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번갯불에 구워낸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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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인력 부족과 짧은 검토 기간으로 오류 속출

현재 고2·3학년생들이 배우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갑신정변 실패 후 개화파 4인이 찍힌 사진이 실려 있다. 이들의 이름은 무엇일까? 정답은 왼쪽에서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하지만 법문사가 만든 교과서에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으로 잘못 나와 있다. 두산동아가 만든 교과서 역시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으로 틀리게 소개하고 있다. 그나마 두산동아 교과서는 작년에 법문사와 같은 오류를 실었다가 고친 것이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개화파 4인의 모습. |경향신문DB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개화파 4인의 모습. |경향신문DB

이 외에도 7차 교육과정의 국사, 한국근현대사, 세계사 과목의 크고 작은 오류를 정리한 결과 A4용지 880쪽 분량에 달했다. 국사편찬위원회나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정리한 것이 아니다. 용인 고시원아카데미 역사 강사 신승욱씨(40)가 수 년간 작업한 결과다. 신씨의 꾸준한 문제제기 끝에 국사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에서 모두 500여 건 중 175건의 오류가 수정됐다. 신씨는 “최근 역사교과서의 이념이 어떻다는 말만 무성한데, 이념을 따지기에 앞서 일단 사실관계가 맞아야 할 것 아니냐”며 “평소 교과서의 이념성향 문제에 관심이 많던 일부 보수 언론사에도 제보를 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옛 홈페이지(http://old.history.go.kr)에는 신씨처럼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한 글이 1만건 넘게 올라와 있다.

한국사 전문 연구가가 아닌 신씨는 일일이 1차 사료를 찾아가며 오류를 찾는 대신 국사 교과서와 지도서, 6종의 근현대사 교과서, 3종의 세계사 교과서와 시중에 나온 백과사전의 같은 부분을 비교, 대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수업 준비를 하면서 오류를 하나둘씩 찾다가 본격적으로 오류 찾기에 나선 지 어언 3년째. “그동안 제대로 생계도 못 챙겼다”는 신씨는 “편찬위나 출판사나 민원을 넣고 전화도 걸고 난리를 쳐야 뭔가 좀 고쳐진다”며 그동안의 경위를 전했다.

연도, 사건 선후관계 오류 500여건
신씨는 “2010년판 국사 교과서가 마지막 국정 교과서이기 때문에 2009년에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올해부터는 국사 교과서의 이름이 ‘한국사’로 바뀌고, 국정이 아닌 검정체제가 되어 종류도 6종이 됐다. 국정체제에서는 질의응답 과정에서 인연을 맺게 된 편수관과 직접 통화도 하며 교과서를 고칠 수도 있었다. 반면 검정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들은 신씨의 질의에 응답을 거의 남기지 않을 뿐 아니라, 출판사 수도 여러 군데여서 문제제기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신씨의 설명이다.

신씨가 정리한 880여쪽 분량의 오류 내역의 대부분은 연도나 사건의 선후관계가 잘못된 것들이다. 이 중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오류도 상당히 발견됐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60쪽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무역조약의 결과 “베이징과 한성 양화진에서의 무역을 허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양화진은 현재의 서울 마포구에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그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책 104쪽에는 이 내용이 “청은 서울과 양화진에서의 상점 개설을 보장받았다”로 되어 있어, 양화진이 서울 내에 위치하지 않은 것처럼 서술했다. 한 교과서 내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셈이다. 신씨는 중앙뿐 아니라 양화진이 서울 바깥에 있는 것처럼 서술한 다른 출판사에 내용 수정을 요구했으나 단 한 군데도 내용을 올바르게 고치지 않았다.

신승욱씨는 역사 교과서들을 비교분석, 수백건의 오류를 찾아냈다. |백철 기자

신승욱씨는 역사 교과서들을 비교분석, 수백건의 오류를 찾아냈다. |백철 기자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잘못된 내용이 많이 발견됐다. 교학사의 세계사 교과서는 기원전 73~71년 로마에서 벌어진 노예 반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해설에서 “영화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 그라쿠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들도 스파르타쿠스와는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00년에 태어난 카이사르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전후로 변호사, 군사호민관 등으로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스파르타쿠스와 동시대 인물이다.

또한 이 교과서는 매카시즘에 대해 “6·25 전쟁, 베트남 전쟁을 보면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있어, 매카시즘 열풍이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생겨난 것처럼 서술했다. 하지만 매카시즘이 시작된 연도가 1950년인 데 비해 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시작됐다. 신씨는 이와 같은 오류를 출판사 측에 지적했지만 2011년판에서 이런 오류들은 고쳐지지 않았다.

신씨는 “앞으로 사교육 강사인 나보다는 공교육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교과서 오류를 수정했으면 좋겠다”며 올해부터 고등학교 1학년생이 배울 한국사 교과서의 오류는 검정 과정과 교과부 모니터링단 활동에서 고쳐지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이번 한국사 교과서 검정은 교육과정평가원에서 담당했다. 교육과정평가원은 2009년 11월부터 7개월에 걸쳐 한국사 교과서를 검정했지만, 실질적 검정이 이뤄진 본심사 과정은 한 달 남짓이었다. 본심사에서 11명의 검정위원은 3~4주간 각자 심사한 뒤, 5일간의 합숙 심사에서 13종의 교과서를 6종으로 압축했다. 나머지 6개월은 검정위원 섭외, 기초조사, 검정 불합격 출판사의 이의신청, 국사편찬위원회 감수 등에 사용됐다.

교육과정 주기 단축도 혼란 낳아
문영주 교육과정평가원 검정평가연구실 부연구위원은 “연구위원 9명이 본심사에 앞서 1개월간 교과서 오류 내용을 중점 점검하고, 본심사에서 지적된 내용을 검토한다”고 답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연구위원들은 “분량이 많아 보고서를 완성하는 데 급급했다”고 한다. 기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사 교과서를 만들 때 6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해 점검했음에도 신씨에 의해 수백 군데의 오류를 지적당한 것과 비교된다. 검정이 끝난 이후에는 교과서의 오류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문 위원은 “평가원의 역할은 검정을 통해 최종 합격본을 가려내는 것이고, 검정 이후에 발생한 교과서 상의 오류는 교육과학기술부 교과서기획팀에서 담당한다”고 전했다.

유대균 교과부 교과서기획팀 연구관은 “우리는 역사뿐만 아니라 전 과목 교과서를 담당한다. 한 해 발매되는 교과서는 4500여종이 되는데, 교과서기획팀 전문인력은 단 3명이다”라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내용검토 외에도 개발, 편찬 등 관련 임무를 모두 맡아야 하는 상황에서 신씨처럼 교과서 비교분석을 할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유 연구관은 “수정 요구가 들어오면 집필자에게 내용 검토를 요청하는데, 전공자도 아닌 우리가 교과 내용을 깊게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자는 주장을 편 바 있는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최근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한국근현대사를 따로 만들었다 없애는 등 혼란이 많았다”고 말했다. 체계가 통째로 바뀌면서 내용상의 오류를 걸러낼 여유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 교수는 “교육과정 주기가 이전의 5년에서 2년이 되면서 집필기간도 짧아지고 오류가 나타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지적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바 있는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집필진끼리도 내용을 검토하지만, 미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검정 과정에서 잘못된 사실을 최대한 걸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주 교수는 “교과서에서 오류가 속출했다면 이는 검정위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했거나 검정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있다고 봐야 한다. 뭘 새로 만들 게 아니라 전문성 있는 인력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정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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