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 대한’ 중흥의지와 분단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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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제국의 구원’ 염원 내포… 해방 후 ‘대한’과 ‘조선’의 병립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근래처럼 높은 시기는 없는 것 같다. 항상 근엄한 관치(官治)의 세계에서 군림하던 대한민국은 한·일 월드컵 이후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적 애칭을 얻었다. 대한민국의 현행 영어 표현 Korea가 본래 Corea였는데 모종의 음모로 인해 영어 알파벳 첫 글자가 바뀌어버렸다는 주장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가 하면,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건국기념역사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넓게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감 또는 자존감을 발견해 나가는 다양한 차원의 심리적 표현으로 보인다.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원구단). 일제는 이를 헐어버리고 1914년 조선호텔을 세웠다. |경향신문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원구단). 일제는 이를 헐어버리고 1914년 조선호텔을 세웠다. |경향신문

21세기 ‘대~한민국’의 재발견
21세기 국내에서 대한의 재발견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앞두고 임시정부의 국호로 대한민국이 가결되었을 당시 의정원 내부에서는 ‘대한은 조선왕조 말기 잠깐 쓰였다가 망한 이름’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1948년 7월 1일 제헌의회에서 38선 이남의 단독 정부의 국호를 결정짓는 투표를 진행했을 당시 고려나 조선을 선택한 표들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논자에 따라서는 한이라는 이름이 역사적으로 한반도 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을 통칭하는 것으로 짙은 반도적 성격을 내포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웅건한 고구려 정신을 포기하고 모화주의에 빠져버림을 뜻하는 것이라고 극언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대한이라는 이름을 처음 우리나라의 국호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인물은 조선 임금 고종이었다. 그는 국체를 일신하여 제국의 새 아침을 열면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으로 고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고종은 과연 고구려 정신에 반감을 품고 반도적 성격의 국가를 지향했던 것일까? 고종이 왜 신생 제국의 이름을 대한으로 정했는지는 1897년 10월 13일 그가 내린 조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 최초의 조선 임금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은 어디까지나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기 때문에 대한의 첫 번째 임금은 다름 아닌 태조 이성계였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 시기 정장을 한 고종황제. | 너머북스 제공

대한제국 시기 정장을 한 고종황제. | 너머북스 제공

고종은 이렇게 말한다. 고려와 조선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고려가 마한, 진한, 변한, 즉 삼한을 모두 통합한 최초의 국가였다면, 조선은 고려의 판도를 더욱 확장하여 북으로 말갈 땅과 남으로 탐라 땅을 모두 흡수하여 4000리 땅에 ‘일통(一統)’의 대업을 세운 국가였다고. 즉 조선은 기존의 삼한의 영역에다 말갈과 탐라까지 포함한 천하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갖추고, 그러한 천하에 ‘일통’의 질서를 구현한 사실상의 제국이었다고. 따라서 제국을 처음 개창한 인물은 태조 이성계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고종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 위태로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독립자주를 쟁취한 임금으로 묘사된다. 태조가 일으킨 제국을 중흥하여 독립자주의 새로운 반석을 놓았다는 의미이다.

대한이라는 국호의 참뜻은 이런 시각에서 다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비밀을 푸는 열쇠는 대한이라는 국호와 함께 고종이 천명한 광무(光武)라는 연호이다. 중국사에서 보면 유방이 세운 한(漢) 제국이 중간에 왕망의 찬탈로 혼란을 겪었는데 혼란을 평정하고 한 제국을 회복한 유수를 광무제라고 불렀다. 광무제는 한 제국을 난세에서 구원하여 중흥시킨 황제인 바, 유방이 한의 창업자로 전한의 첫째 황제라면 유수는 한의 중흥자로 후한의 첫째 황제였다. 고종이 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를 연호로 삼은 것은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의 난세를 헤치고 나와 조선을 중흥시킨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후한의 첫째 황제 광무제에 비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이라는 국호는 고종의 이런 마음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고대 유교문명의 정통성을 지닌 기자조선의 마지막 임금 기준이 위만의 공격으로 시련을 겪지만, 그가 조선 영지에서 탈출하여 배를 타고 남행해서 새로 정착한 후 삼한을 열어 주었을 때, 그것은 기자조선의 중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찬가지로 기자조선을 중흥한 것이 삼한이듯 조선을 중흥한 것은 대한이라는 역사의식이 도출될 수 있었다. 고종이 그토록 희구했던 것은 국가의 중흥이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의 몸체 바닥면. 이 국새는 전체 높이 4.8㎝에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려 있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경향신문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의 몸체 바닥면. 이 국새는 전체 높이 4.8㎝에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려 있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경향신문

그러나 대한의 새 국호에 담긴 고종의 꿈은 곧 사라져버렸다. 대한제국의 천하는 13년이 채 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제일 먼저 이 땅의 이름부터 조선으로 바꾸었고, ‘조선’총독부를 세워 식민지에서 대한의 흔적을 말살하였다. 3·1운동 당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총독부가 강요하는 조선에 맞서 대한을 광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제국 대한의 빛바랜 기억이 감퇴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현실에 입각한 사회운동이 확산되었다. 일제식민지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이 출현한 것은 이념의 차이 못지않게 운동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한’과 ‘조선’의 분기는 급기야 해방 후 남북 분단의 조건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 국가가 병립하는 형국을 낳았다. 현재 일본 동경대학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조선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우리말을 가르치는 사태가 발생한 것도 대한과 조선의 이와 같은 정치적 분기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다.

동경대학의 ‘한국조선어’ 생소한 명칭
‘한국조선어’라는 단어는 남북을 모두 통틀어 한국 또는 조선이라 인식하는 남북 쌍방의 국어 생활에서 보면 낯선 광경이지만, 자칭이 아닌 타칭으로서 우리나라의 국호를 성찰할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 본다면 그만큼 귀한 경험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색적인 단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다. 하지만 남은 카드가 거의 없다.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나라 전체를 포함하는 국호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조선과 한이지만 이들 국명이 이처럼 분단 현실의 국명으로 이용되는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이 경우 동국(東國)이라는 말은 어떨까? 동국은 조선시대 일반적으로 사용된 우리나라의 자칭이었다. 후삼국시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궁예가 새로 일으킨 마진이란 국호가 바로 마하진단, 곧 대동(大東)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도 오스트리아의 국호 Osterreich는 동국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설날이 며칠 안 남았다. 음력 새해를 시작하는 새로운 기분으로 대한이라는 국호의 자칭에 대한 과잉의식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대한이라는 국호의 타칭에 남아있는 남북 분단의 현실을 성찰해본다.

노관범<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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