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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소년’처럼, 때론 ‘여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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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에 대한 2가지 인물평, 격의없는 천진함 VS 결국 원하는 것 얻어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의 이미지는 ‘소년’과 ‘여우’다. 천진함을 뜻하는 소년과 영악함을 의미하는 여우. 보는 이에 따라 다소 상반된 두 단어로 그를 규정한다.

2010년 1월 정운찬 국무총리가 정부중앙청사에서 교육과 과학 중심 경제도시 건설을 내용으로 하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2010년 1월 정운찬 국무총리가 정부중앙청사에서 교육과 과학 중심 경제도시 건설을 내용으로 하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먼저 그를 여우라고 평하는 이들은 “점잖고 욕심 없어 보이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등)을 여우처럼 영악하게 다 얻는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격의없이 대하고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와 천진함이 감동적이다”라고 말한다.

정치권의 평가는 양극이다. “정치란 쟁취하는 것인데 비단길에 꽃가마 타고 가려 한다. 치열한 도전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다른 측에선 “저열한 정치판에 그런 품격 있는 분이 나타나 한국 정치계가 정화돼야 한다”고 기대감을 보인다. 보수층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전원책 변호사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인물 중에 정 총장보다 더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분도 드물다”고 말한다. “과거 그는 진보·보수 양쪽에서 모두 구애를 받았는데, 보수는 그의 보수적 기질, 예컨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세를 높이 샀고, 진보는 그가 케인지언이라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그가 총리직을 맡고 정치적 인물이 되면서 양쪽에서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몰락한 충청도 양반가 막내아들
인간 정운찬을 이해하려면 그가 펴낸 <가슴으로 생각하라>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그는 몰락한 충청도 양반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곱살에 서울로 이사와, 끼니를 걱정하고 화장실도 여러 가구가 사용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가난 덕분에 그는 참 많은 축복을 스스로 만들었다. 10가구쯤 사는 집에 화장실이 한 개뿐이어서 편히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할 수 없이(?) 일찍 일어나 공부해서 좋은 성적과 학벌을 얻었고, 놀거리가 없어 동네야구를 하고 라디오로 미국 야구 중계를 들으며 야구와 영어실력을 키웠다. 고교 때부터 입주과외를 했는데 과외선생 선·후배가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한덕수 전 총리 등이다. ‘운이 가득찼다’는 이름처럼 어려운 고비마다 도움을 받았다. 도저히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공부를 잘해 친구 아버지가 스코필드 박사를 소개시켜 줘 장학금을 받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인 조순 전 총리는 미국 유학을 보내주고, 반대하는 처가를 설득해 결혼을 할 수 있게 했다. 김종인 박사는 민주화 선언으로 서울대 교수 자리에서 ‘잘릴’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줬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교과서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성공한 그는 서울대 총장에 취임한 후 지방 학생들을 위해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하고, 각종 장학금을 확대하는 데 앞장섰다. 겸손하고 검박한 자세는 유명하다. 서울대 총장과 총리 재임시 비서나 운전기사, 식당 종업원들에게도 늘 경어를 써 주변을 놀라게 했다. 퇴임 후엔 자가용 대신 택시나 지하철을 탄다. 친화력과 적응력도 놀랍다.

장점이자 단점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가장 폭넓은 분야의 사람과 소통이 가능한 사람’으로 그를 평가할 만큼 다양한 이들을 격의없이 만나지만 그 때문에 “왜 저런 사람과 친할까?”란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와 식당에서 만나 악수만 나눈 정치인들이 다음날 기자를 만나 “심도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전하고 한두 번 만난 여성들이 “나와 친하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2002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이 정운찬 서울대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경향신문

2002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이 정운찬 서울대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경향신문

정운찬 위원장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술을 별로 마시지 않던 그는 군사독재 시절, 시대의 아픔을 동료 교수들과 술을 마시며 풀다 이제 ‘주(酒)와 함께 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단골집은 자택 인근 서초구 방배동의 카페들. 술마실 때도 “오늘은 손님이 너무 적네,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을 해 경제학자답다는 말을 듣는다. 술값을 가급적 본인이 내는 것도 그의 소신이자 습관이다. 단골도 두세 군데를 정해서 공평하게 번갈아 다닌다.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항상 따라 다닌다. 어린 시절, 그의 과외 제자이자 가장 열렬한 지지자인 심실 우크라이나문화원 원장은 “예쁜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있나? 정 위원장은 내숭 떨지 않고 ‘참 아름다우시군요’라고 말할 뿐이다. 물론 며칠 후 다른 장소에서 만나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서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긴 하지만…”이라고 전한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장점이자 단점
개인적으로 정운찬 위원장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그가 가장 고통을 겪은 황우석 교수 사태 때다. ‘국민 과학자’로 영웅 대접을 받던 황 교수가 사기꾼으로 몰리게 된 상황에서 황 교수 지지자들은 당시 서울대 총장이던 그를 비난하고 심지어 차 앞에 드러눕거나 화형식까지 갖는 등 물리적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 CIA가 황 박사의 논문 공동참여자인 셰튼 박사와 그에게 100만 달러를 주면서 황 교수를 그만두게 했다는 등의 유언비어까지 나돌 때였다. 그런 오해나 위협을 받지 말고 총장직을 사퇴하라는 권유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서울대 진상위원회에 검증을 맡겼으니 그의 논문에서 왜곡·과장 여부를 증명받는 게 중요하죠. 그만두면 나야 홀가분해지지만, 총장 선거도 다시 치러야 하고 다음 총장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할텐데, 그런 부담을 줘서도 안 됩니다. 총장 취임 때 약속도 임기를 지킨다는 거였고요. 어떤 욕을 먹어도 순리대로 절차를 따르고 제가 책임질 겁니다.”

정 위원장과 그 가족이 가장 상처를 받았던 일은 총리 청문회 때다. 청렴하고 고결한 학자 이미지로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부터 한국은행 총재, 총리로 거론되던 그가 청문회장에서 만신창이가 되자 그를 지지하던 이들은 안타까워했다.

“(청문회를 마치고) 집에 가니 온 식구들이 저를 붙잡고 울더군요.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총리실 기존 직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준비한 것이 너무 미비하고 미흡했던 게 사실입니다. 아직도 731부대를 모른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군대 기피한 것으로 오해를 받는데, 그 자리에 서면 정말 질문이 잘 들리지도 않아요. 그런 자리에서 태연한 분들이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최근에 다시 재·보선은 물론 차기 대권 잠룡으로도 거론되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순진한 사람이 또 망가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뜻밖에 내공이 깊어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들어와 정치풍토에도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화가인 부인 최선주씨와 연애 시절 500통의 러브레터를 보냈을 만큼 로맨티스트이고 야구 해설 방송을 할 만큼 야구광인 그가 연애편지 쓰듯, 야구하듯 아름답고 통쾌하게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스승인 조순 선생이 ‘절대로 절대(정치 안 한다)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며 자신의 행보에 대해 말을 아낀다. 선생님 말 잘듣는 착한 소년이어서인가, 진짜 여우여서일까….

<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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