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열차로 간 황제의 남방 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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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중 처음으로 직접 백성과 만나 신년 메시지 설파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반추하는 새로운 연재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국사학을 전공한 가톨릭대 노관범 교수가 현재의 모습과 유사한 역사속 사건을 발굴해 매주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1909년 1월 조선 개국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종황제가 마산을 방문해 1년 후의 한일합방을 예고했다. 사진은 마산 방문 직전 부산을 방문한 모습으로 마산방문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내걸려 있어 당시 정세를 보여준다. |연합뉴스

1909년 1월 조선 개국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종황제가 마산을 방문해 1년 후의 한일합방을 예고했다. 사진은 마산 방문 직전 부산을 방문한 모습으로 마산방문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내걸려 있어 당시 정세를 보여준다. |연합뉴스

신년이 시작되었다. 신년의 시작은 천시(天時)의 시작인 동시에 인사(人事)의 시작이다. 신년 초에 국민들에게 전해지는 대통령의 신년사는 국가 지도자와 일반 국민 사이에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신년 메시지를 들으며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을 걸어나갈지 예측하고 그 안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옛날에도 그러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보통 정월 초하루 조선팔도에 윤음을 내렸다. 유교적인 민본사상에 입각한 권농윤음이 대부분이었다. 권농윤음은 국왕의 유교적인 애민정신을 발휘한 연례적인 신년사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왕 중에 신년을 맞이하여 먼 지방에 순행하여 직접 백성들과 만나 신년 메시지를 설파한 이가 있어 주목된다. 그는 누구였을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었다.

1909년 1월 7일 목요일 오전 6시 40분 순종 황제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종로를 지나 덕수궁에 들러 고종에게 문안을 드린 황제는 7시 30분 덕수궁 대한문을 나와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남대문역 주변에는 정부 관료와 사회 인사, 관립·사립학교 학생들이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8시 10분, 황제는 환송을 받으며 궁정열차에 탑승하였다. 6박 7일로 예정된 남방 순행의 시작이었다. 순행의 목적지는 대구, 부산, 마산 등지였다.

2007년 5월에 열렸던 ‘일제침략시대’ 특별 사진전에 최초 공개됐던 순정황제 일본 방문 사진. 이 사진은 그동안 공개 불가 상태로 외국 자료실에 보존돼 온 것을 사진 연구가 정성길씨가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수집한 귀중한 자료다. |연합뉴스

2007년 5월에 열렸던 ‘일제침략시대’ 특별 사진전에 최초 공개됐던 순정황제 일본 방문 사진. 이 사진은 그동안 공개 불가 상태로 외국 자료실에 보존돼 온 것을 사진 연구가 정성길씨가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수집한 귀중한 자료다. |연합뉴스

황제의 남방 순행은 전례가 없었으며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가까운 과거인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국왕이 도성 밖을 나와 행차하는 경우 그것은 왕릉에 가는 능행이나 온천에 가는 온행 정도였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기호 지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순행이 아닌 피난의 경우에도 경상도 남해안까지 행차했던 국왕은 일찍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거기까지였다.

황제의 남방 순행은 비밀리에 계획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이유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반일 의병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한국의 민심을 진정시킬 묘안을 강구하였다. 어떻게 하면 일본이 친밀한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한국을 문명국으로 인도하는 ‘시정개선’을 하고 있음을 한국인에게 홍보할 수 있을까? 만약 황제가 지방을 순행하며 민심을 진정시키고 통감부의 ‘시정개선’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으로 좋은 이벤트는 없었다.

오전 8시 10분에 출발한 열차가 대구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25분이었다. 이에 앞서 중간에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이 편안한지 살핀 경기도 관찰사가 열차에 탑승해 황제에게 두 능이 모두 편안함을 보고하였다. 성환역에서 서양 요리로 점심 식사를 마친 황제는 조치원역에서 충청남도·충청북도 관찰사의 환영을 받았다. 조치원역뿐만 아니라 열차가 정차하는 모든 역에서도 각지의 군수들과 학교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였다.

이윽고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대구역에는 태극기가 꽂힌 세 칸짜리 큰 녹문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다. 경상북도 관찰사를 필두로 각 관아의 관리, 각 사회단체의 대표, 일본 적십자사 사원, 애국부인회 회원, 한·일 학교 학생들이 정거장에 모여 황제를 환영하였다. 대구 시가지에는 폭죽 소리와 제등 행렬이 가득하였다.

