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통해 본 시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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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산악도시 우르비노(Urbino), 마르케 국립미술관에는 르네상스시대 ‘회화의 군주’로 불리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채찍질’이 전시되어 있다. 베른트 뢰크 교수의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에서 ‘채찍질’은 단순한 회화 작품이 아니라, 살인사건을 고발하는 살인기소장이다. 피고인은 다름 아닌 우르비노의 새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역사학의 ‘도상학적 전환’(iconic turn)이다.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br />베른트 뢰크 지음·최용찬 옮김·창비 펴냄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
베른트 뢰크 지음·최용찬 옮김·창비 펴냄

1444년 7월 22일 밤, 아직도 후텁지근한 여름 열기가 남아있는 우르비노. 무장한 몇몇 사내들, 아마도 십여명쯤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사내들이 1년 전 우르비노의 지배권을 상속받은 오단토니오 공작의 궁전에 침입했다. 그들은 방으로 통하는 문을 각목으로 부쉈다. 고문관 두 사람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다음 차례는 공작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깬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 숨으려 했으나 침입자들은 그를 찾아냈다. 그는 대형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고 흐느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살인자에게 동정심이란 없다. 단검이 두 차례 공작의 몸을 꿰뚫고 도끼로 머리를 내리치자 그는 즉사했다. 시신들은 궁전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고, 골목길에서 광장으로 질질 끌려다니며 모욕당했다. 누군가는 시체의 사지를 찢어발겨 오단토니오에게 이를 갈던 군중들에게 내주었다. 이복동생에 의한 ‘형제살인’이었다. 권력투쟁을 놓고 벌어진 살인사건을 축으로 역사와 그림이 탄탄하게 조직됐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견줄 만한 흥미로운 추리다. 역자 최용찬은 이를 두고 ‘도상의 문화사’라 불렀다.

100년도 더 전에 영국의 한 법제사가는 요정이 자신에게 어떤 한 종류의 장면을 여러 사회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면 자신은 살인 재판을 택하겠다고 했다. 에라스무스대학 역사범죄학 교수 피테르 스피렌부르그도 그렇다. “살인은 언제나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나 목격자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기에 당시의 문화와 사회적 위계구조, 성적 관계 등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렇기에 장기간에 걸친 사회의 전반적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살인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살인의 역사>에서는 살인사건을 축으로 역사와 범죄학이 만났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살인으로 본 유럽의 풍경화다. 이 중 ‘살인의 불법화 과정’에 대한 서술에 주목한다.

<살인의 역사><br />피테르 스피렌부르그 지음·홍선영 옮김·개마고원 펴냄

<살인의 역사>
피테르 스피렌부르그 지음·홍선영 옮김·개마고원 펴냄

선사시대 유골에서도 외부 폭력의 흔적이 발견될 만큼 살인의 역사는 오래됐다. 살인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며 앞으로도 우리 삶의 일부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인이 처음부터 불법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인을 범죄의 범주에 넣고, 개인 간 폭력과 국가의 폭력을 구별하게 된 것은 현대사회에 접어든 뒤의 일이다. 유럽 대륙 중심부에서 살인은 1530년대에 불법화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중반 무렵에 완벽히 불법화됐다. 완전한 불법화는 주로 ‘침묵에 의한 논증’의 방식으로, 특히 개인적 화해에 관한 자료가 없어지고 정당방위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등장한 것을 가지고 추론할 수 있다. 지난 7세기 동안 살인의 이미지는 상당히 달라졌는데, 이 시기의 초반 무렵 사람들은 살인을 명예로운 방어나 복수 행위로 보았다. 

오늘날 대중에게 살인은 불안을 초래하는 사건이 됐다. 중세시대에는 모든 사회계층이, 그 중에서도 상류층이 개인적인 폭력에 가담했지만 그 이후로 폭력은 혜택을 받지 못한 집단의 전유물이 됐다. 중간기에 점잖은 시민들은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방어해야 했음에도 칼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살인율은 매우 감소했다. 살인의 장기적인 양적 감소는 유럽 국가체계의 확산과 도시화, 경제적 분화와 시기를 같이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던 초기 단계에 수적인 공평함이라는 규정이 없었던 복수극은 양식화된 결투로 대체됐다. 비슷한 시기에 살인의 불법화가 결정적인 국면에 다다랐다. 근대 초기 유럽의 군주국과 공화국 체제 안에서는 내부의 온순화가 진전을 보였다. 이에 수반하여 1800년 이후에 살인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명예의 내면화도 원활히 진행됐다. 살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였다. 특히 중앙집권화와 문명화가 중대한 요소였다. 살인사건을 통해 그려 보이는 시대의 속살이다.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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