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최악 기름유출 환경보호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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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알래스카 코르도바’

북극곰(여행 동행자)은 우리가 코르도바로 가는 길에 고래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바다사자는 확실히 볼 것이고, 해달 정도는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알래스카 위티어에서 코르도바로 가는 페리 안에서, 나는 포경선의 일등 항해사처럼 엄숙한 자세로 고래가 나타나는지 감시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흐르고, 페리가 돌연 경로를 바꿔 발데즈에 들러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태우고 엉금엉금 코르도바로 가는 동안에도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탐조 망원경을 손에 들고 번갈아 불침번을 선 우리가 본 것은 부표 위에서 게으르게 일광욕하는 바다사자 두 마리가 전부였다.

오르카 서점이 보이는 코르도바 전경.

오르카 서점이 보이는 코르도바 전경.

생각난 김에 말해두자면, 바다사자는 물개와 비슷한 해양 포유류다. 물개보다 체격이 작고 영리해 동물원 물개 쇼에서 물개 대신 애쓰고 있다. 해달도 해양 포유류인데, 바다에 사는 수달이라 할 수 있다. 수달보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귀엽다. 일본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에 나오는 하늘색 보노보노가 바로 해달이다. 코르도바 페리 터미널에는 아니나 다를까 해달 두 마리가 배영 자세로 둥둥 떠 있었다. 뭘 몰래 훔쳐 먹다 딱 걸린 듯한 얼굴을 하고, 해달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생선을 먹었다. 우로 취침, 좌로 취침, 물 속으로 한바퀴씩 데구르르 구르기도 했다. 엄마 해달의 배 위에 누워 있던 아가 해달도 엄마와 함께 데구르르 굴렀다. 너무 귀여웠다!

피하지 못한 해달 기름 뒤집어써
해달은 코르도바의 상징적 동물이다. 철원 독수리나 강화도 저어새, 천성산의 도룡뇽쯤 된다. 1989년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가 코르도바를 덮쳤다. 지난해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가 ‘사상 최악’을 경신했으니, 이제는 사상 제 2의 사고 되겠다. 알래스카 북극해의 기름을 미국 본토로 실어나르는 액손사의 유조선이 발데즈 앞바다에서 암초와 부딪쳤다. 마침 해류가 코르도바로 흘렀고, 대부분 어부이거나 생선 통조림 공장 직원인 코르도바 주민들은 버선발, 장화발로 달려나가 기름을 퍼냈지만, 다가오는 검은 파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생선 찌꺼기나 얻어먹을까 싶어 통조림 공장 주변에서 배회하던 해달들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기름을 뒤집어썼다. 귀여운 얼굴을 하고 기름에 절어 죽어간 해달은 액손 발데즈 사건의 상징이 됐다. 바로 그 액손 발데즈 사건의 현장에 한국의 저널리스트인 우리 두 사람은 여름 휴가를 온 길이었다.

우리는 트래킹으로 시간을 보냈다. 30층 아파트 높이에서 3분에 한번씩 우르르 쿵쾅 천둥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차일즈 빙하에 다가가 물수제비를 던지고, 새들백 빙하로 피크닉도 갔다. 솜사탕 같은 이끼 뭉치를 매달고 있는 온대 우림의 나무들과 악수하며 걸어가면 길 끝에 빙하와 호수가 나온다. ‘집채’라기보다는 ‘개집’에 가까운 빙산들이 호수에 떠 있었다. 빙하호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행하는 나무들을 봤다. 알래스카 내륙의 가문비나무들이 유콘강을 따라 베링해로 흘러들어갔다, 해류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쿠퍼 강 삼각주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코르도바 페리 선착장의 해달.

코르도바 페리 선착장의 해달.

