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북극의 문’ 열어준 탐험시대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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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해외방랑기 ‘노르웨이 트롬쇠’

사실 이 도시를 뭐라고 읽는지 나는 아직까지 모른다. Tromsø. ‘트롬쇠’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지난해 런던에서 이 도시를 다녀왔다는 영국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트롬소’라고 했다. “아, 트롬쇠가 아니라 트롬소인가요?” 그는 움찔 뒤로 물러나며 “낸들 어떻게 알아요, 트롬쇠인지 트롬소인지. 어차피 노르웨이 말인데.” 그는 우아하게 베르겐에서 트롬쇠까지 피요르드를 따라 크루즈를 타고 올라갔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고 갔다. 스칸디나비아 항공의 저가항공 SAS Braathens를 타고 갔다. 오타가 아니다. ‘a’가 원래 두 개다.

1년 내내 흰 눈이 산꼭대기에 쌓여 있는 트롬쇠의 한 공원.

1년 내내 흰 눈이 산꼭대기에 쌓여 있는 트롬쇠의 한 공원.

트롬쇠(로 해두자)는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 중 하나다. 북위 70도쯤 된다. 겨울이면 바다가 꽁꽁 얼어붙는 러시아 해군기지 무르만스크보다도 위도가 높고, 그 옛날 영국인 선원들이 에스키모에게 총을 주고 물범 가죽을 사오던 캐나다 캠브리지 베이보다도 높으며,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나오는 그린란드 이누이트 스밀라의 고향 그린란드 누크보다도 높다. 

트롬쇠의 캐치 프레이즈는 ‘북극의 입구(the Gate of the Arctic)’. 상점에는 ‘Arctic’이나 ‘Polar’를 접두어처럼 단 간판들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라 펜션도 아틱 호텔도 폴라 비앤비도 다 놔두고 ‘아네모네 비앤비’으로 갔다. “아름다운 보라색과 노란색의 아네모네가 뜰에 가득 피어 있어요”라는 홈페이지 소개글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일단 거기가 어딘지 아무도 몰랐다. 공항 택시기사는 ‘트롬쇠에 내가 모르는 숙소가 있을 리 없다’는 듯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얼굴로 이 집 저 집으로 택시를 들이댔다.

트롬쇠 관광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동네였다.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에게 기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가장 최근에 문을 연 집’이라고 온몸으로 이야기했다. 키가 크고 옅은 금발을 한 집주인 아저씨는 “어머머, 그럴 리가 없어요”라고 과장되게 손을 저어 보였다. 이름이 오이스터(Oyster), ‘굴’이었다. 뜰에는 아네모네가 가득은 아니지만, 조금은 피어 있었다. 꽃 옆으로 자전거 두 대가 보였다.

하얀 북극 대성당서 열린 백야음악회
“혹시 이거 빌릴 수 있나요?” 굴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거 엄청 비싼 건데…, 최고급 마운틴 바이크인데…, 뭐 손님이 원하신다면 빌려드려야죠. 싸게 드릴게요.” 굴 아저씨는 30분 동안 자전거 사용법을 설명했다. 페달은 앞으로 밟아야지 뒤로 밟으면 안 되며, 자전거를 걷어차거나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묵직한 공구 세트를 자전거 뒷바퀴에 달았다. “이건 특별히 비싼 거니까, 자전거 세워놓을 땐 꼭 떼어 들고 다니세요.”

속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비앤비 앞 골목을 빠져나오자 광활한 내리막길이었다. 이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트롬쇠 다운타운이 언덕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페달에 얹어놓은 다리가 떨렸다. 결국 핸들을 두 손으로 잡고, 자전거를 이랴이랴 소처럼 몰고 갔다. 자꾸만 뒷바퀴가 내 뒷다리를 쳤다. 떼어버리고 싶었다. 끌고 올라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북극곰(여행 동행자)은 이미 언덕 밑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북극 대성당(Arctic Cathedral)의 내부 모습.

북극 대성당(Arctic Cathedral)의 내부 모습.

