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

한·미FTA 무효화 투쟁 앞장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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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경제통합협정”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말을 멈추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뷰는 서울시내 한 식당의 작은 방에서 시작됐는데, 갑자기 밖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소란은 한동안 지속됐지만 창이 짙게 선팅이 돼 있어서 무슨 일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아이들인가 본데요. 꼭 새소리처럼 들리네요.”
기자의 말에 비로소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맞아, 새소리 같아”라며 맞장구쳤다. 어느 유치원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곧 멀어졌지만 그 여운이 방안에 잠시 남았다. 짧은 시간 일어난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으려고 애썼다. 한때 정치의 최정상에 있다가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했던, 그래서 깨끗하게 공개적으로 반성문을 쓰고 바닥에서 거듭 태어났다는 ‘정치인 정동영’의 달라진 면모를 느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한·미FTA 무효화 투쟁 앞장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인터뷰가 이루어진 지난 11월 24일은 원래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강행 처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날이었다. 정 최고위원이 한·미 FTA 반대집회에서 “국회로 와서 담장을 에워싸 달라”며 국회 점령을 ‘선동’한 바로 그날이다. 민주당이 한·미 FTA 반대 쪽으로 당론을 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국회 비준 저지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고 할 수 있는 그를 바로 그날 그 시간에 이렇게 한가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날치기 덕분에 인터뷰가 더 수월해진 셈이다.

뜻밖에 정 최고위원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황야의 무법자’ ‘민주노동당 정동영 의원’이라는 별명 아닌 별명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얼마 전 국회방송에서 부인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는 장면처럼 자상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창밖을 지나가는 소리에 반응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미 FTA 무효화투쟁위원회가 언제 구성됩니까.
“구성하고 있어요. 47명의 결사항전파 의원에다 자발적으로 같이 하겠다는 사람으로… 내일(11월 25일) 아침 소집을 해놨습니다. 거기 오는 사람이 위원이라고 했어요.”

정 최고위원께서 위원장을 맡는 겁니까.
“글쎄 저를 위원장 하라고 해놨더라고요. 해야죠. 사실은 의원직 총사퇴를 해야 맞는데, 고민하고 있어요.”

의원직 총사퇴를 하면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국민적 분노를 조직할 수 있죠. 예수를 못 박은 건 빌라도지만 팔아넘긴 건 가롯유다란 말이에요. 지금 (민주당이) 가롯유다같이 돼 있잖아요. 속죄를 해야지. 무릎 한 번 꿇는 것만으로는 안 되죠.”

국회 일정이 전면 중단된 상태인데, 다시 복원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합니까.
“사실상 뭐 국회는 끝났죠.”

예산안 처리 등 아직 해야 할 게 남아 있잖아요.
“남아 있는데, FTA에 비해서는 큰 건 아니죠. 이제까지 그랬듯이 자기들이 또 날치기하면 되니까….(웃음)”

법적 대응으로 위헌심판청구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민변하고 검토하고 있죠. 한·미 FTA는 헌법 119조, 123조와 정면으로 충돌하거든요. 경제력의 집중과 시장 지배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하라는 건데, 그걸 하지 말라는 게 FTA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봐도 위헌이죠. 충분히 다퉈볼 수 있죠.”

정 최고위원은 지난 11월 22일 국회에서 처리된 한·미 FTA는 ‘정치적·법률적·정신적으로 무효’임이 확인된 이상 국민과 함께 전면 무효 투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여소야대를 통해서 한·미 FTA의 실질적인 효력을 정지시키고 민주진보정부 수립을 통해 즉각 독소조항이 든 FTA의 파기를 선언할 것”이라며 그 수순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한·미 FTA가 발효된다면 이를 파기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하기 나름이에요. 이미 기정사실화됐다는 게 이 정권의 시각인 반면 여기에 저항하는 시각은 주권자가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찬성하는 국민도 알고 찬성한 사람 별로 없잖아요. 좋은 건가보다 하고 따라갔는데 엄청난 독소 교과서라는 걸 알면 용납하지 않죠. 내년 총선에서 우리가 다수당이 돼서 국회 입법 과정을 통해서 FTA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입법을 검토해야 하겠죠. 그 다음에 24.5위원회, 저희가 이렇게 명명하려고 합니다만… FTA 24장 5조에 일방이 상대방에게 문서로 협정의 무효를 통보하면 180일 뒤에 효력이 끝나는 걸로 돼 있는데, 그것만 딱 있어요.”

