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삼성 백혈병 재조사 ‘친기업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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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장 환경과 발병 무관하다”… 전문가들 신뢰성 의문 제기

“반도체 사업장의 근무환경과 백혈병 발생은 무관하다.”
삼성전자는 7월 14일 경기 용인 기흥공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와 같은 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날,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고 황유미씨, 고 이숙영씨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한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7월 14일은 근로복지공단의 항소 만기일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7월 5일 서울 영등포구의 근로복지공단 로비에서 이사장과의 면담을 거절당하자 항의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7월 5일 서울 영등포구의 근로복지공단 로비에서 이사장과의 면담을 거절당하자 항의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삼성전자는 반도체 생산라인 근무환경에 대한 재조사 결과, 6명의 백혈병 발병자와 반도체 생산라인 근무환경은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된 조사 결과는 지난 6월 24일 서울행정법원이 반도체공장의 근무환경과 백혈병 유발 간의 상관관계를 일부 인정한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재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원장은 “조사 결과만 발표했을 뿐 근거가 되는 자료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아 결론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조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항소심에 대비해 결과 발표를 앞당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연구보고서는 보안사항 등을 제외하고 공개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재조사 연구를 시작한 게 작년 7월이고 그때 이미 약 1년간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었다”며 재조사와 항소심은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산재 피해자 근무지와 다른 라인 조사
삼성전자가 조사를 의뢰한 미국 환경보건 컨설팅회사인 인바이론사는 크게 두 가지 조사를 실시했다. 현재의 작업환경을 조사하는 한편 과거의 작업환경을 재구성해 추정하는 조사였다. 백도명 원장은 “엄밀히 말해 두 가지 모두 많은 점에서 부족한 조사였다고 생각한다”며 “인바이론은 과거의 작업환경을 추정하는 과정에서 3라인이 아니라 5라인을 조사했다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행정소송 때 산재 인정을 받은 피해자가 근무했던 곳은 5라인이 아니라 3라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 원장은 “지금은 없어진 공정과정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과거의 공정을 제대로 추정하기 위해서는 엄밀한 가정이나 근거가 있어야 될 텐데 인바이론사의 재조사는 이러한 부분이 별로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의 유해물질 노출을 확인하는 조사도 불충분했다. 백 원장은 “인바이론사의 조사에는 평상시 공정과정만 반영되어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정라인을 처음 설비하고, 기계를 세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게 된다. 노출을 적게 하기 위해 2~3개월 정도는 최적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백 원장은 “이러한 과정에서 평상시 조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노출량 증가가 있을 수 있다”며 “초기 최적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조사과정에 반영해야 하는데, 인바이론의 조사는 이러한 전체 스펙트럼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인바이론에 대한 신뢰도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산업의학 전문의인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은 “인바이론사는 환경오염이나 산업재해와 관련해 기업을 변호하는 활동을 해오던 것으로 유명한 회사”라고 말했다. 백도명 원장 또한 “인바이론은 소송에서 기업에 유리한 자료를 찾아주는 컨설팅 회사”라고 말했다.

APG, “인바이론은 삼성에 고용된 연구진”

[사회]삼성 백혈병 재조사 ‘친기업 보고서’

백혈병 피해자 모임인 ‘반올림’ 측은 인바이론이 독립적·객관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올림 측은 “이번 재조사를 담당한 연구진의 독립성과 타당성은 APG 등 해외 투자기관들이 이미 공개적으로 제기한 문제”라고 말했다. APG의 뉴스레터는 “삼성이 독립적인 제3자 조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상 독립적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며 “연구진은 삼성에 고용되었고 삼성에서 보수를 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또한 인바이론이 친기업적인 컨설팅을 주로 해왔다는 사례들을 제시했다. 반올림 측은 인바이론이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를 위해 간접흡연과 폐암의 연관성을 부정했으며,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건강문제와 고엽제의 무관함을 주장하며,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그리 위험하지 않은 고엽제의 건강 영향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말해 왔다”고 밝혔다. 또한 인바이론이 “비닐 클로라이드와 연관된 뇌암 연구에서 수십명의 암환자를 누락시킴으로써 연구 결과를 왜곡했으며, 포름알데히드의 발암성에 대한 미국 환경보호청의 공청회에서 제조사를 위하여 이 물질의 발암성을 축소해 주장했다”고 말했다. 인바이론의 사례는 데이비드 마이클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환경·산업보건학 교수의 책 <청부 과학>에도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은 돈을 받고 기업과 제품을 방어하기 위해 “연구보고서를 왜곡”하고 “과학적 불확실성을 제조·과장”하는 ‘청부 과학’의 사례들을 수록한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산업보건 분야에서 정평이 있는 회사들을 찾다가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회사이기도 해서 선택했다”며 “만약 인바이론사가 특정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면 그런 명성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사전에 검토했지만 과거 인바이론사는 단 한 번도 기업 이익을 위해 연구를 진행한 적이 없고 모든 연구가 객관적·독립적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항소심에서도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하게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1심에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김은경, 송창호, 고 황민웅씨는 7월 13일 고등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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