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농업의 미래 ‘협동조합’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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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강국 네덜란드·덴마크·프랑스 모델… 기계화·전문화 등으로 가격·생산성 ‘만족’

지난해 9월 27일. 배추 한 포기 소매가격이 1만5000원까지 치솟았다. 이른바 ‘배추파동’의 원인 중 하나로 농협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농협의 주업무는 조합원들을 위해 농산물을 판매하고 유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이 되는 금융 및 수익사업에 치중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지난 8월 30일 네덜란드 알스미어 화훼 경매장 내 경매룸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8월 30일 네덜란드 알스미어 화훼 경매장 내 경매룸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 3월 2일은 농협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농산물 판매·유통 등의 역할을 하는 경제부문과 금융부문이 각자 지주회사로 분리된다. 농협법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 무려 17년 전이니, 실로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농협이 그리는 미래는 어떤 것이 돼야 하는가. 협동조합 강국인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를 찾았다. 이들 3개국은 농업 강국일 뿐만 아니라 이미 십수년 이상 협동조합체제가 정착한 곳이다.

규모화·전문화로 세계적 유통회사가 된 
네덜란드 그리너리(Greenery)
지난 8월 29일(현지시간) 오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진 블라이스바이크(Bleiswijk)에 위치한 네덜란드 그리너리 협동조합의 청과물류센터를 방문했다. 면적이 2만5000㎡로 거대한 공장을 방불케 했다. 센터 한편에는 지역 조합원들이 출하한 파프리카가 박스째 실려 들어왔다. 

품질검사를 마친 파프리카는 지게차에 실려 컨베이어 벨트로 옮겨졌다. 빨강, 파랑, 노랑색 순서로 나란히 배열된 파프리카는 기계손이 집어 500g씩 소포장됐다. 소포장된 파프리카는 그리너리와 계약을 맺은 알버트하인(Alberthein) 등 유통업체의 마크가 찍힌 박스에 담겼다. 공장 앞에는 트럭 십수대가 일렬로 대기해 곧바로 배송을 준비했다. 입고에서 배송까지 전 과정이 센터 안에서 이뤄졌다. 이 파프리카는 다음날 아침이면 이미 소비자의 장바구니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너리는 채소·과일·버섯을 취급하는 네덜란드의 가장 큰 협동조합이다. 애드 클라센 네덜란드 생산자협회(DPA) 사무국장은 “그리너리 채소들은 국내 대형슈퍼나 세계 60여개국으로 수출된다”며 “조합원들이 출하만 하면 유통업체가 원하는대로 품질, 포장, 배송 등 전 과정을 그리너리에서 책임진다”고 말했다.

덴마크 축산협동조합 대니시크라운에서 돼지들이 도축 후 부위별로 포장되고 있다.

덴마크 축산협동조합 대니시크라운에서 돼지들이 도축 후 부위별로 포장되고 있다.

네덜란드 채소 유통이 처음부터 이 같은 체계를 갖췄던 것은 아니다. 농민들은 1903년부터 중간상인들의 폭리에 맞서 경매협동조합을 설립해 운영했다. 1980년 이후 경매제도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클라센 이사는 “생산량에 따라 가격이 들쭉날쭉해지고 유통단계가 복잡해 가격이 높았다. 시장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개별 농가들이 대응할 수가 없어 변동성은 더 커졌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찾은 해법은 ‘뭉치는’ 것이었다. 1996년 네덜란드 경매농협 중 9개가 합병해 그리너리가 탄생했다. 초반에는 판매나 유통을 해본 적이 없어 우왕좌왕했다. 다음 해법은 ‘전문화’였다. ‘그리너리BV’라는 유한회사를 설립해 판매사업을 전담토록 했다. 이후 유통·물류·배송·수출입 전문회사 등을 인수했다. 클라센 이사는 “유통단계가 기존 5~8단계에서 2~3단계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꽃’ 역시 화훼 협동조합을 통해 출하, 거래되고 있었다.

