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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미워도 이웃은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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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지진 구호활동 적극적… 긴장완화·평화촉진 새 전기

지난 3월 23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962차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이번 수요시위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을 위한 모금함 옆에는 일본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모금함이 함께 놓여 있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힘내요 위안부할머니, 힘내요 일본’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집회 중에 ‘일본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모금함에 준비한 성금을 넣었다. 일본 정부에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일본 시민의 참담한 현실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 친구들을 돕기 위해 성금을 모금하고 있다. |연합뉴스

초등학교 학생들이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 친구들을 돕기 위해 성금을 모금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호쿠 대지진으로 동북아에 협력과 화해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한국과 중국은 가장 먼저 일본에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국에서는 정부와 기업은 물론 일반시민들까지 일본 돕기에 발벗고 나섰다. 일본 식민지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도 모금활동을 벌이고 민족문제연구소, 원폭피해자협회 등 한·일 과거사 청산 관련단체들도 위로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에 구조팀을 급파하고 이불·텐트 등의 구호물자를 기부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일감정이 거셌던 중국 대학생들도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모금활동에 기꺼이 참여했다. 일본 또한 한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응원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무토 마사토시 주한 일본대사는 3월 23일 홈페이지를 통해 “마치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피해를 입은 듯 아픔을 함께하며 도와주고 계신 한국은 일본의 진정한 친구”라며 감사를 표했다.

대립의 감정은 잠시 묻어두고
일본 대지진이 동북아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증진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도 일본의 적극적인 구호활동으로 중·일간 우애와 협력이 증진된 바 있다.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중국에 구조팀을 보냈으며, 구조활동을 위해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중국에 군함을 파견하기도 했다.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에 대한 응답으로 중국은 쓰촨성 대지진 특별사진전에서 일본 자위대가 복구 작업을 하는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 당시 사진전은 난징시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열렸다. 

일본인의 잔악한 만행을 전시해 오던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자위대의 사진이 함께 전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요미우리신문은 “중국에서 발생한 대지진 참사가 양국관계를 발전시키는 물꼬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신대 일본학과 하종문 교수는 이번 일본 지진이 동북아 3국의 긴장과 갈등을 줄여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많은 일본 시민들이 한국과 중국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일반 시민들 간의 정서적 교류가 유대감과 동질감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비록 역사문제 등으로 긴장과 갈등이 지속돼 왔지만 “이러한 교류를 바탕으로 상호인식이 심화될 수 있었다”고 분석하며, 일례로 1995년 일본 한신 대지진을 꼽았다. 한신 대지진 당시, 한국이나 중국에서 이번과 같은 국민적 지원 캠페인은 없었다. 하 교수는 “지난 15년간 역사문제 등으로 동북아 3국간 갈등이 있어 왔다”며 “그러한 갈등 과정 속에서 상호이해가 깊어지고 조금 더 보편적인 지역공동체로 나가는 인류애적인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지진을 계기로 3국 국민들은 지역공동체를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월 21일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 역사 교과서검정’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3월 21일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 역사 교과서검정’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대지진을 계기로 형성된 한·중·일 우호관계가 그간의 골 깊은 3국 간의 갈등을 풀어가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영유권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민감한 현안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서 무엇보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3월 말로 예정된 일본 중학교 사회교과서 검정 문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08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펴냈는데 이 해설서에는 ‘다케시마(독도)를 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취급하라’는 가이드라인이 제시돼 있었다. 이번 검정이 ‘애국심 교육’이 강조된 신학습지도요령에 기초해 실시되는 만큼 자국 중심주의에 입각한 교과서가 보급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번 교과서 검정 발표로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국민 감정이 다시 자극받으면 한·일 두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되는 이유다.

