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리운 고향의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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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는 허름하게 변해 있고, 울타리는 아주 초라하게 쓰러져 있어야만 옛집이 아름답게 보인다네. 거기에는 잔주름 같은 거미줄과 무성한 세월, 잡초들도 언제나 제 목소리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이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으면 옛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네. 그 시절의 장독대, 창문, 뒤란, 웃음소리…. 그러나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 -김영남 ‘그리운 옛집’ 중에서

선병국고가

선병국고가

길 위에 서면 집이 그립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내 길이 그리웠다. 떠나고 돌아오는 곳, 집. 그 중 더 오래기로는 옛집이고, 종내는 고향이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설, 사람들은 고향을 찾으리라. 마땅히 돌아갈 고향이 없거나 고향이 있더라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마음으로만 옛집을 그리워하리라. 비록 내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더라도 옛집에는 고향의 자취가 묻어 있다. 눈 내리는 삼남(三南), 시간을 거슬러 옛집을 찾아가는 길.

보은 선병국 가옥 선을 행하는 즐거움
선병국 가옥은 조선 후기 전남 고흥을 본향으로 일대 치부를 이룬 보성 선씨 가문이 1919년부터 1921년까지 3년에 걸쳐 지은 99칸 집이다. 당시 가문을 이끌던 선정훈은 명당자리를 찾아 전국을 뒤진 끝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인 이곳에 터를 잡고 당대의 제일가는 대목들을 불러들여 융숭히 대접을 하며 집을 지었다. 개화기에 지어진 이 집은 전통가옥의 형태를 갖추면서도 시대 변화에 따른 건축기법의 변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선병국 가옥이 사랑스러운 것은 단지 집의 외형이 아니라 집에 담긴 사람의 마음 때문이다. ‘위선최락(爲善最樂·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을 가풍으로 삼았던 이 집의 주인은 99칸에 33칸을 덧대어 ‘관선정(觀善亭)’이란 이름의 서당을 열고 방방곡곡의 인재들을 모아 무료로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가문에 딸린 소작농들에게 아낌없이 선정을 베풀어 마을사람들이 그 은덕을 기리는 시혜비를 세우기까지 했다.

운조루

운조루

인재를 모아 가르치던 전통은 고스란히 이어져 곳간채를 개조한 고시원이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그동안 이 집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에 이르고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 몇 년 전에는 이 집의 간장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씨간장을 부어 만든 덧간장 1ℓ가 ‘350년 묵은 간장’이라 하여 한국골동식품예술전에 초대되었다가 한 대기업 회장집에 무려 500만원에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병국 가옥은 오랜 전통으로 해서 아름답고, 그 전통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사랑스럽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을 기본으로 대문채, 행랑채 등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인 ‘도솔천’은 다향이 그윽하고, 안채와 행랑채는 문향으로 가득하다. 집을 둘러치고 있는 흙돌담은 화사한 황톳빛으로 아늑하다. 무엇보다 솔밭에 자리잡은 효열각과 시혜비는 마치 이 집의 정신과도 같은 곳으로 늘 서늘하고 우뚝하다.

선병국 가옥이 자리한 장안면 개안리는 예전에 외속리면 하개리로 불리던 곳으로 속리산의 남쪽자락에 해당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물은 삼가저수지에서 잠시 제 몸을 가두었다가 삼가천으로 흐르며 장안면에서 경치 좋은 서원계곡을 이룬다. 서원리에는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인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정이품송과 같은 수령 600년 정도의 이 소나무는 정이품송이 한 줄기로 곧게 자란 데 비해 중간에 두 줄기로 갈라진 암소나무 형국으로 정부인 대접을 받는다. 정이품송이 병고에 시달려 고사 직전인 데 비해 서원리 소나무는 여직 생생하기만 하다. 천연기념물 352호로 지정되어 있고, 해마다 정월 초이튿날이면 마을사람들이 제를 올린다.

주소: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구례 운조루 ‘타인능해’의 뒤주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도연명 ‘귀거래사’ 중에서

운조루는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다. 1776년에 당시 낙안군수이던 유이주가 지었다. 운조루가 자리한 오미동(五美洞)은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구몰니(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의 3대 진혈을 지닌 명당터로 ‘구만들’이라는 너른 들을 품고 있다. 유이주가 이곳에 집터를 잡을 때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지리산 자락을 휩쓸고 지난 숱한 변란 속에서도 운조루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역시 단지 명당터여서가 아니라 그 집을 지켜온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었다.

