원을 더 보상받았지만, 일을 하지 못하는 사이 1200만원의 빚이 더 늘어 있었다. 새로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기는 어려웠다. 

정부는 생계대책 차원에서 용산4구역 재개발 현장의 임시식당(함바) 운영권을 23가구에게 준다고 약속했다. 협상 당시 6개월 후면 공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시공사와 조합 측의 이해다툼, 부동산 불경기 등의 이유로 공사는 기약없이 미뤄지고 있다.

공사가 지연되고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김씨의 마음마저 무너졌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일단 피했다.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 외출도 하지 않았다. 함께 싸웠던 철거민들과도 연락하지 않고 용산4구역 철거민들이 매달 모이는 명동성당 미사에도 마음이 불편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텔레비전에서 화재 장면이 나오면 얼른 꺼버린다. 그는 “육십 평생을 가족들 챙기고 일만 열심히 하면서 살아 왔는데 이렇게 험한 꼴 당하고 나니까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건 아닌지 되짚어보게 되더라”고 말했다.

철거민 중 나이가 젊은 축인 신영옥씨(가명)도 경제적으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씨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자신은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많은 대부분의 철거민들은 새로 일을 시작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혼자 남겨졌다는 공포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신씨는 “사람들은 시일이 지났으니까 다들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용산4구역 사람들,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힘들다”고 말했다. 1년을 싸웠고, 이후에는 경제적 곤란을 겪으면서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게 남았다는 것이다. 신씨는 “그 후유증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각자 개인이 안고 가야 할 몫으로만 남았다”고 말했다.

신씨는 정부와의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도 1년 더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남일당 건물 주거침입, 경찰폭행, 불법시위 참가 등의 죄목을 들어 검찰이 신씨를 기소했기 때문이다. 재판은 1년을 넘게 끌었고 수시로 법원으로, 검찰청으로, 경찰서로 불려다녔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이 그렇게 큰일인지 몰랐다”면서 “정말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 3년도 컸지만 더 아찔했던 것은 사회봉사 300시간이었다.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야 할 상황에서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받으니 눈앞이 깜깜했다. 다행히 항소심에서 사회봉사 300시간을 면제받았다. 판사가 사회봉사 300시간을 면한다고 말하자, 신씨를 비롯해 법정에 선 7명의 철거민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신씨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집행유예 3년형은 말도 안 되는데 생계가 너무 절박하다보니 그건 생각할 틈도 없이 자동으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다”며 “우리가 얼마나 약자인지, 우리는 정말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는 약자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지 몰랐고, 지금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얼마나 약자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경제적으로 힘들기는 신씨도 마찬가지다. 싸우는 기간 중 일을 접었고, 싸움이 끝나고 새로 장사를 시작하면서 빚을 졌다. 매달 15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지난 2년간 매일 4시간밖에 못 잤다. 신씨는 “하지만 바쁜 게 오히려 더 낫다”고 말했다. 바쁘기 때문에 오히려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이 바라는 것은 공사가 시작돼 임시식당을 하루 빨리 여는 것과 구속자들이 석방되는 것이다. 김정애씨(가명)는 “나도 어렵지만 23명 중에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임시식당이 빨리 해결되고 죄 없는 구속자들, 다들 한 가정의 가장인데 이 사람들을 하루 빨리 석방시켜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조직폭력배도 아니고 남의 집에 가서 도둑질한 것도 아니고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모여서 했던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죄가 될지 몰랐다”며 “재개발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세입자 문제 대책을 마련한 후에 재개발을 하는 게 사람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은 유족들의 슬픔 “진상 규명 되어도 깊은 상처 아물지 못할 것”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테니까요.”
용산참사 3년. 김영덕씨는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용산참사로 사망한 고 양회성씨의 아내다.

2009년 12월 30일 용산참사 협상 타결을 알리는 기자회견 도중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2009년 12월 30일 용산참사 협상 타결을 알리는 기자회견 도중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법원은 용산참사의 원인을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이라고 결론지었다. 경찰의 진압 또한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경찰의 증언도 있었다. 당시 경찰의 진압에 무리가 있었고,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는 증언이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참사의 책임은 농성자들에게 남았다. 김씨는 “법원에서 재판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말 뒤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며 “권력의 눈치를 보는 재판이 무슨 재판인가”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 나라의 법은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죄없고 힘없는 서민들만 감옥에 가고, 힘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건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로 실질적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오사카 총영사가 총선 출마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김씨의 표현대로라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일이었다. 그는 “그 사람이 책임자로 있을 때 용산참사가 발생했고 6명이 죽었다”며 “세상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됐다”고 말했다.

김씨의 소원은 하루 빨리 진실이 밝혀져 구속자들이 석방되는 것이다. 망루에 올라갔던 농성자들이 폭도도 테러리스트도 아닌 그저 선량한 시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순천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김창수씨 면회를 다녀왔다. 김창수씨는 김씨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김씨도 울면서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니 자신감 잃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만 겨우 전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김씨는 바라는 대로 진상규명이 되어 사건이 매듭지어져도 깊은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는 마음의 병으로 남았다. 걷잡을 수 없이 서글픈 마음이 들 때가 많고 텔레비전에서 조금만 슬픈 장면을 봐도 눈물이 쏟아졌다. 3년이 지났지만 그 세월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이 지금도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는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집에 들어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여다보면 그저 정신이 멍해진다”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우울증이 올 수 있다며 약을 권했다. 윤씨는 “그래도 자식들을 위해서 강하게 마음을 먹는다”고 말했다.

고 윤용헌씨의 아내 유영숙씨도 3년째 진상규명을 외치며 정부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윤용헌씨는 서울 순화동의 철거민으로 참사 당시 연대투쟁에 나섰다가 사망했다. 유씨는 남편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고 전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남편은 화재가 난 망루에서 4층 난간으로 뛰어내렸다. 생존자는 윤씨가 망루에서 4층으로 뛰어내린 후 내려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유영숙씨는 망루에서 뛰어내렸다는 남편이 망루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씨는 “당시 유족의 동의 없이 부검이 이루어진 점, 남편의 갈비뼈가 어긋나 있었던 점 등을 보면 화재가 아닌 다른 이유로 사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빨리 진상규명이 되어야 남편이 편안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편안히 못 있을 것 같다”며 “진상규명이 되면 그때는 정말 마음놓고 울고 싶다”고 말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유씨는 지금도 남편의 죽음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족끼리 놀러다녔던 기억들이 떠오르면 그때마다 남편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시력이 약했던 둘째아이는 남편이 사망한 후 충격으로 한동안 앞이 안 보이기도 했다.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았지만 다음달 또 한 차례 수술을 앞두고 있다. 남편이 보물처럼 여겼던 아이인 만큼 남편이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구속된 분들도 안타깝지만 그분들은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은 시간이 지나도 되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갔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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