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소망, 상상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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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그려본 1975년의 서울

이번주부터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반추하는 새로운 연재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국사학을 전공한 가톨릭대 노관범 교수가 현재의 모습과 유사한 역사속 사건을 발굴해 매주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1970년대 서울 중구 무교동 거리.

1970년대 서울 중구 무교동 거리.

새해가 밝았다. 새로 얻은 탁상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정월에서 시작한 달력은 12월에서 멈춘다. 여기까지이다. 새해의 설렘이 미래의 이름으로 손짓하는 구간은 정해져 있다. 일상에서 감각하는 현실의 미래는 달력의 두께를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미래는 달력이 미치지 않는 곳, 상상의 저 편에 있다. 간절한 소망으로 불러보는 상상의 미래는 달력을 초월한 곳에서 신비한 형상을 꿈꾼다. 그것은 마치 마법의 옷장 속에 들어갔다가 만나는 신비로운 나라 나니아와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풍스러운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1975년 6월 어느 화창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집을 나선 제임스 스미스는 부산역에서 10시 30분 서울행 열차를 탔다. 중간에 대구, 대전, 수원, 영등포에서만 정차하는 급행 열차였다. 해질녘에 남대문역에 도착한 제임스는 쿠페를 타고 그랜드 호텔에 도착, 스위트룸에 짐을 풀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식탁 옆 자리에는 대학 동창 필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제임스와 필의 서울 관광은 이튿날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은 고풍스런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는데, 청계천 일대는 완전히 현대화되어 부유하고 값비싼 저택들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깨끗한 거리, 길가의 넓은 석재 보도, 소음이 없는 전기차, 가로수가 늘어선 한길, 아름다운 광장. 서울은 프랑스 파리보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제임스와 필은 서울의 주요 명소들을 탐방하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수요일엔 오페라 극장에 가 보았다. 종로 근처에 장엄하게 건축된 드 로리엥 극장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시팔이 공연되고 있었다. 객석에는 하얀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신사들이 앉아 있었고 부인들은 양쪽 박스 석에 앉아 자태를 숨기고 있었다. 서울 시민들의 오페라 관람 태도는 수준급이었다.

목요일엔 정부 청사에 가 보았다. 장엄한 광화문 앞의 육조 거리 양쪽에는 정부 부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국 전통 건축, 고딕 건축, 그리스 건축의 건물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궁궐 입구 바깥 오른편에는 회색 석재로 지은 고딕 양식의 국립 예배당이 있었다. 황제가 매일 아침 국무를 시작하기 전에 정부 관료들과 함께 봉헌 예배를 올리는 곳이었다. 왼편에는 적갈색 석재로 지은 로만 양식의 국무성 건물이 있었는데, 국민이 선출한 중추원 의원들이 국정을 토론하고 내각 장관들이 국정을 결정하는 곳이었다.

정부 부서 중에서 특히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곳이 교육부였다. 교육부의 어떤 방에 들어서서 특수 안경을 쓰고 튜브를 귀에 대면 전국의 모든 학교 교실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교육부는 이런 방식으로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정부 부서에는 단 한 사람도 빈둥대고 잡담하는 공무원이 없었다.

영인본으로 만들어진 <한국 평론>(Korea Review)(왼쪽). 이 책에 1906년 4월호의 목차(가운데)와 ‘1975년 서울 방문’이란 이야기(오른쪽)가 실려 있다.

영인본으로 만들어진 <한국 평론>(Korea Review)(왼쪽). 이 책에 1906년 4월호의 목차(가운데)와 ‘1975년 서울 방문’이란 이야기(오른쪽)가 실려 있다.

금요일엔 도서관에 가 보았다. 황실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을 방문했는데, 이들 도서관에 소장된 도서는 각각 백만 권 이상을 자랑하는 것이었고, 거기에 여러 가지 예술품과 자료들을 수집한 컬렉션이 있었다.

토요일엔 서울에서 규모가 큰 대학교 세 군데를 가 보았다. 제국대학교(The Imperial University),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 대동대학교(The Great Eastern University)가 그것이다. 이들 대학은 ‘먼저 주의 나라를 구하라’는 신성한 말씀에 기초하여 설립되었는데, 교양 교육과 국민성 형성에 있어 전국적으로 다른 대학들을 선도하고 있고, 극동에서 가장 크고 가장 모범적인 대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일요일엔 파크 애비뉴(Park Avenue) 교회에 가 보았다. 노트르담을 닮은 이 교회는 청계천의 부촌에 있었다. 교회 전체를 대리석으로 지었고 베네치아의 색유리로 고딕 창문을 꾸몄으며 교회 담장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나타냈다. 이날 교회 목사의 설교 주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리스도의 안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제임스와 필은 한국어를 모르지만 설교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신도 좌석에 앉아 좌석에 부착된 축음기를 귀에 대면 한국어 설교가 영어로 통역되어 들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 불어, 독일어의 다섯 가지 언어를 위한 통역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주권을 빼앗긴 국가의 70년후 미래
제임스와 필이 1975년 일주일간 서울을 여행한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대한제국기에 헐버트가 발간한 한국 평론(Korea Review) 1906년 4월호에 존 믹슨이라는 선교사가 게재한 것으로 원작의 이름은 「A visit to Seoul in 1975」이다. 영문으로 된 이 이야기는 4월호에 131쪽에서 140쪽까지 모두 10쪽으로 돼 있다. 1906년에 상상한 1975년의 서울, 하지만 존 믹슨이 내다본 이 상상의 미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1905년 11월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늑약이 강제되었고, 1906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한국에 건너왔다. 대한제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고종 황제도 헐버트도 을사늑약의 무효를 위해 노력했지만 비정한 국제사회는 대한제국을 외면하였다. 모든 것은 절망으로 보였고 절망의 현실에서 머나먼 상상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절망을 극복하는 힘은 결국 현실의 미래를 넘어 상상의 미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존 믹슨은 이를 확신하고 70년 후 한국의 미래를 전망하였다. 한국인은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오직 신에게만 의지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열심히 일하였다고. 그리하여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30년 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70년 후 세계에서 가장 계몽된 나라가 되어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가장 앞서 나가는 나라가 되었다고. 한국계 미국인인 제임스 스미스는 필과 더불어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기로 결심하였다고.

새해가 밝았다. 새로 얻은 탁상 달력을 덮어 본다. 달력에 가려져 있던 두 눈을 돌려 저 멀리 푸른 창공을 쳐다본다. 머나먼 상상의 미래로부터 새해를 바라본다. 간절한 소망의 미래로부터 새해를 돌아본다. 그렇게 상상하고 소망한 미래가 언젠가 지나갔을 때 지나간 미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행복하리라.

노관범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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