그건 국회가 아니라 정부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FTA를 체결해서 기정사실화한 뒤에 1년 가서 갑자기 하는 건 불가능해요.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세계적으로 그런 전례가 없기 때문에 힘의 역관계에서 엄청난 전방위적인 보복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조항에 대한 투쟁이 중요한 거죠. 제 주장은 미국 의회와 백악관, 오바마 행정부에다 정확히 통보하자, 우리 야당과 시민사회는 여기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년 4월에 국민적 심판을 받으면 우리 이거 폐기한다, 이렇게 미리 경고하자는 것이죠. 하기 나름이라는 게 지금부터 어떻게 투쟁의 수순을 밟아 가느냐에 따라서 실질적으로 다음 바뀐 정권에서 서면으로 효력정지를 도모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판난다는 뜻입니다.”

폐기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정 최고위원께서 상정하는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어떤 것입니까.
“폐기 후 재협상이 목표죠. 우리가 FTA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올 연말이 되면 수출입 총액이 GDP의 110%에 달합니다. 무역의존도가 110%, 거의 개방도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이름이 잘못 됐습니다. 한·미 경제통합협정이에요. 내용은 경제통합협정인데 제목을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찬성하는 사람들은 자유무역협정인 줄 알고 찬성했는데 내용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신동호가 만난 사람]한·미FTA 무효화 투쟁 앞장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합니까.
“미국 대사(캐슬린 스티븐스 전 대사)가 그런 얘기 했죠. 한·미 FTA의 목적은 동맹국 한국의 미래세대까지 미국에 묶어놓으려는 것이라고요. 미국 무역대표부(USTR) 보고서도 한·미 FTA는 한·미 간 자유무역의 확대를 넘어서서 한국의 법과 제도와 관행을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어요. 지금 고치고 있잖아요.”

정 최고위원은 한·미 FTA 비준안 처리 때 함께 날치기된 14개 이행법안 가운데 우체국의 독점사업 범위를 축소한 우편법 등을 예로 들면서 설명했다.
“(국가 독점사업과 같은) 그런 걸 해체해서 미국 기업이 자유롭게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게 하고, 한국 기업도 미국에 가서 하라는 건데 재벌 대기업에는 기회가 생기겠죠. 미국 갈 비행기표 살 돈도 없는 한국의 구멍가게나 영세업자와는 무관한 얘기 아니겠습니까. 결국 한국은 한·미 FTA를 찬성하는 사람, 그것을 통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손해보는 사람으로 나뉘는 거죠.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은 오히려 한·미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어요. 이걸 못 보는 겁니다. 미국 조야에도 이 점을 경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사 미국과 재협상을 하게 되더라도 국제적 신뢰 손상이나 그로 인한 또다른 손해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거예요.(웃음) 호주의 예를 들면 투자자-국가소송(ISD)을 뺐잖아요. 빼달라고 한다고 금방 빼줍니까. 거기 노조, 교회, 법조계, 원주민 단체, 시민단체가 총합세해서 요구했잖아요. 핵심은 뭐냐면 자존심이에요. 어떻게 미국의 사인(개인투자자)에게 정부의 규제 권한에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수 있느냐, 호주는 사법체계가 발전된 나라다, 호주의 사법체계 안에서 충분히 외국인 투자자의 권익이 보호·보장된다며 일치단결했죠. 이건 국가의 자존심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특히 젊은 사람들은 못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거 무효화된다고 봅니다. 우리 국민이 옛날 국민이 아니잖아요.”

한·미 FTA가 정신적으로 무효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정신적으로 ‘쫄지 마라’는 것이죠. 날치기했지만 FTA는 된 거 아니냐는 게 아니라 아니다,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이 날치기됐지만 국민적 저항의 분출로 사실상 무효화, 무력화시켰거든요. 이건 더더구나 우리의 주권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마침 주권자의 권리 행사가 내년 4월 11일에 있으니까 정치적으로 폐기 투쟁하자, 즉 방법이 열려 있다는 거지요.”

