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주권의 새 전기 ‘울릉도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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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고종이 감찰사에게 사명 부여 ‘조선이 관리’ 천명

동아시아 지역에서 도서 분쟁이 심상치 않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 북방 5개 섬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 난사군도를 둘러싼 중국과 아세안의 갈등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 치라도 더 바다를 확보하려는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해양 주권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만 간다. 하지만 단지 바다를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다에 새겨진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특히 동해 바다는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역사적인 갈등과 욕망이 표출된 곳이기에 그 교훈적 성격이 크다 할 것이다.

1980년대 울릉도 저동항의 모습.

1980년대 울릉도 저동항의 모습.

우리나라 동해는 예로부터 깊고 신비한 바다였다. 고구려의 동해는 고래와 용왕의 바다였다. 고구려 민중왕 때 동해 사람 고주리는 임금에게 고래를 헌상하였다. 고구려 보장왕 때 선도해는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고구려 민간에서 회자되던 동해 바다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토끼로 상징되는 일반 고구려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별천지가 동해에 있었고, 그곳의 주인은 용왕이었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 복속시켜
신라의 동해 역시 신비한 곳이었다. 동해에서 큰 물고기가 나왔다, 큰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중요한 사건으로 종종 등장하였고, 이따금 동해 빛깔이 붉게 변하고 핏빛으로 변한 일도 역사 기록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서울이 동해와 가까운 경주에 있었던 까닭에 신라의 동해는 고구려의 동해와는 다르게 임금의 사연이 더 많은 바다였다. 문무왕은 유언에 따라 동해 큰 돌 위에 장례를 치렀고, 효소왕은 유명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졌다. 동해 바닷가 감은사를 향해 떠다니는 신비한 작은 산에 올라 대나무를 베어 만든 피리 만파식적 이야기는 동해 바다가 신라의 보고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울릉도가 한반도에 정치적으로 연결된 것은 이렇게 동해가 신라의 특별한 바다가 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신라 장군 이사부는 울릉도에 출정해서 나무 사자를 풀어놓겠다고 위협하여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이후 한반도의 주인이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면서 우산국은 다시 고려의 속령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 현종 때 동북 여진족이 동해를 건너 잇달아 울릉도를 침입하자 많은 우산국 주민들이 울릉도를 탈출하면서 울릉도는 빈 섬으로 변해 갔다. 고려 의종 때 울릉도에 주현을 설치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현지 조사 결과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785년 일본의 지리학자가 만든 조선팔도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본토와 같이 노란색으로 그려져 독도가 조선 땅임이 명시돼 있다. | 연합뉴스

1785년 일본의 지리학자가 만든 조선팔도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본토와 같이 노란색으로 그려져 독도가 조선 땅임이 명시돼 있다. | 연합뉴스

울릉도의 상황은 조선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려 말기부터 왜구가 극성을 부림에 따라 연안의 섬을 전략적으로 비우는 공도 정책이 계속 이어졌다. 국가에서 울릉도를 관리하는 방법은 조선의 어민들이 울릉도에 몰래 숨어들지 않도록 적절히 관리하고 잠입자가 있으면 쇄환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강한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형식적인 관리는 사실상의 방치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울릉도는 거의 언제나 조선 어민들이 숨어들어 벌목하고 어로하는 섬이었으며, 여기에 일본 어민들이 가세하여 섬의 정체성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조선의 울릉도 정책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 어민을 울릉도에 못 오게 단속하는 소극적인 관리로는 일본 어민을 섬에서 퇴치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낼 수 없었다. 1882년 마침내 고종은 기존의 소극적인 울릉도 정책을 혁신하는 새로운 국가 정책을 준비하였다.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인이 울릉도에서 불법으로 벌목하여 부산과 원산의 개항장으로 보내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4월 7일 고종은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을 불러 막중한 사명을 부여하면서 울릉도에 고을을 두어 직접적으로 국가가 경영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한국 해양정책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규원은 서울을 출발, 평해에 도착하여 바람을 기다렸다. 4월 29일 오전 10시, 그는 출발 전 마지막 보고를 마친 후 배에 올라탔다. 세 척의 배는 4월 30일 오후 6시 울릉도 서쪽 포구 소황토구미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이규원 일행은 울릉도 답사에 착수하였다. 엿새에 걸친 육로 답사 끝에 울릉도가 서쪽 소황토구미에서 중앙 나리동을 거쳐 동쪽 저포까지 60리, 북쪽 왜선창에서 중앙 나리동을 거쳐 남쪽 통구미까지 50리 되고, 나리동에 수천 호 정도 되는 인원이 거주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5월 10일 이규원은 선편으로 울릉도 연안을 답사하는 도중 일본 선박을 발견하였다. 즉시 해안에 상륙한 그는 일본인 막사에 들어갔다. 동래 통사가 없었기에 대화는 필담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2년 전부터 울릉도에서 벌목을 시작했으며, 일본제국지도에서 송도(松島)라고 부르는 섬이 바로 이 섬인 줄 알았다고 답하였다. 이규원은 물었다. “이 섬의 이름은 울릉도(鬱陵島)다. 고려가 신라로부터 이 섬을 받았고, 우리나라가 고려로부터 이 섬을 받았다. 수천 년을 전해 온 강토이거늘 너희들이 송도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냐?” 그는 일본인과 나눈 문답을 <울릉도검찰일기>에 자세히 적었다.

개화파 김옥균에 ‘여러 섬 개척’ 부여

1970년 독도·울릉도 위문 시찰단이 경찰들에게 태극기를 건네면서 악수하는 모습. |경향신문

1970년 독도·울릉도 위문 시찰단이 경찰들에게 태극기를 건네면서 악수하는 모습. |경향신문

6월 5일 고종은 이규원의 복명을 받고 울릉도의 현황을 파악하였다. 곧이어 터진 임오군란의 여파로 해를 넘긴 고종은 1883년 3월 16일 개화파의 샛별 김옥균에게 ‘동남의 여러 섬을 개척하고 겸하여 고래잡이를 관장하는 일’을 맡기고 백춘배를 종사관으로 삼아 울릉도 개척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람들을 차출하였고, 나리동을 중심으로 농업 경경을 위해 곡식과 가축까지 울릉도로 갖고 갔다. 울릉도에 개척민이 등장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섬을 비우는 정책에서 섬을 개척하는 정책으로 울릉도 정책이 전환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고종이 김옥균에게 울릉도의 개척이 아니라 ‘동남 여러 섬’의 개척을 부여한 뜻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규원을 울릉도로 보낼 때부터 고종의 관심은 울릉도 하나가 아니었다. 고종은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되고 있는 울릉도 옆의 다른 섬들의 실체까지 모두 조사하기를 원하였다. 결과적으로 이규원의 활동은 울릉도에 국한된 것으로 끝났지만, 고종은 김옥균에게 개척의 사명을 부여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개척의 대상이 울릉도를 넘어서는 것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최근 대한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울도군절목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있어 화제다. 또 독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과 일본 경비정이 대치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와 연초부터 동해 문제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오늘날 동해 문제의 핵은 독도이지만, 독도에 관한 국가적인 관심조차 실은 울릉도가 개척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울릉도가 개척되기까지의 오랜 역사를 돌아보며 해양 주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노관범<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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