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시민운동 출신 정치인 성공할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개혁’ 외치며 기존정당 들어갔지만 제 목소리 못내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일본의 간 나오토 전 총리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시민운동가 출신이라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1980년대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에서 풀뿌리 사회운동을 했다. 사우스사이드는 흑인빈민촌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그곳에서 지역 주민들의 주거 및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일했다. 훗날 그는 이때의 경험이 정치력과 소통능력을 키워줬다고 회고했다.

9월 9일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 종로구 가회동 아름다운재단 사무실을 방문해 이사직 사임서를 쓰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9월 9일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 종로구 가회동 아름다운재단 사무실을 방문해 이사직 사임서를 쓰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사회시민연합 출신으로 일본 시민운동계와 정치권에서 정책통으로 불렸다. 그는 총리 취임 당시 비자민련·비세습의 시민운동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최소 불행사회’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는데, 시민운동가 출신답게 사회복지와 사회적 약자 배려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시민운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박원순 변호사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다. 국내에서도 시민운동가가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박원순 변호사 이전에도 정치이력의 출발을 시민운동에서 찾는 정치인이 많았다. 한명숙 전 총리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과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여권의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박병옥 청와대 서민경제비서관도 경실련 출신이다. 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한국여성민우회에서 활동했다. 이밖에도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 출신의 ‘386세대’ 시민운동가들이 문민정부 시절부터 대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당시 시민운동가들의 정계 진출은 ‘새로운 피’, ‘젊은 피’의 수혈로 주목받았다. 기존의 정치를 젊고 새롭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당시 시민단체 지도급 인사들이 정치권으로 편입되면서 금융실명제와 같은 시민단체의 주장도 정치권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됐다. 여성단체 시민운동가의 정계 진출로 여성의 참정권도 신장됐다. 여성단체 출신 여성 의원과 장관이 적극적인 자세로 여성계 이슈를 정책에 반영하면서 호주제 폐지나 성매매특별법의 성과를 낳았다.

문민정부 시절부터 대거 정계 진입
반면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일관성의 문제다. 시민운동 활동 당시의 가치들을 정치권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정계 진출 이전과 이후로 이들의 주장이 달라지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시민단체를 ‘정계 진출의 관문’으로 여긴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정치권에 진출한 시민운동가들은 정치권에 ‘적응’하거나 ‘부적응’했다. 적응과 부적응은 이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정태석 전북대 교수는 “시민사회를 대변한다고 들어갔지만 개혁진보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존의 정치 시스템으로 흡수되거나 아니면 정치권에서 도로 뛰쳐나온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시민운동가들 중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로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맞지 않는 곳으로 들어갔던 경우가 있었다”며 “그러나 그런 사례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정치권을 나오거나 아니면 자신의 과거를 접고 기존 정치권으로 흡수되었다”고 말했다.

정상호 서원대 교수는 “다양한 시민운동가들이 정치권에 진출했지만 주로 통일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이념문제에서만 목소리를 냈지 실업, 양극화 등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이들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에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당시 정부 각 부처의 자문위원회에 시민단체 추천위원을 20% 이상 포함시키는 제도가 마련되고, 많은 시민운동가 출신들이 정부 각료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때 오히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양극화가 심화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흐름이 강화됐다.

박원순 변호사의 정치권 진출에 대해서도 기존의 한계를 되밟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기존의 흐름과는 다르게 분석했다. 박 변호사의 출마 배경에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성장이 있다는 것이다.

정상호 교수는 “그동안 시민운동이 정치와 연계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 데에는 명망 있는 시민운동가가 기존 정당에 편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인이 기존 정당 체제에 들어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박원순 변호사의 출마는 이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시민단체연대기구를 만들고 일정한 정책 풀을 마련했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며 “이러한 흐름은 명망가가 개별 정당에 들어갔던 기존의 방식을 한 단계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변호사의 출마가 개인적인 선택에 그쳐 기존의 방식만 답습한다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것”이라며 “한국 시민운동 20년이 걸어왔던 결과나 정책들이 선거운동 과정과 방식에서부터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양극화시대 독자적 기반구축 실패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도 박원순 변호사의 출마를 ‘개인의 결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이번 선거는 박 변호사 개인 차원의 정치권 진출로 보기보다는 시민사회 내부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박 변호사가 자신과 연계되어 있는 시민사회 역량을 어떻게 가지고 가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가 정치적으로 성장한 만큼 시민운동에 비정치성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모호한 중립성보다는 정책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민운동가와 정치인의 활동영역과 활동양식은 비슷하다. 사회문제에 개입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추구해 나간다는 점도 동일하다. 정태석 교수는 “시민운동가들은 시민운동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을 접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경험을 한다”며 “풍부한 활동가의 경험을 토대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시민운동이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정치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특정 개인의 정치권 진출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상호 교수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정책협약을 예로 들었다. 시민단체가 기존 정당과 정책협약을 맺고 정책 채택을 조건으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방식이다. 정 교수는 “미국의 경우 여성단체나 노조가 민주당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영국의 경우 인권단체나 여성단체, 반전단체 등이 노동당과 정책협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민운동이 무소속, 탈정치, 탈이념 기조를 벗어나 정치에 대한 개방적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송이 기자 psy@khan.co.kr>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