대구관찰부에 행재소를 잡은 황제는 행재소에서 대구의 일반 관리들의 알현을 받았고 관찰사로부터 지방 정황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다. 이날 저녁 황제는 공식적인 스케줄이 없었다. 하지만 이토는 관찰사의 초청을 받아 달성관에서 마련된 공식 연회에 참석해 일장 연설을 마쳤다. 한국인이 일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양국간 친목을 두텁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황제의 남방 순행의 하이라이트는 부산 순행(1.8~1.10)과 마산 순행(1.10~1.12) 일정 중에 있었다. 황제의 남방 순행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황제가 보낸 함대가 부산항과 마산항에 도착해 있었다. 황제는 부산과 마산 체류 기간 본국 관리와 기업가, 노인·효자·열녀는 도착 당일 잠깐 시간을 내서 만나 보았다.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일본 함대의 기함에 승선하는 일이었다. 부산에서는 일본 제2함대 오처호(吾妻號)에 승선하고 마산에서는 일본 제1함대 향취호(香取號)에 승선하였다. 기함에 마련된 오찬에 참석한 황제는 한·일 양국의 우의를 다지는 건배사와 함께 잔을 들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천황이 서명한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오른쪽) 원본 사진과 같은 날 대한제국이 반포한 순종황제의 조서(왼쪽). |연합뉴스

1910년 8월 29일 일본 천황이 서명한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오른쪽) 원본 사진과 같은 날 대한제국이 반포한 순종황제의 조서(왼쪽). |연합뉴스

황제가 부산에서 일본 기함에 승선하여 건배하는 동안 한국의 목선 50척이 일본 기함을 둘러싸는 돌발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황제의 남방 순행을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이토가 황제를 일본으로 납치하기 위해 함께 부산으로 떠났으며 부산항에 일본 함대가 정박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부산 시민들은 황제가 부산에 도착한 그날 밤 결사대를 조직해 부두를 지켰고, 이튿날 황제가 기함에 승선하자 목선으로 기함을 포위한 것이었다. 황제는 예정대로 기함에서 내려 그 다음 일정으로 상품진열소에 들렀다. 하지만, 부산 시민들로서는 황제를 구출하고 나라를 지켜낸 쾌거로 기억될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부산 시민들의 영웅적인 애국을 신문 지면에 크게 드러냈다.

12일 마산을 떠나 대구에 들러 달성학교와 봉원학교 학생들의 운동회를 관람한 황제는 13일 귀경 열차에 탑승하였다. 그런데 황제는 갑자기 도중에 대전역에서 하차하여 환영 나온 사람들의 알현을 받았다. 예정에 없는 깜짝 이벤트였다. 이때 전 참판 송도순이 조선시대 관복을 입고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진중하게 타일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시세의 변천을 따라야 마땅한데 오늘날과 같은 개혁의 시대를 만나 옛법을 고수해서야 되겠느냐고. 황제는 귀경한 다음에도 충청남북도에 조칙을 내려 충청도가 가장 실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완고한 사상 때문이라며 ‘시정개선’에 호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7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황제의 남방 순행은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한국인들이 단발을 한 황제의 모습을 보고 새 시대의 징표로서 단발 행렬에 동참하였다. 한국인이 의병의 세계관을 떠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지표였다. 그것은 이토가 바라는 대로 통감부의 ‘시정개선’에 동참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황성신문에서 감격해했던 것처럼 애국계몽으로 거듭나기 위한 문화적 결단일 수 있었다. 황성신문은 황제의 남방 순행 중에 유교 개혁을 제창하는 용단을 내렸다. 아울러 황제의 남방 순행은 황제의 축제인 동시에 백성의 축제이기도 하였다. 축제의 결과는 예기치 않은 소득을 올렸다. 먼 지방의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황제를 위하여 태극기를 흔들었고 황제폐하만세를 외쳤으며 심지어 일본 기함에 승선한 황제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일도 불사한 것이다.

황제의 지방 순행은 구정을 지나 1월 27일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경의철도로 떠나는 서방 순행이었다. 개성, 평양, 신의주 등지의 한국인들은 과연 황제의 신년 메시지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노관범<가톨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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