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삼성, 투명경영·계열사 독립 ‘빈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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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기획실 전격 부활…“이재용 후계구축 작업” 분석도

“30분 후 긴급 브리핑이 있을 예정입니다. 사안은 저희도 모릅니다.”
2010년 11월 19일 오후 4시 50분. 주말을 앞두고 반쯤 비었던 삼성그룹 기자실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30분 뒤 기자들 앞에 선 이인용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 부사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잘 접힌 A4 용지를 꺼내들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부사장. 부활한 새 전략기획실은 이재용 부사장으로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정지작업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부사장. 부활한 새 전략기획실은 이재용 부사장으로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정지작업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이 부사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께서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21세기의 변화가 예상보다 더 빠르고 심하다. 그룹 전체의 힘을 모으고, 사람도 바꿔야 한다’며 그룹 컨트롤 타워 복원을 지시하셨다”고 운을 뗐다.

기자실은 술렁거렸다.
“전략기획실이 다시 생기는 겁니까?(기자)”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이인용 부사장).”

1보가 날아갔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이 2년 4개월 만에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삼성의 전략기획실은 이렇게 복원됐다. 신사업 추진을 위한 조직이라는 삼성의 설명부터 이재용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위한 조직이 될 것이라는 시민단체의 해석까지 분분한 의견이 나왔다.

기획통 김순택 부회장, 컨트롤 타워 실장 발탁
‘신 전략기획실(가칭)’ 책임자로는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을 맡아온 김순택 부회장이 내정됐다. 20년간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김 부회장은 앞으로 과거 ‘전략기획실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삼성의 컨트롤 타워였던 전략기획실은 2008년 6월 말 해체된 조직이다. 본디 전략기획실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회장 비서실’로 출발해 1998년 구조조정본부로, 2006년에는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꿔 달며 삼성그룹의 전략 구상과 정보수집·계열사간 업무조정 등 사실상의 강화된 비서조직 역할을 수행해왔다. 일사불란한 경영 판단과 집중된 투자를 통해 삼성그룹을 매출 220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연’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그룹에서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10월 삼성의 50억원 비자금 차명계좌 의혹을 폭로하면서 전략기획실의 위상은 급전직하했다. 인사 전횡과 비리가 가득한 온상처럼 여겨졌다.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검사팀은 전략기획실을 비자금 조성과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경영권 편법 승계 등을 주도한 핵심 조직으로 지목했다.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2008년 4월 22일 자신과 이재용 전무의 퇴진, 그리고 전략기획실 해체를 뼈대로 한 경영쇄신안을 내놓으며 국민 앞에 머리를 숙이고 퇴진했다.

당초 삼성그룹은 올 3월 이 회장 복귀 직후만 해도 전략기획실 부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이 회장이 직접 입으로 낸 경영쇄신안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같은 입장은 채 1년도 되지 않아 뒤집혔다. ‘과거로의 회귀’라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무릅쓰고 삼성그룹이 전략기획실을 부활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재용 부사장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정지작업을 주도하는 조직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1월 초 이 회장은 연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이 부사장을 사장(CEO)급으로 승진시키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부사장을 승진시킨 뒤 이 조직이 중심이 돼 삼성의 경영권 승계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삼성의 한 퇴직 임원은 “새로 마련되는 조직은 ‘이재용 체제’ 확립을 위한 각 계열사 간의 역할 분담과 역량 집중을 위한 배후작업을 도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 전략기획실’은 신수종사업 발굴에도 관여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도요타의 몰락과 애플의 부상, 글로벌 경영위기 등 경영환경 변화가 어느 때보다 큰 만큼 계열사간 신사업 추진분야를 조율하고 반도체 이후의 먹거리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다”고 밝혔다.