정 최고위원의 정치적 지론은 ‘보편적 복지’와 ‘재벌 개혁’이다. 그에게 한·미 FTA는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두 가지 지향을 가로막는 악의 메커니즘이다. 그는 인터뷰 전날(11월 23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청춘콘서트 2.0 김여진의 액션토크’에 패널로 참여해서 한 얘기를 소개했다.

“젊은이들이 내일이라도 출구가 있다고 하면 덜 답답하겠는데 출구가 잘 안 보인다는 거거든요. 제가 모든 출구는 정치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내년 선거를 학자들이 정초(定礎) 선거라고 한단 말이에요.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87년 헌법이 만들어졌고 25년 동안 절차적 민주주의는 좀 확대돼 왔는데 그나마도 최악의 정권에 의해서… (화제를 돌려) 아니, 이 엄동설한에 물대포 쏘는 정권이 어딨어요? 그건 살인행위예요. 저도 한 번 맞아볼 생각입니다만…(웃음).”

그가 말하는 2013년 체제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헌법을 새롭게 바꾸는 것도, 초헌법적인 개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헌법 119조를 현실로 만들자는 얘기다.

“돈, 돈, 돈… 다른 말로 하면 GDP, 효율, 노동유연화, 구조조정,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이런 거였잖아요. 결국 따라갔더니 자살률 세계 최고, 저출산 또 세계 최고, 행복도는 세계 최저… 이건 아니잖아요. 바꿔야죠. 쉽게 풀어서 얘기하면 밥과 밥줄의 문제거든요. 밥은 복지이고 밥줄은 노동이에요. 밥줄이 있으면 밥은 해결되는 거니까 최고의 1차 복지는 노동이에요. 그 다음 노동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아동·노령, 이런 부분이 밥, 즉 복지죠. 어떻게 밥을 보충하고 밥줄을 튼튼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내년에 정권을 바꿔서 민주진보진영이 해야 할 과제가 돼야 한다고 봐요. 돈, 돈, 돈이 아니라 사람, 사람, 사람… 이게 국민적 요구 아닌가요?”

외부적 과제인 평화체제 문제 역시 밥과 밥줄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 정 최고위원의 주장이다. 뭔가 새로운 일자리와 수요를 창출하려면 새로운 기회가 우리에게 필요한데, 지난 60년 동안 우리에게 고통과 부담이었던 북한이 바로 그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확신을 갖고 있죠. 해보니까 되더라는 거죠. 개성공단도 9·19 핵 포기도 제가 해보니까 되더라는 겁니다. 김정일 위원장이든 미국의 네오콘이든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됐거든요. 사람의 상상력과 돌파력으로 다는 아니지만 어디까지는 갈 수 있다는 거죠. 정권을 바꿔서 그걸 좀 해보고 싶습니다.”

2007년 12월 이전과 이후의 ‘정치인 정동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성찰과 반성, 진보적 가치, 적극적인 행동 등이 그런 평가를 받는 요소인 것 같습니다. ‘쇼라도 좋다, 정동영처럼만 하라’는 얘기도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사실 맨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죠. 한때 대통령후보였고 바닥까지 추락해서 다시 시작하는 입장이라고 보는데 저한테 재산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죠. 패배한 사람이라는 것,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 다른 사람보다는 큰 실패, 큰 패배를 한 것이죠. 제가 정치를 계속한다면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의 각오 같은 것이죠. 올해 초에 환경노동위원회로 가서 현장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아, 진작 내가 바닥에서 함께 했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죠. 오죽했으면 제가 한진 문제에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겠습니까.”

정 최고위원은 ‘잘 나가던’ 옛날과는 분명 다르게 보였다. 말의 톤은 낮아졌지만 내용은 ‘담대하게’ 들렸다. 인터뷰 시작 때 창밖의 아이들 소리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기자는 불특정한 ‘소음’으로 들으려 했고, 그는 특정한 ‘소리’로 들으려 한 것 같다. 항상 국민의 ‘소리’에 귀를 열어놓아야 하는 정치적 본능의 발현으로 해석하고 싶다. 김진숙씨가 걸어서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하겠다는 그의 약속이 이루어졌듯이 한·미 FTA가 무효화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도 실현될 수 있을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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