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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의 대법관 시절 판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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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랜드 CB 헐값 매각 무죄”

시위·노동 문제 엄격, 기업·사학 문제 유연

양승태 대법원장은 2005년 2월 대법관에 취임한 이후 81번 참여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대부분 다수 의견을 냈다. 시위·노동문제에 엄격하고 기업·사학문제에는 비교적 유연한 판결을 보였다.

2009년 11월 용산참사 관계자들이 용산구청 앞에서 확성기 시위를 한 데 대해 “음향으로 청각기관을 자극해 고통을 줬다면 폭행으로 볼 수 있다”며 무죄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2009년 12월엔 집회 도중 발생한 폭행사건에 대해 주최측인 민주노총의 배상책임 비율을 60%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전액 배상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9월 6일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9월 6일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면 양 원장은 사학비리로 퇴진한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이 제기한 이사회결의 무효확인소송의 2007년 5월 판결에서 김 전 이사장의 손을 들어준 다수 의견에 동참했다. 관선 임시 이사가 정식 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라는 뜻에서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자질 논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일찌감치 지난 7월 발표한 성명서에서 “새 대법원장은 청렴·공정하고 정의관념이 투철해야 하며, 풍부한 법률지식과 행정능력을 갖춰야 한다”며 양 원장 등을 대법원장 후보로 추천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윤남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청문회장에서 양 원장이 “너무 완벽한 게 흠이면 흠이다”라고 말했다.

“확성기 시위 무죄” 원심 파기환송
반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는 8월 19일 성명을 통해 “양승태 전 대법관이야말로 역대 최악의 대법원장 후보”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한 바 있다. 윤 교수와 함께 국회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임지봉 서강대 교수 역시 양 원장에 대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측면에 굉장히 우려를 표한다”고 말했다.

특히 임 교수가 문제를 삼은 판결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은 회사 채권) 헐값 매각 사건 판결이다.

9월 6일 인사청문회에서 양 원장은 “사건의 쟁점은 전환사채 발행업무를 처리한 이사가 회사에 대해 배임행위를 했느냐 안 했느냐지, 편법 경영권 승계가 죄가 되느냐가 아니었다”며 “이 사건에서는 단지 그 이사들의 임무 위배가 있었느냐가 쟁점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제가 판단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임 교수는 다음날 인사청문회에서 “재벌에 대해 배임죄 적용을 굉장히 좁게 했다”고 말했다.

삼성 에버랜드 CB 헐값 매각 사건은 1996년 10월 에버랜드가 주당 최저 8만5000원으로 평가받던 CB 125만여 주를 주당 7700원으로 발행한 뒤 주주들이 CB의 97%를 인수하지 않자, 이재용 현 삼성전자 사장 등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자녀 4명이 이를 사들인 일이다. 지난 2000년 곽노현 현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법학교수 43인이 검찰에 이 회장을 배임 혐의로 고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이 회장 대신 당시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이었던 허태학·박노빈씨만을 기소했다. 한편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로 이듬해 출범한 삼성특검은 이 회장을 기소해 재판정에 세웠다.

2009년 5월 29일 대법원 선고에서 주된 쟁점은 CB 발행이 주주 배정 방식이었느냐 제3자 배정 방식이었느냐였다. 당시 대법원 다수 의견은 CB 발행이 주주 배정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봤다. 다수 의견은 에버랜드 주주들이 인수권을 행사하지 않은 데 따른 손해는 주주들의 손해일 뿐 회사의 손해가 아니라고 보고 무죄로 결론지었다.

소수 의견은 에버랜드 CB 발행이 실질적으로 제3자 배정이었고,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CB를 발행한 것은 회사에 손해를 끼쳐 배임 혐의가 적용된다고 봤다.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양승태 현 대법원장. / 강윤중 기자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양승태 현 대법원장. / 강윤중 기자

양측의 의견이 5대 5 동수인 상황에서 양승태 당시 대법관이 다수 의견과 이유는 다르지만 같은 결론을 내림에 따라 에버랜드 CB 헐값 매각 사건은 무죄로 결론났다. 양 원장은 이사들이 회사가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형성하면 될 뿐 가능한 한 많은 자금을 형성할 의무가 없으므로, 형식과 무관하게 이사들의 배임 혐의는 없다고 봤다.

민변이 삼성 에버랜드 CB 발행 사건과 더불어 양 원장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1975~76년 양 원장이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내린 긴급조치 9호 관련 판결이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하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양 원장은 당시 긴급조치 관련 사건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 사건 모두 유죄 판결
긴급조치 9호는 유신독재 시절인 1975년 5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동한 특별조치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는 대표적인 악법이었다. 심지어 긴급조치에 대한 비판도 금지 대상이었다.

지난 9월 23일 서울고등법원은 긴급조치 9호를 위헌 판결한 첫 사례를 남겼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배석판사로 판결을 내렸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긴급조치 9호는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한 현행 헌법에 비춰볼 때 위헌이므로, 긴급조치 위반 혐의도 무죄”라고 판시한 것이다.

양 원장이 유신 시절 판결을 내린 대표적인 사건은 ‘7인 기획위원회’ 사건이다. 1975년 12월 양 원장을 비롯한 재판관 3명은 심지연(현 국회 입법조사처장),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 조성우(현 민족화해협의회 공동의장) 등 20명에게 징역 1년 6월~10년 형을 선고했다.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 정권 퇴진운동을 준비했다는 혐의였다.

‘막걸리 긴급조치’ 판결도 있었다. 1975년 11월 29일 양 원장 등 재판부는 열차 플랫폼에서 술기운에 큰소리로 “박 대통령이 군인을 했으면 얼마나 했느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한 노동자를 징역 1년 6월형에 처했다.

2006년 당시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었던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당시 일반인들은 긴급조치 판결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 원장이 배석 판사였기 때문에 주요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당시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긴급조치가 실정법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독재정권 부역자들의 논리”라고 말했다.

반면 강희철 대한변협 부회장은 변협 입장이 아닌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당시 긴급조치가 위헌인지 여부가 외견상으로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정법을 적용한 것 자체를 가지고 문제를 삼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밝혔다.

한편 양 원장은 여성·인권 쟁점에서 전향적인 판결을 낸 바도 있다. 2005년 7월에는 출가한 여성들의 종중원 자격에 관한 판결에서 “성별만에 의해 원천적으로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가는 우리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여성도 종중원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2006년 6월에는 “종래에는 사람의 성을 생물학적 요소로 결정해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생물학적 요소뿐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요소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을 인정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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