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모습 화폭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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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한 벽, 해묵은 기와집. 담벼락 샛길로 여인이 걸어간다. 얼굴 보이지 않으려고 머리에 처네(주로 서민 여자가 나들이를 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를 썼다. 옥색 치마가 겅둥해(입은 옷이 아랫도리나 속옷이 드러날 정도로 매우 짧아) 속바지가 나왔다. 분홍신은 어여쁘고, 작달막한 키 펑퍼짐한 엉덩이는 수더분하다. 요즘 여자의 몸매와 달리 나부죽한(작은 것이 좀 넓고 평평한데), 천생 조선 아낙이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br>손철주 지음·현암사 펴냄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손철주 지음·현암사 펴냄

을축년(1805년) 초가을에 혜원(신윤복)이 그렸다. 도장에 새긴 글씨는 ‘입부(笠父)’. 신윤복의 자(字)가 입부이니 ‘삿갓 쓴 사내’가 ‘처네 쓴 여인’을 그린 셈이다. 그린 이도 그려진 이도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이 또한 공교롭다. 그림이래도 여인의 앞모습은 궁금하다.

청나라 시인 진초남(陳楚南)이 못내 호기심을 품었다. “등 돌린 미인 난간에 기대네/ 섭섭해라, 꽃다운 얼굴 안 보여/ 불러봐도 돌아서지 않으니/ 어리석게도 그림 뒤집어서 본다네”(뒷모습 미인도에 부쳐(題背面美人圖)). 손철주의 새 책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의 한 장면이다.

다른 옛 그림을 통해 또 다른 옛 생각에 빠져보자. 18세기 화원 장득만이 그린 ‘아이에게 묻다’는 채색이 곱고 구도가 단정하다. 정조가 즐겨 본 화첩 속에 있는 그림이다. 그림은 당나라 가도(賈島)의 시를 그대로 옮겼다. “松下問童子(소나무 아래서 아이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스승은 약초 캐러 갔다 하네)/ 只在此山中(산 속에 들어가긴 했지만)/ 雲深不知處(구름 깊어 있는 곳을 모르네).”

또 다른 궁금증이다. 시인 시견오(?肩吾)는 기어이 산에 들어갔던가. “길 끊긴 숲이라 물을 곳이 없고/ 그윽한 산은 이름 마저 몰라라/ 솔 앞에 나막신 한 짝 주워들고서야/ 비로소 알았네, 그 분이 이 길로 가신 것을”(은자에게(寄隱者)).

<그림, 문학에 취하다><br>고연희 지음·현암사 펴념

<그림, 문학에 취하다>
고연희 지음·현암사 펴념

옛 그림이 제대로 후생(後生)을 만났다. 한시와 꽃, 그림과 붓글씨, 한 잔 (실상은 여러 잔) 술이 있으면 썩 잘 노는 사람, 손철주다. 흐린 날 인사동 어느 막다른 골목 술집에 가보라. 칠판에 초서로 한시를 적어가며 흘러간 옛 사랑을 강(講)하는 저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랜 옛날로 돌아가자.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수의 다리 위에서 한가히 거닐고 있었다.

“피라미가 나와 조용히 놀고 있군.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야.(장자)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혜자)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장자)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래 자네를 몰라. 자네도 본래 물고기가 아니라서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틀림없는 일이야.(혜자) 부디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나에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물은 게야. 나는 그것을 이 물가에서 알았다네.(장자)”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박제가는 ‘물고기의 즐거움(魚樂圖)’을 그리고는 그림 위에 짧은 글을 얹었다. “知之而問我我知之濠上也”(그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물었지, 나는 그것을 물가에서 알았다네).

이렇듯 “옛 그림들 중에는 문학작품을 주제로 ‘취(取)’한 것이 아주 많다. 문장 속에 묘사된 내용을 시각 이미지로 곧장 옮겨 그린 그림이 있고, 시에 읊은 추상 정취를 화폭에 담아낸 그림이 있다. 혹은 글 속에서 만난 문인이나 성인이 마치 글 속의 문학적 행위를 진행하는 양, 그 모습을 화폭에 살려낸 그림도 있다.” 그리하여 옛 그림들 속에는 알게 모르게 다양하게 문학적 의취(意趣)가 깃들게 된다. “옛 그림이 문학에 ‘취(醉)’한 듯 보이는 이유이다.”

고연희의 <그림, 문학에 취하다>에 빠져보라. 취(取)하고 나니 비로소 취(醉)한다. 박제가가 어느 글에 썼다. “물맛이 어떤가 물으면 사람들은 아무 맛이 없다고 한다. 그대는 목마르지 않다. 그러니 물맛을 무슨 수로 알랴.” 무릇 간절해야 안다.

물고기의 즐거움뿐이랴. 간절하면 물 속 물고기의 목마름도 알게 된다. 옛 그림의 맛 또한 그러할 것이다.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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