‘여행하는 나무’는 동물학자 윌리엄 프루이트가 쓴 알래스카 자연 에세이 ‘와일드 하모니’ 첫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대 포인트 호프 인근에서 진행되던 핵실험 계획, 채리엇 프로젝트의 환경영향평가 담당자였다. 핵실험이 연약한 북극의 생태계를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고민 끝에 그는 ‘양심선언’을 했고, 원주민들의 대규모 핵실험 반대 시위로 이어져 결국 채리엇 프로젝트는 저지된다. 그러나 프루이트는 미국 본토 대학 자리를 잃고 떠돌다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역시 알래스카에 몸과 영혼을 묻은 일본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그를 기려 ‘여행하는 나무’라는 에세이를 썼다. 부지런히 전세계를 걸어 다니고 있는 도보여행가 김남희씨도 ‘여행하는 나무’라는 이름의 홈페이지를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travelingtree.com’ 도메인은 이미 팔리고 없다. 어쨌거나 나무들은 떼를 지어 패키지로 여행하고 있었다. 외롭지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우리는 킬러 웨일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피자집 암브로시아에 가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굶지 않으려면 잽싸게 움직여야 했다. 카페는 오후 3시에 닫고, 그나마 3개 있는 식당도 7시면 의자를 치운다. 킬러 웨일 카페 맞은편은 오르카 서점이었다. 킬러 웨일=오르카=범고래, 즉 범고래와 범고래가 마주보고 있다. 진짜 범고래는 마을 컬처 센터에 있다. 2000년 코르도바 앞바다로 밀려들었다가 결국 죽고 만 범고래의 골격이 전시돼 있다. 내가 묵고 있는 비앤비 주인 마크 킹 아저씨도 열심히 해체와 복원에 참여했다고, 전시물 안내에 적혀 있었다.

주정부 도로 개설 주민들이 반대
코르도바는 액손 발데즈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의식화’가 됐다. 순한 어부들이던 주민들은 연어와 해달의 떼죽음을 목격했고, 장화를 신고 기름을 걷어 냈으며, 액손사를 상대로 길고 오랜 싸움에 들어갔다. 1993년엔 액손사의 배가 어민들의 해상 시위로 코르도바로 입항하지 못하고 발데즈로 돌아가기도 했다. 주민 상당수는 아직도 액손사와 소송 중이다. 컬처 센터 귀퉁이에는 토템폴을 패러디한 ‘셰임폴(shame pole)’이 전시돼 있었다. 액손사 부회장 얼굴에서 기름이 잔뜩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거꾸로 새긴 조각이다. 알래스카 인디언 하이다 부족은 저주하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토템폴에 새겨 넣는다.

‘기풍’은 골목골목에도 넘쳐흘렀다. 킬러 웨일 카페 창문에는 ‘도로 개통 반대(NO ROAD)’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도로 없이 살 수 없다 주민들은 분노한다’ 식의 개발 촉구 플래카드에 익숙해 있는 나는 당혹스럽고도 신선했다. 코르도바도 도로가 이어지지 않아 배나 비행기로만 접근이 가능한 오지다. 굳이 주정부에서 도로를 뚫어 주변 대도시와 연결시켜 주겠다는데, 주민들이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 사라질 수 있다”며 반발했다는 이야기다. 이 담대한 주민들은 지역 박물관에 조그맣게 ‘액손 발데즈 코너’를 만들어 당시 흙과 방제복, 자료 같은 것들을 전시하고, 액손사로부터 ‘사이언스 센터’를 얻어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환경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서점 옆 ‘삼각주 환경 센터’에 가면 알래스카 송유관에서 기름이 유출될 경우 알래스카의 생태계가 어떻게 박살나는가를 그림과 도표로 무시무시하게 설명해준다.

코르도바에서는 매년 2월 눈 속에 산다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눈 벌레, ‘아이스 웜’ 축제가 열린다.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아이스 웜 홍보 센터에서는 옆 찻집에서 차를 마시던 할머니가 입술을 닦고 나와 설명을 해 줬다. 피자집 아저씨가 피자를 내놓고, 찻집 아줌마가 차를 준비하고, 아이들이 눈벌레 복장으로 가장 행렬을 벌이는 주민 축제란다. 나는 여기서 충남 태안의 삼성중공업 기름유출 사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하루 날품을 팔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렸고, 벌써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성중공업이 10여차례 남몰래 기름을 닦고 갔다는 건 안다. 그러나 그 뒤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수십년이 흘러 태안 앞바다에 상괭이와 뿔논병아리들이 다시 돌아올 때, 그때 구름포와 만리포의 공동체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아니, 그때까지 존재할 수 있기나 할까.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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