8월 30일 암스테르담 남서쪽 알스미어(Aalsmeer)에 위치한 화훼 경매장을 찾았다. 이곳은 네덜란드 최대 화훼 협동조합 ‘플로라 홀랜드(Flora-Holland)’가 소유한 6개 경매장 중 여의도의 절반에 육박(128만7000㎡)하는 가장 큰 곳이다. 경매장 안에는 각종 꽃을 실은 트롤리(trolley)가 줄을 지어 움직였다. 저온저장고에서 하룻밤을 보낸 꽃들은 새벽부터 품질검사를 거쳐 오전 6시부터 경매에 부쳐진다.

오전 10시쯤. 5개의 경매방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이어들은 헤드폰을 쓰고 전산시스템을 통해 경매에 참여했다. 대형 스크린에는 경매시계가 매물 사진·정보 등과 함께 비춰졌다. 가격이 간략히 표시된 경매시계가 한 바퀴 돌아가는 동안 원하는 가격에 분침이 깜박일 때 버튼을 누르면 낙찰된다. 

독특한 점은 최저가부터 시작하는 경매가 아니라 최고가부터 최저가로 떨어지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매장 안내인은 “이 시스템 덕에 매물당 경매가 0.2초에서 2초 정도면 끝나고 가격 급등락도 없다”고 말했다. 경매가 끝난 즉시 해당 트롤리는 자동으로 포장지역에 있는 구매 바이어 쪽으로 운송된다. 꽃은 수확부터 24시간이면 소비자의 품에 안긴다.

‘첨단’ 더한 덴마크
‘대니시 크라운(Danish Crown)’
대니시 크라운은 덴마크 축산농가의 80%가 조합원인 협동조합이다. 대니시 크라운의 도축장은 코펜하겐 서쪽으로 270㎞ 떨어진 호센스(Horsens)에 위치해 있다. 전체 부지가 12만9000㎡, 도축장만 8만4000㎡에 이르는 거대 공장으로, 조합원들의 출자금 등을 통해 2005년 완공됐다.

프랑스 브레타뉴 사과조합 소속 사과농장 ‘라 포스’의 주인 구엘로.

프랑스 브레타뉴 사과조합 소속 사과농장 ‘라 포스’의 주인 구엘로.

일주일에 돼지 10만마리를 도축하지만 공장 내에는 역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위생관리와 첨단기술은 호센스 공장의 핵심이다. 도축 전 과정은 대부분 기계화돼 있기 때문에 사람이 관여하는 과정이 드물다. RFID(무선인식) 기술을 이용해 컴퓨터가 각 돼지의 크기별, 성분 함량별 측정을 한 후 삼겹살, 목살, 등심 등 자동으로 분리해 포장까지 마무리한다.

위생관리는 특히 철저하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직원들은 구내식당에서 모두 머리에 위생모자, 위생복을 착용한 채로 식사를 했다. 주위 환경에 피해가 가지 않게 굴뚝은 45m 높이로 만들었다. 칼 뮬러 전략담당 이사는 “밤마다 직원 200여명을 투입해 도축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청소하고, 항생제를 쓰면 약에 듣지 않는 내성균이 생기므로 쓰지 않는다”면서 “차량 소독을 철저히 하고 까다롭게 진행하기 때문에 살모넬라 병이 발생한 적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20년 전 구제역을 겪었던 덴마크는 방역 역시 철저했다. “입국한 지 72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농가 방문은 할 수 없습니다.” 덴마크에 입국해 추가로 방문을 시도했던 돼지농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호센스 공장도 견학은 허용했지만 입국 48시간이 지나지 않아 직접 도축장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농민이 만족하는 협동조합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텔리에르 르 플래시에서 ‘라 포스’ 사과농장을 운영하는 구엘로(43)는 브레타뉴 사과조합에 소속돼 있다. 전체 150헥타르에 이르는 농장을 가족 3명이 운영하지만 무리가 없다. 그는 “수확기에는 퀴마(cuma·영농기계조합)에서 인력과 기계를 빌려주고 기술자가 있어서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생산량의 80%를 출하해야 하는 등 조합 규정이 엄격하지만 구매자가 대형화되고 있기 때문에 조합 차원이 아니면 마케팅 가격 협상 등이 불가능하다”며 “조합이 출하를 책임져주고 조합 마크를 상품에 달 수 있어 신뢰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은 기술 연구와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생산성 향상에도 힘쓰고 있다. 대니시 크라운에는 식육산업연구소가 있다. 고기 생산·관리·도축 등을 연구한다. 칼 뮬러 전략담당 이사는 “연구소에서는 연구뿐 아니라 조합원들을 직접 교육하고 있어 우리 고기는 질이 다르다”며 “글로벌 경쟁이 심화하고 있자만 연구소가 있는 한 경쟁력에 자신 있다”고 말했다. 플로라 홀랜드 역시 직원 4600명 중 1000명이 연구원일 정도로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 신품종, 신 농자재 등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하며 농가와 조합은 상생하고 있었다.

