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용산사태로 수감중인 이충연·김주환 씨 옥중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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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지는 게 제일 슬픕니다”

1월 3일, 용산참사 철거민들 중 가장 긴 5년 4개월의 실형을 받은 이충연 용산4구역 상가공사철거대책위원장(39)을 만나러 안양교도소로 향했다. 이 위원장은 일면식도 없는 기자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3년간 옥에 갇힌 사람의 표정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어쩌면 ‘수감자’에 대한 기자의 편견이 담긴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이 위원장은 밝게 웃으며 기자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2010년 1월 6일 부친이자 용산참사 희생자인 이상림씨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일시 석방된 이충연씨가 어머니 전재숙씨와 상봉했다. | 강윤중 기자

2010년 1월 6일 부친이자 용산참사 희생자인 이상림씨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일시 석방된 이충연씨가 어머니 전재숙씨와 상봉했다. | 강윤중 기자

이 위원장은 용산참사 수감자인 동시에 유가족이다. 이 위원장의 아버지인 이상림씨는 경찰특공대가 철거민 진압을 위해 공중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들어온 2009년 1월 20일 세상을 등졌다. 농성하던 남일당 건물이 불에 타면서 이상림씨를 비롯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검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졸지에 이 위원장은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됐다.

2010년 11월 대법원은 이 위원장을 비롯한 8명에게 짧게는 4년, 길게는 5년 4개월의 징역형을 확정판결했다. 이 위원장에게는 최장기 형이 내려졌다.

3년간 수감돼 있었지만 아직 2년 넘게 형기가 남아 있다.
“용산참사의 진상규명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은 갇혀 있지만 언젠간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있다고 보나.
“시간이 지나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분들이 격려편지를 보내주고 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일본에서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우리들에게 있어 남들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는 게 제일 슬픈 일이다. 당장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시간을 가지고 진실을 밝혀나가는 수밖에 없다.”

잊혀진다는 말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무엇보다도 언론에서 더이상 우리를 다루지 않고 있다. KBS·MBC에 낙하산 사장이 들어오고, SBS 전 사장은 청와대로 들어가서 대통령실장이 됐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에서 용산참사 소식을 볼 순 없게 됐지만, 경향신문 등의 매체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뤄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통합당에서 BBK사건으로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사면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동안 야권에서 용산참사 수감자들의 사면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나.
“일전에 민주당 쪽하고 얘기가 돼서 국회에서 용산참사 사면촉구결의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이후 미디어법, 한·미 FTA 등 사안이 등장하면서 뒤로 밀렸다. 하지만 우리가 사면되는 것보다 한·미 FTA가 훨씬 중요한 이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섭섭해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넉넉한 것 같다.
“우리가 풀려난다고 사회가 당장 어떻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미 FTA, 강정마을 문제나 미디어법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일들이다. 이번 정권 들어와서 이렇게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순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한 것이다.”

희망버스 송경동 시인과도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들었다.
“사실 송 시인께서 용산참사 때 저희를 많이 도와주셨다. 얼마 전 송 시인께서 편지를 통해 ‘세상을 보려면 여기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잘못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꾸는 힘을 모아야 하고, 그 힘은 배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느꼈다.”

이 위원장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지만, 다른 분들은 전부 지방에 위치한 교도소로 갔다.
“가족들이 다들 먼 곳으로 면회를 간다고 들었다. 다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 입장에서 초등학생 정도 되는 자식들이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지쳐 보이는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다른 교도소에 있는 분들과도 자주 편지를 나누는 모양이다.
“사실 편지를 자주 하진 않는다. 남자끼리라서 그런가. (웃음) 이감을 간다든지 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땐 꼭 편지를 보낸다.”

이충연씨가 구속된 안양교도소 입구의 모습. | 백철 기자

이충연씨가 구속된 안양교도소 입구의 모습. | 백철 기자

교도소 안에서 다른 수감자들이 위원장을 어떻게 보고 있나.
“이곳에 계신 분들 상당수가 열약한 환경 속에 있는 분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저보고 양심수라고도 하는데 그런 면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있다.”

짧은 면회시간이 끝났다. 이 위원장과 같은 기결수에게는 월 5회, 12분의 면회시간이 주어진다. 안양교도소 측은 “부인 등 직계가족이 가족사 등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경우 소장 재량으로 추가로 특별면회를 허락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충연 위원장의 부인 정영신씨(40)는 용산참사를 겪으면서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게 됐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정씨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희망버스’였다.

정씨와 이 위원장은 2006년 12월 이 위원장의 부모와 함께 남일당 건물에 호프집을 개업했다. 3년만 열심히 살면 가게를 얻을 때 졌던 빚도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 가족은 용산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었죠. 재개발이 확정된 이후 신랑이 구청에도 찾아가고 변호사도 알아봤지만 대책이 없었고 결국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참사가 벌어지거나 신랑이 감옥에 가는 일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용산참사 사망자인 시아버지 이상림씨의 제사를 치른 뒤 정씨는 바깥 생활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씨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래 저는 신문도 방송도 보지 않던 평범한 아줌마였어요. 그런데 김진숙씨를 알게 되고 희망버스를 타면서 억울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 같은 상처가 생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직접 일을 당하다보니 자연스레 옆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희망버스로 개근을 했어요.”

