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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 전주원 ‘그녀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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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선수 생활 후배들에 귀감… 농구인생 2막은 지도자로 새출발

전주원(39)을 만난 4월 25일, 그는 서울 광진구 자택에서 올해 초등학생이 된 딸 수빈이와 오후에 같이 볼 영화를 스마트폰으로 고르고 있었다.

4월 1일 신한은행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여자농구 KDB 생명과의 챔프전 3차전 경기에서 승리, 사상 최초로 5년 연속 통합우 승을 일궈냈다. 신한은행 전주원이 우승이 결정되자 환호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4월 1일 신한은행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여자농구 KDB 생명과의 챔프전 3차전 경기에서 승리, 사상 최초로 5년 연속 통합우 승을 일궈냈다. 신한은행 전주원이 우승이 결정되자 환호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운동할 땐 1년에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70일도 안 됐거든요. 엄마 보고 싶다고 울 때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던지…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수빈이에게 두 배 세 배 잘해주려고 합니다.”

1990년 현대산업개발에 입단한 뒤 실업무대와 프로무대, 그리고 국제대회에서 한국 여자농구를 20년간 대표했던 전주원. 그는 이제 30년 동안 잡았던 농구공을 놓고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그는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불혹의 나이까지 코트에서 뛰었다. 숱한 부상과 고비를 넘어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 경험을 살려 이젠 여자선수로 좀처럼 밟기 어려운 지도자의 길, 그리고 교수의 길을 조금씩 밟고자 한다.

2000년 올림픽 메달 실패 가장 아쉬워
현대산업개발 유니폼을 입을 때부터 그는 화제였다. 당시엔 파격적인 1억5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실업무대에 뛰어든 그는 첫 해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전주원의 이름 앞엔 바로 ‘천재가드’란 수식어가 붙었다. 동갑내기 남자선수 이상민과 함께 한국 농구의 간판 가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니 너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때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다. 전주원과 정은순, 정선민 등 여자농구 스타플레이어들이 모였던 대표팀은 16년 만에 올림픽 4강에 올랐으나 3~4위전에서 브라질에 연장전 끝에 패배, 메달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저를 포함해 주축 선수들이 계속 5반칙 퇴장을 당했거든요. 다시는 오지 못할 기회여서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죠. 올림픽 메달은 하늘에 별따기라고 생각했는데.”

시드니올림픽 직후 미국 진출 기회가 왔지만 역시 인연을 맺지 못했다. “미국여자프로농구 워싱턴에서 제안이 왔었다”는 그는 “하지만 당시엔 현대와 막 재계약을 한 상황이어서 갈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보면 전주원은 그래도 순탄한 선수생활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실업무대와 프로무대를 거치는 동안 겪은 좌절과 어려움은 그의 잡초 같은 인생에 밑거름이 됐다.

“사실 현대는 90년대 약팀에 속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뛰어도 팀이 우승하지 못한 적이 있었죠. 그게 너무 힘들어 농구를 그만두려고 여러 차례 생각했고. 그런데 나중엔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란 생각으로 우승에 매달렸고, 서른이 넘은 뒤에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뛰었던 전주원은 2002년 여름리그에서야 프로무대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당시 모기업 현대건설의 경영 악화로 팀이 해체 위기에 몰렸고, 2004년 임신과 동시에 첫 번째 은퇴를 한 그는 이후 코치로 재직할 때 여관에서 먹고자는 시련을 겪었다.

“감독님이 대표팀 코치로 가시면서 제가 팀에 필요했어요. 웨이트트레이닝 시설도 없어 일반인들과 함께 운동해야 했고. 집안에선 만삭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곳에서 생활하느냐며 반대를 했죠. 하지만 함께 고생한 후배들을 나몰라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정으로 똘똘 뭉쳐 재미있게 운동했던 때도 없었던 것 같고요. 앞으로 제가 어떤 시련을 맞더라도 그때 어려움을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2005년 신한은행이 팀을 인수하면서 코트로 복귀한 전주원에게 돌아온 것은 고생한 만큼의 보상이었다. 신한은행은 2007시즌 겨울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올 시즌까지 5년 연속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전주원도 2007시즌 겨울리그 MVP, 2009~2010시즌 챔피언결정전 MVP에 선정되며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4월 25일 은퇴를 선언한 한국여자농구의 간판 전주원 선수(신한은행)가 서울 구의동 자택에서 스포츠칸과 인터뷰 중 딸 수빈양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4월 25일 은퇴를 선언한 한국여자농구의 간판 전주원 선수(신한은행)가 서울 구의동 자택에서 스포츠칸과 인터뷰 중 딸 수빈양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뒤늦은 우승복을 느끼면서 꿈 같은 5년을 보냈다”는 전주원. 그러나 그는 이런 감격을 뒤로 하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 중이다. 최근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다음 시즌부터 신한은행 코치로 일하기 때문이다. 지도자로 나선 만큼 최종 목표는 감독이 되는 것. 여자프로농구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야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수 있는데, 전주원 역시 최종 목표는 대표팀 사령탑으로 벤치에 앉는 것이다.

“신한은행에서 좋은 제안을 했고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욕심이 많아서인지 코치 얘기가 나왔을 때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자’는 느낌이 들었죠. 지금은 임달식 감독님 밑에서 잘 배우는 게 목표지만, 현대 시절 코치 경험도 있으니까 자신있게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최종 목표는 대표팀 사령탑
그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미국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국제대회 80전 전승을 기록한 타라 반더비어 감독을 롤모델로 꼽았다.

“사실 여성이 지도자로 나서기 쉽지 않은 게 한국 현실이잖아요.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제가 깨보려고 합니다. 애틀랜타올림픽 때 여성이었던 반더비어 감독을 보며 ‘멋있다. 나도 나중에 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저도 열심히 해서 멋있는 여성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욕심 많은 전주원은 지도자 외에도 두 가지 꿈을 더 갖고 있다. 하나는 공부를 통해 강단에 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농구 저변 확대에 힘써 1970~80년대 한국이 세계무대를 호령했던 그 모습을 다시 찾도록 하는 것이다.

“제가 무릎 수술만 네 번 해서 그런지 재활엔 도가 텄거든요. 지금 스포츠건강관리학과(대전 우송대)에 재학 중인데 대학원 과정까지 꼭 마쳐서 여자선수들의 재활이나 몸 관리에 대한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여자농구에 대한 안타까운 현실을 전하며 농구로 많은 복을 받은 자신이 앞장서겠다는 게 그의 뜻이다.

“서울시에 여자초등학교 농구부가 단 3팀뿐이라고 합니다. 요즘 자녀 1~2명 낳는 시대인데 저라도 농구에 자식을 ‘올인’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어린 학생들이 공부와 농구를 같이 하며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농구를 보급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고 싶습니다.”
인생의 1막을 훌륭하게 내린 전주원. 이제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2막을 기다리고 있다.

전주원
출생
1972년 11월 15일

체격 176㎝, 67㎏

가족 남편 정영렬(40), 딸 정수빈(7)

포지션 가드

학력 선일초-선일여중-선일여고

소속팀 현대산업개발 (1990년)-신한은행(2005년)

주요 대표경력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4위

주요 수상경력 1991년 농구대잔치 신인상, 2007년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 MVP,
2009~2010 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프로성적 경기당 10.34득점, 6.56도움, 3.61리바운드


<김현기 스포츠칸 기자 hyunki@kyunghay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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