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짝사랑’ 수줍은 고래에 바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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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해외 방랑기 ‘아이슬란드 후사비크’

후사비크에는 가로등에 점점이 불이 들어오는 저녁 무렵 도착했다.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7년 전에도 후사비크에서는 민박집에 묵었다. 창틀에 올려놓은 가족들의 사진과 꽃 화분을 보니, 아무래도 이 집이 그때 그 집 같았다. 창틀을 식탁삼아 도너츠와 커피를 먹은 기억이 났다. 골목에 나와 보니 그러나 집집마다 창틀에 화분이 올라와 있었다. 분필로 현관문에 ‘X’ 표시라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할 즈음 주유소와 편의점이 나왔다. 분필은 없었고, 콜라와 ‘바이킹’ 맥주 한 캔을 샀다.

[최명애의 북위66.5도]⑤ ‘짝사랑’ 수줍은 고래에 바람맞다

후사비크엔 고래를 보러 온 길이었다. 예전부터 고래가 보고 싶었다. 누구는 현빈을 좋아하고, 누구는 2PM을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나는 고래가 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범고래 오르카면 좋을 것 같았다. 몸에 흰 얼룩이 있고, 지느러미가 우뚝한 대형 고래다. 영화 <프리윌리>의 그 고래인데, 주연 고래 케이코의 고향이 바로 아이슬란드다. 영화 속 윌리는 방파제를 뛰어넘어 자유를 얻었지만, 현실 속 케이코는 영화 촬영 후 동물쇼를 하러 수족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황당한 아이러니에 전세계가 ‘프리 케이코(케이코를 풀어주세요)’ 캠페인을 벌였고, 케이코는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어려 아이슬란드 앞바다에서 잡힌 뒤 평생을 수족관에서 보낸 케이코는 야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만 인간을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코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두 달 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고 헤엄을 쳐 북극해를 건너 노르웨이로 갔다. 그리고 며칠을 시름시름 앓더니 죽고 말았다. 후사비크 고래 박물관에는 케이코의 안타까운 사연이 패널로 전시돼 있었다.

낡은 포경선 개조 고래관광선 변신
고래 관광선은 이틀 뒤에야 탈 수 있었다. ‘미리 공부를 하고 가겠다’며 고래 박물관에서 종류별 고래 골격과 고래의 한 평생과 중세 괴물과 현대 고래의 대차대조표까지 꼼꼼히 읽고 매표소로 갔지만, 후사비크 제 1의 고래 관광 여행사 ‘노스 세일링’은 “날씨가 개야 표를 판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아이슬란드에서 보이는 다양한 고래들’ 티셔츠를 사고, 길 건너 일반 기념품 가게로 건너가 ‘웨일 와칭 가이드’(Whale Watching Guide)를 훔쳐보고, 텅 빈 성당에 들어가 ‘고래 보게 해 달라’며 간절히 기도까지 올렸지만 후사비크 제 2의 고래 관광 여행사 ‘젠틀 자이언트’는 “사람도 없고 고래도 안 보이니 내일 다시 오라”며 매정하게 셔터를 내렸다.

고래탐조선이 출발하는 후사비크 부두.

고래탐조선이 출발하는 후사비크 부두.

고래가 꽤 잘 보이는 아이슬란드에서도 고래 관광 하면 후사비크다. 아이슬란드 고래 관광의 90%가 여기서 이뤄지고, 고래 관광객의 95%가 고래를 본다. 후사비크는 한 때 아이슬란드 11개 포경 기지 가운데 가장 고래를 많이 잡던 곳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고래 관광으로 돌아섰다. 제 1의 여행사 ‘노스 세일링’도 공공연하게 포경에 반대하며, 수익금의 일부를 국제 고래 보호 프로그램에 기부한다. 바로 그 여행사의 탐조선을 다음날 아침 탔다. 역시 친환경 업체답게 낡은 포경선을 개조해 탐조선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나눠준 방한복도 솜이 삐져나오고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었다.