운조루의 곳간채에는 원통형의 뒤주가 놓여 있다. 이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말 그대로 ‘누구나 열 수 있는’ 이 뒤주는 이 집의 주인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다. 쌀 세 가마니가 들어가는 이 뒤주에 쌀을 가득 채워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언제든 퍼가도록 했는데, 뒤주를 주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외진 곳에 두어 쌀을 얻으러 온 사람들이 계면쩍어 하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운조루에서는 한 해 대략 200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때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 마을사람들 또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이 뒤주의 사용을 가급적 억제함으로써 집주인의 마음에 부응했다.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인 운조루는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과 마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 앞에는 연못을 파고 그 주위에 온갖 화초를 심어 계절의 변화를 담도록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에는 특이하게 짐승의 뼈가 걸려 있다. 원래 벽사의 뜻으로 호랑이 머리뼈가 걸려 있었지만 도난을 당한 후 말 머리뼈로 대체했다고 한다. 무관이었던 유이주가 어린 시절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와 함께 이 집의 위엄을 알리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마당에서 높은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통하는 길목은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오르막길로 만들어져 있어 이 집의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사랑채의 툇마루 아래에는 옛날에 쓰던 수레바퀴가 고즈넉이 놓여 있어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불에 그을린 허삼둘가옥

불에 그을린 허삼둘가옥

운조루에서 섬진강 자락을 따라 내려가면 화개장터를 지나 평사리가 나온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다. 작가는 ‘토지’의 무대로 평사리를 선정한 이유를 경상도 출신인 자신이 소설 속 인물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서 경상도 이외 다른 지방의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만약 작가가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토속어를 구사할 줄 알았더라면 ‘토지’의 무대는 어쩌면 운조루가 있는 토지면 오미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평사리와 최참판댁과는 또 다른 연면한 삶의 역사가 펼쳐졌으리라. 게다가 ‘토지면’ 오미리라니(물론 ‘土地’면은 아니지만).
주소: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함양 허삼둘 가옥 그리운 살림의 풍경
참으로 사랑스런 집이었다. 비록 사람의 온기가 끊긴 뒤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옛 살림의 속내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런 집이었다. 함양 허삼둘 가옥. 우리 고가(古家) 중 아마도 유일무이하게 안주인의 이름을 딴 특이한 이 집은 2004년 두 차례의 화재로 새까맣게 그을리고 말았다. 그즈음 함양 안의는 유독 화마에 시달렸다. 화림동계곡의 농월정이 전소되었고, 안의에서 함양 가는 길목의 정여창 고택도 일부가 소실되었다. 모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었다.

안의는 물이 많은 고장이다. 화림동계곡의 남계천을 비롯해 지우천, 신안천, 귀곡천 등이 흘러들어 남강을 이룬다. 수기(水氣)가 많은 탓인지 예로부터 음기(陰氣)가 센 곳으로 알려져 왔다. 옛 이름이 안음으로, 이웃 산음과 함께 ‘음’자 지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영조 4년(1767) 산음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는 고약한 일이 일어나자 음기가 너무 센 탓이라며 산음을 산청으로, 안음을 안의로 개명했다. 그런 안의가 일시에 덮쳐든 화기에 시달린 사실은 짐짓 아이러니하다.

허삼둘 가옥이 이 땅에서는 드물게 ‘페미니즘적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집안의 속내와 관련이 있다. 이 집은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인 허씨 문중에 장가들면서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이다. 어쩌면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을 안주인의 이름을 붙인 것 말고도, 집의 구조도 그때까지의 사대부집 사랑채 중심 구조가 아닌 안채의 편리성 위주로 지어져 특이하다. 이는 갑오개혁 이후 변화된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 헤게모니가 어떠하든 허삼둘 가옥은 권위를 내세우는 전통 양반가옥과는 달리 여성의 동선을 우선으로 고려한 가옥 배치로 새삼 눈길을 끈다.

운조루의 솟을대문에 걸린 동물뼈.

운조루의 솟을대문에 걸린 동물뼈.

그 중 백미는 ㄱ자로 꺾인 안채 모서리에 배치한 부엌이다. 양쪽 마루를 통해 곧장 부엌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통로를 냈고, 꺾인 부분에 선반과 시렁을 설치해 가사활동에 편리한 수납공간으로 활용했다. 오방형의 부엌 안은 기둥만 두 개 서있어 공간이 보다 넓어 보인다. 부엌을 중심으로 안채의 한쪽은 사랑채로, 다른 한쪽은 곳간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집안 살림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과이다. 비록 갖가지 모양의 창살로 호사를 부리고, 과도하게 높은 솟을대문으로 권위를 내세우려 한 점도 엿보이기는 하지만, 허삼둘 가옥의 미덕은 살림을 배려한 집으로서 이미 그 가치가 남다르다.

그런 사랑스런 집이 새카맣게 그을린 채 흉물처럼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퇴락한 마루하며 무너진 장독대, 방초만 무성한 마당은 우리 마음의 풍경인양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다시 마루에 매끄러운 윤기가 돌고, 시렁 위에 살림살이가 가지런하고, 장독대에 마당에 사람의 온기가 문득 되살아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세월의 흐름 속에 더욱 절실해지는 그리움 때문이다. 고향 그리고 집, 잊히지 않는 삶의 추억 때문이다.

주소: 경남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196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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