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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리스트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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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상황에서 생존하는 법’ 관련 서적·동호회 눈길

주민들이 논두렁을 가로질러 뛰어오고 있다. 언덕 위에 올라선 사람들은 애타게 “빨리!”라고 외친다. 간발의 차로 이들은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 밀려닥치는 파도에 집들이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한 배달트럭은 깜박이를 켜고 파도 쪽으로 가고 있다. 트럭을 운전하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 후 폐허로 변한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마을에서 한 주민이 자신의 물건들을 물에 씻고 있다. |연합뉴스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 후 폐허로 변한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마을에서 한 주민이 자신의 물건들을 물에 씻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동일본대지진 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된 일반인 촬영 영상이다. 지진사태가 종종 벌어졌던 일본에서도 이번 대지진은 상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렇다면 한국은? 한국에서 저렇게 상상도 못할 재난이 벌어진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반응이 대부분이겠지만 “미리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서바이벌리스트(survivalist)다.

번역한다면 ‘생존주의자’다. 미증유의 재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서바이벌리스트들의 주된 관심사다.

재난, 미리 생각하고 대비해야
최근 생존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초록물고기),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 권의 책>(루비박스)이다. 책이 출판된 계기는 역시 일본 지진과 원자력발전소 사고다. <재난이 닥쳤을 때…>를 펴낸 원형준 루비박스 대표는 ‘아일랜드 화산 폭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책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원 대표는 “일본 대지진 이후 우리도 ‘재난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 되지 않았는가”라고 출간의 변을 밝혔다. 그는 “예측이 불가능한 자연재해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며 “특히 한반도의 경우 최근 백두산 화산 폭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변의 원전시설이 붕괴될 경우 서울에서 200㎞도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도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앞의 아파트에 전력이나 수도가 끊기는 것과 같은 상황에 대해 <재난이 닥쳤을 때…>의 저자 코디 런딘이 내놓은 생존법. 우선 체온을 유지하고, 난방수단을 찾아야 한다. 당장은 집 내의 햇볕이 잘드는 곳에 텐트를 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음에 확보해야 하는 것은 물이다. 사람들이 ‘목마름’을 느낄 때는 이미 신체 내 수분이 1.5리터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술을 마시면 본래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체액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금주를 해야 한다. 평상시에 대형 플라스틱 물통 등을 마련해 물을 보관해뒀으면 좋겠지만 재난상황은 갑자기 닥친다. 그럴 경우 교외의 산골짜기 냇가나 강, 호수나 연못의 물을 마셔야 한다. 오염된 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소독해서 마셔야 한다. 끓이거나 증류하는 방법으로 소독할 수 있지만,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이럴 때 빛나는 것이 ‘생존기술’이다. 페트병의 상표를 뜯어내고 물을 담아 지붕에 올려놓으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외선 살균이 가능하다. 생석회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면 쌓이는 배설물의 악취와 오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재난상황에서 생존 가이드를 담은 책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법>,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권의 책>.

재난상황에서 생존 가이드를 담은 책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법>,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권의 책>.

<세상의 종말에서…>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 기존의 생존기술을 다룬 책들이 개인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보다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저자 웨슬리 롤즈는 주장한다.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최소 두 가족 이상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이 롤즈의 견해다. 누군가 휴식을 취하면 다른 사람은 불침번을 서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맡은 업무를 분담하여 협동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생존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칭 전문가들 중에는 산이나 들판에서 원시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에 치중하거나 첨단장비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방어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 재앙이 일어난 뒤에 이웃에게 나눔과 도움을 베푼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생존 가이드 필요
롤즈는 재앙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비해 생존에 필요한 텃밭을 가꾸고 동물을 기를 수 있는 ‘은신처’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은신처는 말 그대로 은신처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 이미 은신처가 아니다. 재앙이 일어났을 때 기존에 널리 알려진 길, 이를테면 고속도로는 사용할 수 없다. 

이미 피난민들에 의해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대피에 필요한 목록을 작성하고, 대피용 배낭을 꾸리고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은신처에 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신변보호용으로 무기나 철조망의 사용법도 익히고 있어야 한다. 책을 펴낸 도서출판 초록물고기의 이정학 대표는 “꼭 지진이나 태풍, 원전사고와 같은 것만이 재난이 아니라 금융위기나 신종플루와 같이 재난의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라며 “재난이 한 개인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형태로 오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급자족용 및 자기보호를 위한 무기를 마련하라”든지 “물물교환에 대비해 귀금속을 비축해둬야 한다”는 조언이 우리 실정에 맞는 걸까. 지난 2004년부터 포털네이버에서 서바이벌리스트 카페를 운영해온 이종택씨(54·사업)는 “책의 조언이 약간 오버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총기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시기상조이기도 하고 오히려 과잉방어로 위해를 끼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난상황이 닥쳐 우왕좌왕하기보다는 미리부터 생각하고 대비하는 데 지침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씨는 “언젠가는 한국적 서바이벌을 다룬 책이 나와야겠지만, 현재 쌓여 있는 데이터나 자료를 통해 한국적 실정에 맞는 매뉴얼 정도는 기획이 가능한 단계에 와 있다”고 덧붙였다. 생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에 따라 서바이벌리스트 카페의 회원도 부쩍 늘고 있다. 지난해 천안함 사건, 올해 일본 지진 전후로 카페 회원은 대폭 늘어났다.

<세상의 종말에서…>의 번역자 노승영씨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첫째로 항상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며, 둘째는 훈련과 교육”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생존장비가 있더라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 재난에 대비하는 경각심이나 대비 매뉴얼·훈련 같은 것이 너무 부족하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노씨는 “책을 번역하면서 고민이 되었던 것은 미국은 이런 생존에 관한 교육이라든가, 물품판매도 많이 이뤄지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거의 찾기 힘들다는 것”이라며 “서바이벌리스트 자체가 현재까지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앞으로는 이와 관련해 관심이 더 많아지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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