쓰촨성 대지진때도 중·일 우호 기류
이번 교과서 검정 문제는 일본 우경화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우경화가 동북아의 긴장과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지진으로 형성된 한·중·일 간의 협력이 일본의 우경화를 제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지난 3월 21일 일본 교과서 검정과 관련한 토론회로 일본에 다녀온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의 양미강 상임공동위원장에게 일본 현지의 분위기를 물었다. 양 위원장은 “지진은 지진이고 교과서 문제는 교과서 문제”라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분명 일본 시민들은 과거보다 한국에 우호적이지만 이는 사적인 친밀감 정도에 불과해 이러한 기류가 공적인 시스템 변화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양 위원장은 한국의 지원에 우익을 포함한 일본인들이 고마워하긴 하지만 “일본 우익은 여전히 독도나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며 영토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이번 참사가 일본의 우경화를 재촉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윤태룡 교수는 “미국도 9·11 테러 이후 굉장히 배타적인 정책을 쓰기도 했다”며 “국가에서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국민 결속을 다지기 위해 자국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도 그러한 경향이 강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 교수는 이번 동북아 3국의 협력이 “근본적인 대립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가 간 관계는 안보 문제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데 북핵 문제와 같은 안보 문제가 불거지면 한·미·일 해양세력과 북·중 대륙세력으로 다시 갈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동덕여대 중어중국학과 이동률 교수도 중·일관계에 대해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이번 지진을 계기로 반중 대 반일 같은 감정적 대결은 사라지겠지만 지진 구호와 영토 문제는 별개”라고 말했다. 중·일 간 영유권 다툼이 치열한 댜오위다오 문제 등이 불거지면 금세 갈등과 긴장 국면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분석이다. 쓰촨성 대지진 당시 우호적 관계를 다졌던 중국과 일본도 북핵 문제나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다시 날카롭게 대립한 바 있다. 이밖에도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 등 동북아 역내에 잠복해 있는 쟁점들이 언제든 불거져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민감한 현안 제기땐 갈등 재연 불가피
일본 대지진과 한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구호와 지원, 재난 앞에서 보여준 일본 시민들의 침착한 대응과 그에 따른 이미지 제고 등은 동북아 3국을 전례없이 친밀한 관계로 이어주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전후처리 문제, 각국의 상이한 역사인식 등은 이러한 유대감이 작은 자극에도 깨지기 쉬운 살얼음판임을 시사한다. 이번 지진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 한신대 일본학과 하종문 교수도 독도 영유권 문제와 같은 민감한 현안들이 제기될 경우 과거와 같은 갈등이 반복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하 교수는 “일보 후퇴한 후에는 이보 전진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번 지진을 계기로 상호 이해가 깊어진 만큼 감정적인 대립이 아닌 합리적인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하 교수는 “이번 지진을 계기로 일본 전체가 변하지 않더라도 단 몇 사람이 변한다면 그걸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낙관을 전했다. 결국은 시민들의 몫이라는 뜻이다. 양미강 위원장도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사항이 있다면 일본의 우경화된 시스템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자연재해는 앙숙도 손잡게 한다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역설적으로 적대 국가 간 화해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긴급 구호나 인도주의적 지원 및 재건 활동이 적대 국가 간 신뢰를 회복시켜 불편했던 관계가 개선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그리스와 터키다. 그리스와 터키는 식민지 지배와 영토분쟁 등으로 오랜 기간 적대관계를 유지해왔다. 1453년부터 1832년까지 400년간 오스만 터키는 그리스를 지배했고, 1921년에는 그리스가 터키를 침략해 전면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1996년에는 에게해 지역의 영토분쟁으로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터키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오랜 적대국이었던 그리스는 구조대와 구호물자를 보내 터키 국민들을 위로했다. 이어서 한 달 후 그리스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이번엔 터키가 그리스에서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벌였다. 이후 양국은 친선 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이어나갔다. 잇따라 발생한 지진을 계기로 양국은 오랜 긴장과 갈등을 깨고 관계 개선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오랜 적대국인 파키스탄과 인도도 자연재해를 계기로 관계가 개선된 대표적 사례다. 양국은 1947년 영국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국경선 일대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를 놓고 두 번이나 전쟁을 치른 바 있다. 2005년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서는 강진이 일어나 7만5000명의 사망자와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인도는 파키스탄에 모포, 텐트, 의약품 등의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국경 인접지역에 파키스탄 주민을 위한 구호센터를 열기도 했다. 이때 인도와 파키스탄은 효과적인 지진 구호작업을 위해 카슈미르 통제선을 58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했다.

자연재해를 예방하는 과정에서도 적대 국가 간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미국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18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미국은 재난 예방을 위한 기후현상 연구를 위해 오랜 앙숙인 쿠바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쿠바의 연안 지역은 모두 허리케인에 취약하고 강력한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플로리다로 오는 허리케인은 대부분 쿠바를 지나므로, 미국은 쿠바의 관측이 필요하고 쿠바는 미국의 항공관측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쿠바는 미국 기상관측 항공기가 쿠바 상공에서 관측활동을 하는 것을 승인할 만큼 사이클론에 관한 한 양국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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