‘신 전략기획실’(가칭)의 책임을 맡게 된 삼성그룹 김순택 부회장. |경향신문

‘신 전략기획실’(가칭)의 책임을 맡게 된 삼성그룹 김순택 부회장. |경향신문

김순택 부회장은 신사업추진단을 맡기 전에도 삼성SDI 대표이사로 발광다이오드(LED)와 2차전지 등 새 먹거리를 발굴해온 기획통이다. 신사업을 키워내는 기획 능력을 이 회장이 높이 사 신사업추진단에 이어 전략기획실장을 맡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은 지난 5월 5개 신수종 사업에 10년간 2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새 전략기획실 조직의 구체적인 명칭과 인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삼성 안팎에서는 새 먹거리 탐색을 위해 신사업추진단의 핵심 인력을 흡수하는 것 외에도 기존의 인사·법무·홍보 등 분산된 기능을 모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2008년 전략기획실이 해체된 뒤 삼성은 사장단협의회 산하의 업무지원실과 법무팀, 커뮤니케이션팀과 3개 위원회(인사·브랜드관리·투자조정)에 전략기획실 기능을 분산해왔다.

다만 인원수의 경우 과거 전략기획실에 배속됐던 100여명보다 적거나 비슷한 규모로 조직이 꾸려질 전망이다. 법제화된 기구가 아닌 만큼 과거와 마찬가지로 각 계열사에서 부장급 이상의 직원들이 파견되는 형태로 근무가 이뤄질 전망이다.

통제·조직력 강화 회장 친위체제로
삼성그룹은 기존 전략기획실의 인사 전횡과 권력 집중 등 어두운 이미지가 새 조직에 나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경영일선 복귀가 예상되던 이학수 삼성전자 상임고문(전 전략기획실장)과 김인주 상담역이 표면상 한직으로 분류되는 삼성물산 건설부문과 삼성카드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 고문과 김 고문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사건으로 기소돼 각각 집행유예 5년을 받았으나 최근 사면됐다. 이인용 부사장은 이례적으로 “두사람의 인사는 ‘문책성 인사’에 해당한다”며 “삼성은 과거 전략기획실 임원이던 인사들도 추가 인사에 포함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략기획실 부활은 삼성그룹에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삼성은 국내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회장을 정점으로 한 그룹 중심의 경영체제가 확고히 정립된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과거 삼성은 이 회장이 그룹의 전체적인 방향을 잡고, 전략기획실이 실행계획과 전략을 짜고, 계열사 최고경영자는 이를 실행하는 ‘삼각편대’ 구조를 형성했다. 전략기획실이 복원되면서 ‘신 삼각편대’ 경영이 부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그룹의 통제력과 조직력이 강화될 수 있다.

투명경영과 계열사간 독립경영이라는 측면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 회장이 직접 전략기획실 복원을 명령한 이상 그에 걸맞은 권한을 부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견제장치도 마련될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시민사회는 전략기획실 부활에 반발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회경제국장(성공회대 교수)은 “전략기획실 부활로 2008년 삼성그룹이 약속했던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차명계좌 사회환원 등의 경영쇄신안은 휴지조각이 됐다”고 지적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결국 관건은 신설되는 컨트롤 타워가 법적으로 불확실한 위치에서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며 “컨트롤 타워는 존재할 수도 있으나 그룹 내 주요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비해 그에 따른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신설되는 조직이 이같은 문제에 발목이 잡힐 경우 또다시 ‘황제 경영 보좌기구’라는 오명을 벗기 힘들다는 얘기다.

삼성그룹조직 복원 일지

2007.10 김용철 변호사 등 ‘삼성 비자금’ 폭로 기자회견

2007.11 삼성 비자금 특검법 국회 의결

2008. 1 조준웅 특검팀 출범. 이건희 회장 자택 등 압수수색

2008.4 이 회장 배임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
삼성, 이 회장 퇴진·전략기획실 해체 등 경영쇄신안 발표

2008. 7 서울중앙지법 이 회장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등 선고

2009.12 정부, 이 회장 단독 특별사면

2010. 3 이 회장,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 복귀

2010. 8 이학수 고문·김인주 상담역 등 특별사면

2010.11 삼성, 전략기획실 부활 등 그룹조직 복원 발표


<백인성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fx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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