우리 실정에 맞는 협동조합 구조는?

한국과 유럽의 협동조합은 뿌리부터 다르다. 유럽은 농민들의 필요에 의해 아래서부터 뭉쳤다. 한국은 대표적으로 농협의 경우, 1961년 정부 주도로 설립돼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경영하는 종합농협으로 운영되고 있다. 규모화·전문화로 덩치를 키운 유럽에 비해 한국에는 8개 부문에 6000개의 협동조합이 있으며, 2000만명의 조합원이 가입해 있다. 농업 현실 또한 차이가 크다. 한국의 농가당 평균 경지면적은 1.5헥타르다. 반면 덴마크는 53.6헥타르, 프랑스는 48.6헥타르에 이른다. 농민 연령 역시 30~50대가 주류인 유럽에 비해 한국은 60대 이상 고령이다.

유럽 협동조합의 현실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물론 무리다. 우리 실정에 맞춘 모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농협경제연구소 유춘권 박사는 “지역 농협의 규모를 키우고 생산단가를 내리는 방식으로 경영 효율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과감한 투자를 통해 조합이 그리너리처럼 생산부터 유통·배송까지 책임지고, 조합원들의 참여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협이 신·경분리를 통해 추구하는 바도 같은 지점이다. 그러나 농업계에서는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 돈이 안 되는 농업부문이 오히려 금융에 밀려나거나 중앙회의 독점 하에 지역조합이 밀려나갈 것이라는 우려 등이다.

규모나 역할 면에서 거대 기업에 버금가는 유럽 협동조합들의 지배구조에서 해법을 찾아볼 수 있다. 농민→지역조합→중앙조합에 이르는 튼튼한 상향식 지배구조는 의사결정 구조가 위에서 군림하는 한국 협동조합과 대비된다. 

그리너리는 협동조합(UA)이 100% 출자해서 판매·유통 등을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를 지배하는 구조이며, 조합원 대표가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 협동조합 은행 크레디트 아그리콜, 네덜란드 라보뱅크는 대표적인 협동조합 은행이다. 

두 은행 모두 농업금융 비중은 현재 10%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농업과 협동조합에 대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라보뱅크 반덴 보시 운영부장은 “우리의 시크릿(비밀)은 ‘의사결정’에 있다”며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한) 자산 유동화를 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전체 회의에서 모두를 이해시킬 만한 설명을 하기 힘들었고, 결국 유동화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라보뱅크의 900만 고객, 180만 조합원, 141개 지역은행은 의사결정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 1년에 네 번 열리는 중앙 대표회의, 1년에 한 번 열리는 제너럴 미팅 등을 통해서다. 크레디트 아그리콜은 협동조합 출신이 은행장이 되고, 다른 분야에서 번 돈을 농업분야에 재투자하고 있다.

한국 농협도 지배구조를 함께 바꿔야 한다는 것이 농민단체들의 입장이다.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의 장경호 부소장은 “신·경분리 이후에도 이대로는 조합원들의 의사가 직접 반영되는 장치가 없으면 의사결정은 농민에게서 더 멀어지게 된다”며 “경제지주에 자회사를 두더라도 품목·분야별로 농민조합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l 글·사진 김다슬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amorfat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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