2시간을 꼬박 망망대해를 떠돌았으나, 고래는커녕 생선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많다는 포포이스 돌고래도, 파일럿 고래도, 관광객 앞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른다는 혹등고래도 모두 파업 중이었다. 눈이 빠질 때쯤 되자 머리에 빙하를 인 먼 산도 오르카처럼 보였다. 심심한 갈매기들만 배를 따라 날아오다 수면 위로 내려앉았다. 새우깡이 없어 아쉬운 대로 아이슬란드 초코바 ‘니짜’를 흔들어봤지만 갈매기들은 코웃음만 쳤다.

고래 목격 확률 95%라는 주장이 한국 기상청의 일기 예보 적중도 90% 주장과 비슷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당사자의 주장과 일반인의 체감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디든 한 방울이라도 비가 오면 예보가 맞은 것처럼, 고래의 등짝이든 지느러미든 물줄기든 뭔들 한번 어렴풋하게라도 보이면 고래를 본 거다. 그러나 이대로는 고래 그림자도 보기 어려워 보였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갑판 아래 선실로 내려가 어깨를 기대고 잠시 졸았다. 고래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고래를 찾고 있는 후사비크 고래 탐조선.

고래를 찾고 있는 후사비크 고래 탐조선.

“3시 방향!” 마스트에서 망을 보던 가이드가 손까지 뻗으며 외쳤다. 겨울 아침 종각역 비둘기떼처럼 오종종 모여 떨던 관광객들이 일제히 3시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수면 위로 잠시 삼각형 모양의 지느러미가 보였다. 밍크, 였다. “11시 방향!” 관광객들이 일제히 반대쪽 갑판으로 뛰었다. 배도 덩달아 기우뚱거렸다. 그러나 고래는 이미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배 아래로 잠수해 유유히 사라졌을 것이다. 밍크 고래의 등짝 2초씩 두 번. 그것이 그날 우리가 본 고래의 전부였다.

내수용 고래 포경기지 ‘역겨운 냄새’
아이슬란드는 먹지도 않으면서 매년 100여마리의 고래를 잡는 대표적 포경 국가다. 주로 밍크를 잡아 일본으로 수출한다. 1986년 국제포경 모라토리엄에 따라 공식적으로 포경을 중단했지만 계속 잡았다 말았다 하다가 2007년 아예 ‘과학적 목적’의 포경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미 고래 관광으로 전환한 후사비크와 관광 업계와 전세계 여행자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더 많은 고래를 살려서 보여줘야 하는 고래 관광과 고래를 사냥해서 줄이는 포경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해 아이슬란드의 관광 수입은 감소했고, 정부는 ‘수출용 고래는 안 잡고 내수용 고래만 잡겠다’는 애매한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내수용 고래는 좀처럼 팔리지 않고 있다.

다음날 우리는 흐발 피요르드 포경 기지로 ‘잠입’했다. 현재 아이슬란드에서 유일하게 고래를 잡아서 해체하는 곳이다. 멀리 포경 기지가 보이는 곳부터 동물 기름을 3박4일쯤 끓인 것처럼 메스꺼운 냄새가 풍겼다. 이 기지는 1986년 포경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그린피스 활동가 두 명이 몰래 잠입해 포경선에 구멍을 내고 유유히 사라졌다. 혹시라도 붙잡혀 고문받다 차가운 레이캬비크 감옥에서 일평생을 썩게 될까봐 우리는 수백미터 거리에서 망원 렌즈로 몰래 사진을 찍고, 붙들리면 “가이드북에 있어 신기해서 와 봤다”고 명랑하게 말하기로 입도 맞췄다. 자연스러운 관광객처럼 보여야 한다며 해체장을 배경으로 차례로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이 기지는 그 뒤로도 보안에 있어 별 반성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장 앞마당의 직원은 우리를 흘낏 보더니 호스로 물을 뿌려 바닥을 쓸어냈다. 분홍빛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고래였다. 혹시라도 어제 우리 배 밑을 지나갔던 그 밍크일까. 그 아이의 친구나 동생은 아닐까. 바람에 진한 비린내가 실려와 한 손으로 다시 코를 움켜쥐었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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