정씨는 현재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씨는 “남편을 면회가면 항상 자신은 잘 있다고 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해요. 본인도 아버지와 동료를 잃고 생각지도 못한 옥살이를 하고 있지만 약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을 만난 지 이틀 뒤인 1월 5일에는 춘천교도소를 찾았다. 이곳에는 전국철거민연합회 소속인 김주환 전 신계동 철거대책위원장(47)이 갇혀 있다.

김씨는 남일당 건물 세입자는 아니다. 그는 남일당 건물 인근에 있는 서울 용산구 신계동에 살던 세입자였다. 2008년 봄부터 신계동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김씨도 삶의 터전을 잃었다. 김씨는 “같은 처지를 겪어봤기 때문에 동지애로 남일당 건물을 찾았다”고 말했다.

김주환씨가 갇혀 있는 춘천교도소. | 백철 기자

김주환씨가 갇혀 있는 춘천교도소. | 백철 기자

수감된 지 3년이 지났다.
“3년이 지났지만 무덤덤하다. 초반에 받았던 격려가 조금 줄어드는 부분도 있지만 세월이 길다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다. 교도소에 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이제 적응이 다 됐다.”

구속노동자후원회 등 여러 단체에서 영치금과 물품을 후원하는 것으로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나.
“사실 그분들도 힘든 상황에서 우리를 돕고 있다. 많은 고마움을 느낀다. 밖에서 보내주시는 소식지를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보내주신 물품 받으며 기운을 낸다. 이런 분들 덕에 이 안에서도 힘을 내서 살 수 있다.”

가족들도 자주 면회 오나.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동생이 있다. 동생과는 주로 현재 진행되는 다른 재개발 상황이나 신계동 철거민들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다른 교도소에 있는 용산참사 피의자 분들과 교류는 많이 있나.
“편지를 많이 나누진 못했다. 특히 대전에 계신 남경남 전철연 의장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다. 이제는 건강이 좀 나아졌는지 궁금하다.”

교도소 안에서 다른 수감자들은 용산참사 구속자분들을 어떻게 대하던가.
“우리가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떳떳하고 당당하게 지냈다. 그래서인지 다른 분들이 우리를 다른 시선으로 봐주시는 경우가 있다. 물론 교도관들은 다른 수감자나 우리나 비슷하게 취급한다.”

이제 교도소 생활이 적응됐다고 했는데, 그래도 불편한 일은 많지 않나.
“운동시간이 하루에 1시간이다. 햇볕을 보고 살 수가 없다. 범죄자 신원 확보를 이유로 DNA를 채취해가는 일도 있었다.”

김 위원장은 남일당 세입자가 아니다.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일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는 용산 신계동 철거민이다. 우리 지역 사안이나 남일당 사안이나 똑같다. 같은 처지를 먼저 겪어봤기 때문에 동지애로 남일당 건물을 찾은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용산참사의 진상을 다시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반드시 재심을 해야 한다. 일전에 야권에서 우리들에 대한 사면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논의가 없다. 정치인들이 우리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데 써먹은 것이란 기분이 많이 든다.”

조만간 설날 특별사면 대상자 발표가 있을 예정인데, 혹시 기대하는 부분은 없나.
“이 정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별로 기대는 없다.”

용산참사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돼야 한다고 보나.
“사실 특별히 생각해본 바는 없다. 다만 세입자들이 재개발로 인해 살던 곳에서 밀려나는 일이 없는 방향으로 빨리 제도화가 돼야 한다고 본다.”

현재 용산참사진상규명위는 강제퇴거금지법 제정과 구속된 철거민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정영신씨는 “개발사업의 문제점이 불거질 때마다 정부는 ‘이것만 모면하자’는 식이었습니다. 제2·제3의 용산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실제 거주민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용산참사 진상규명에 나섰던 시민단체는 ‘용산참사 3주기 추모위원회’를 구성하고 오는 15일부터 20일까지 추모주간을 가질 예정이다. 추모 기간 중 추모위원회는 공개 좌담회, 릴레이 1인시위 등을 벌일 계획이다.

용산참사 일지 

2009년

1월 19일 용산4지구 철거민 20여명 남일당 건물 농성 돌입.

1월 20일 경찰특공대의 농성 강제진압. 철거민 5명, 경찰 1명 사망.

2월 10일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서울경찰청장) 용산참사 문제로 사퇴.

3월 12일 1심 재판 개시.

7월 8일 용산4지구 철거민들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농성 돌입.

10월 3일 정운찬 총리 용산참사 분향소 방문.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 이충연 위원장 등 철거민 8명 징역, 2명 집행유예 선고.

11월 22일 아이린 칸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용산참사 유족 방문.

12월 30일 정 총리, 유가족에게 유감의 뜻 표명. 보상협상 타결.

2010년

1월 9일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 장례식.

2월 9일 인권위 ‘경찰권 행사는 위법’ 의견 법원에 제출.

5월 31일 서울고등법원, 철거민 8명 징역, 2명 집행유예 선고.

10월 26일 박원순 서울시장, “용산참사 같은 참혹한 일 없도록”

11월 11일 대법원, 철거민 8명 징역, 2명 집행유예 확정.

2011년

1월 15~20일 용산참사 3주기 추모주간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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