다운타운은 자전거 따윈 필요 없을 만큼 작았지만, 빌린 게 아까워 일 없이 몇 바퀴를 뱅글뱅글 돌았다. 최고급 마운틴 바이크의 안장은 돌을 쪼아 만들었는지 엉덩이에 안장 모양의 푸른 멍이 드는 것 같았다. 웬만한 한강다리보다 더 긴 다리를 울면서 건너 ‘북극 대성당’에도 다녀왔다. 삼각 기둥을 포개어 놓은 것 같은 하얀 성당은 몹시 아름다웠다. 흰 옷 입은 예수가 새겨진 스테인드 글래스가 십자가 대신 걸려 있었다. 성당에서는 이날 밤 백야 음악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언덕 위에 갖다 놓고 다시 올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자전거는 내 것이 아니어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음악회를 포기했다.

오후에는 ‘폴라 뮤지엄’에서 시간을 보냈다. 간판에 바다코끼리가 그려진 조그만 통나무 집이다. 극지방 생활사와 북극 탐험 역사를 모아 놓은 박물관이었다. 원주민인 이누이트를 제외하면 극지방 생활사는 사실상 사냥의 발달사였다. 사냥꾼들은 극지방의 척박한 섬에 통나무집을 짓고 고래, 바다코끼리, 북극곰이나 물범을 마구 잡았다. 실물 크기로 재현한 사냥꾼의 통나무집 처마에는 기러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역시 노르웨이 사람들은 거칠고 대담한 바이킹의 후예인가. ‘열심히 순록을 해체하는 사냥꾼의 모습’ ‘나무 기구를 이용해 북극곰을 잡는 사냥꾼의 기지’ 같은 전시물만 반성 없이 계속됐다. 그러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탐험가 아문센과 난센의 유품을 발견하니 반가웠다.

아문센·난센 유품에 밴 인간 도전정신
이미 대학 시절 스키로 그린란드를 횡단했던 난센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북위 86.14도까지 진입해 북극점 탐험 시대를 열었다. 노르웨이 국민의 열망을 한몸에 안고 북극점으로 향하던 아문센은 미국인 피어리에게 선수를 빼앗긴 뒤 기수를 반대로 돌려 1911년 12월 잽싸게 남극점에 노르웨이 깃발을 꽂았다. 한 해 내내 남극 로스 빙붕에서 과학 탐사를 하던 영국인 스콧의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해 나부끼는 노르웨이 깃발을 보고 절망한 뒤 귀환길에서 세상을 떠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마음이야 스콧 탐험대의 비극에 애틋해지지만, 나라도 신속한 극점 ‘정복’이 목적이었다면 아문센의 탐험대에 합류했을 것이다.

아문센은 난센이나 스콧과는 다른 인간이었다. 그는 난센처럼 미지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동경하지도 않았고, 스콧처럼 국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도전과 성취가 직업인 세계 최초의 프로 탐험가였다. 남극점 ‘정복’ 이후에도 그는 탐험을 계속했다. 한번은 비행선 ‘노르게’에 몸을 싣고 스발바르에서 알래스카까지 북극을 횡단하기도 했다. 스발바르의 관문 트롬쇠의 폴라 뮤지엄 앞에는 아문센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 언제 봐도 뭔가 떨떠름한 얼굴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2년 뒤 알래스카 놈에 가게 될 것이었다. 아문센의 노르게가 도착한 곳. 똑같은 흉상이 거기도 있었다. 아문센을 따라 간 것이라고 해두자.

다음날에는 또 다른 북극 박물관인 ‘폴라리아’에 갔다. 북극의 자연현상과 동물을 집대성하고, 그걸 또 인형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그 전에 굴 아저씨 비앤비에게 복수부터 했다. “음… 노르웨이 장인들이 한 알 한 알 손수 따서 만든 잼과 아… 유기농으로 구운 빵으로 아침식사를 차려줄 거예요.” 굴 아저씨는 앙드레김 말투로 말했지만 식탁엔 3박4일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마른 잼과 빵이 전부였다. 방명록을 펴들고 일단 영어로 “나이스 스테이!”라고 썼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볼펜을 고쳐 쥐었다. “자전거는 절대절대 빌리지 마세요. 쳇, 이 집 아저씨는 소심남임.”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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