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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쇄신파, ‘그래도 믿을 건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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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재·보궐선거 이후 여권에서 쇄신과 개혁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이 분출되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한나라당에서 쇄신 논의에 불을 댕긴 의원들은 서울지역 의원들이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인 박원순 후보에게 나경원 후보가 예상보다 큰 격차로 패하면서 당장 내년 총선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보선에서 박원순 시장은 박빙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7%포인트 차이로 나경원 후보를 이겼다. 박원순 시장과 나경원 전 의원의 득표율은 각각 53.4%, 46.2%였다.

한나라당 김성식·정태근·구상찬 의원(왼쪽부터) 등 쇄신파가 11월 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등을 요구하는 연판장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한나라당 김성식·정태근·구상찬 의원(왼쪽부터) 등 쇄신파가 11월 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등을 요구하는 연판장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정태근·김성식 의원 등은 지난 11월 3일 한나라당 내 초선의원 모임인 ‘민본21’과 ‘국회바로세우기 모임’을 잇따라 소집해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사과와 국정기조 전환 선언을 요구하는 쇄신안 실천에 두 모임이 행동을 같이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해 12월 예산안 강행처리 이후 만들어진 ‘국회바로세우기 모임’은 의원직을 걸고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한나라당 내 모임으로 소속 의원 21명이 회원이다. 하지만 이날 오전과 오후에 긴급 소집된 두 모임에서 쇄신안과 관련해 의원들 간에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모임의 이름으로 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한다는 데는 합의하지 못했다.

지지 높은 지방과 달리 서울지역 의원 ‘위기’
이렇게 되자 다음날 정태근·김성식·구상찬·김세연·신성범 의원은 ‘대통령님께 드리는 글’을 작성, 동료 의원들의 서명을 받았다. 주요 내용은 측근비리가 연이어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말한 것, 공정사회 구현을 외치면서 3년 반 동안 측근들의 낙하산 인사가 반복된 것, 서울시장 패배의 빌미가 된 내곡동 사저 문제 등과 관련해 이 대통령은 국민들의 가슴에 와닿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한 연판장에 서명한 의원은 이들 5인을 포함해 남경필·원희룡·정두언 의원 등 25명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쇄신파로 불리고 있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169명의 소속 의원 중 25명만이 연판장에 서명한 것은 5명의 의원이 주도한 쇄신작업이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쇄신파 측의 한 관계자는 “보궐선거 다음날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집회를 막았던 어청수 전 경찰청장을 경호처장으로 임명했을 때 쇄신 성명이 나왔어야 했는데 타이밍이 늦었다”며 “여기에 친박계 중진의원들이 참여하지 않아서 더욱 힘이 빠졌다”고 말했다.

또한 한나라당에서 전당적으로 쇄신파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던 것은 내년 총선과 관련해 의원들의 인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10·26 재·보선 결과에서 보듯이 서울과는 달리 지방에서는 한나라당이 월등히 앞섰기 때문에 지방출신 의원들의 경우 서울지역 의원들보다는 위기의식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한나라당은 재·보선에서 부산동구청장을 당선시키는 등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압승했다.

쇄신파 25인 중 핵심인 정두언·정태근·김성식 의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명박 대통령과 당 지도부에 총체적 변화를 압박하며 당직을 사퇴했다. 정두언 의원은 여의도연구소장직을, 정태근·김성식 의원은 당 정책위 부의장직을 사퇴했다. 이에 앞서 쇄신안에 서명을 하지 않은 권영진 의원은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직과 노원을 당협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당직사퇴, 진정성 의심 눈초리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11월 3일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최경환의원 출판기념회에 참석,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박민규 기자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11월 3일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최경환의원 출판기념회에 참석,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이들이 당직을 내던지면서까지 청와대에 반기를 든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김성식 의원의 지역구인 관악갑의 경우 박원순 대 나경원의 득표율이 63.8% 대 35.5%였다. 거의 더블 스코어다. 김성식 의원은 18대 국회 내내 성실한 의정활동으로 국정감사 우수의원상을 수상하는 등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다시피했지만, 기존 정치인 불신이라는 바람에는 당해낼 장사가 없었던 것. 비교적 탄탄했던 정두언 의원 지역구(서대문을)도 마찬가지였다. 서대문을에서 박원순 후보가 57.1%의 득표를 한 반면에 나경원 후보는 42.0%에 그쳤다. 정태근·권영진 의원의 지역구인 성북갑과 노원을도 11%포인트 이상 박원순 후보에게 졌다.

하지만 이들의 당직 사퇴가 ‘쇼’에 지나지 않는다며 평가절하하는 측도 있다. 이들이 당직과 지역위원장직을 사퇴했지만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는 한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후원회 사무실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실도 계속 유지할 수 있고, 국회의원으로서 의정보고회 등 주민 접촉도 제약이 없다. 특히 임기를 5개월여 앞두고 당직과 당협위원장직을 사퇴는 것 자체가 큰 의미는 없다.

더구나 이들은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와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있다. 비록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믿을 구석은 그밖에 없기 때문이다. 쇄신파들은 내년 4월 총선에서도 자기 지역구에 박 전 대표가 와서 지원유세를 한 번이라도 더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쇄신파와 박근혜 전 대표는 이심전심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박 전 대표가 정국의 이슈와 관련해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면 쇄신파가 거기에 부응하는 상황이 자주 나오고 있다. ‘박근혜식 가이드라인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11월 8일 쇄신파 일부가 주장한 ‘공천 물갈이론’에 대해 “순서가 잘못됐다”며 “많은 정책이 나오지만 국민은 계속 힘들어하는 만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쇄신파 의원들은 그 다음날 “공천 물갈이보다는 정책이 우선”이라며 박 전 대표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이같은 기류는 11월 9일 개최된 한나라당 ‘쇄신 의원총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두언 의원은 “교육과 세금, 주택문제 등 정책쇄신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최근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여의도연구소가 내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새로운 인물을 대거 영입하고 고령 의원들의 자진 출마포기 등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내부 전략 문건을 마련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대목이다.

요즘 한나라당의 모습을 보면 의원들이 자기 주장을 펴다가도 박근혜 전 대표의 발언이 나오면 박 전 대표를 따르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이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쇄신파도 예외가 아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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