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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의 선언’이후 뭐가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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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행동’에 대한 감동과 냉소 사이

지난 3월10일, 전국에는 꽃샘추위가 들이닥쳤다. 대학생 김예슬씨는 손보다 심장이 더 떨렸다. 세 장짜리 대자보를 하나씩 학교 담벼락에 붙였다. 그러고는 피켓을 들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씨는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대학을 그만둔다고 했다. 언론은 명문대생이 학교를 자발적으로 그만두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의 선언이 대학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행동이라는 데 주목했다. 그의 선언은 넓은 파장을 일으키며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 됐다. 그러고는 7개월이 지났다. 사건의 의미는 사후에 드러난다. ‘김예슬 선언’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지난 3월 10일, 학생들이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김예슬씨의 대자보를 읽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난 3월 10일, 학생들이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김예슬씨의 대자보를 읽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직장인 김지애씨(24)는 20대 친구들 4명과 함께 지난해 연말부터 지역공동체 라디오 마포FM에서 ‘이빨을 드러낸 20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대의 목소리를 20대의 손으로 담아낸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취지였다. 1년 정도 이어오던 프로그램은 이달 초 종영했다.

김예슬 선언은 김씨에게 충격이자 슬픔이었다. “방송에서 김예슬씨 선언을 다뤘다. 선언 전문을 읽은 다음 진행자와 게스트들이 한 사람씩 자기 경험에 대해 말했다. 모두 울컥 하는 분위기였다.” 김예슬 선언이 사회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위 ‘스카이’라 통칭되는 명문대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김지애씨는 “나는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왔지만 ‘스카이’ 졸업생은 아니다. 내가 같은 행동을 했더라면 얼마나 파장이 있었을까. 그러나 예슬씨의 선언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대학에 남은 학생들은 무엇인가?
선언 직후 일부에서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스펙 쌓기’가 아니냐는 냉소적인 견해도 나왔지만, 대부분 김씨의 진정성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용기 있는 행동’과는 구분되는 다른 해석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김예슬 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하게 들었던 생각은 사실 ‘어쩌라고’였다.”

최근 출간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 소개돼 있는 한 대학생의 발언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엄기호 연세대 원주 캠퍼스·덕성여대 강사가 두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나눈 토론과 대화의 기록이다. 책에서 ‘지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이 학생은 “그녀의 용기는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김씨의 행동에 대한 갈채와 함께 불편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왜 그럴까. 김예슬씨는 “인간의 길”을 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학에 남아있는 다른 학생들은? 지혜씨는 “그녀(김예슬)가 옳다면?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내) 머리에는 이류가 아닌 이류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바보같이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불나방처럼 모든 것을 던지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동이든 칭찬이든 불편함이든, 정서적 반응이 있다는 건 김예슬씨의 문제의식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이라도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대학생 조원진씨(22)는 김예슬 선언을 보고 ‘나는 왜 강의실에 앉아 있는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무관심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당시 내 주변에선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았다. ‘누가 자퇴했다더라’ 정도의 반응이 전부였다. 그날 그날 보도되는 많은 뉴스들 중 하나였다.” 비단 김예슬 선언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조씨는 “88만원 세대 이야기를 비롯해 20대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대학 밖에서만 화제가 될 뿐 대학 안에서는 무덤덤하다”고 말했다.

김예슬씨는 자신의 자퇴를 “대학과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를 빼내는 데 비유했다. 그러고는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말처럼 한 명이 빠진다고 구조가 무너지진 않는다.

김예슬씨가 피켓을 들고 고대 정문 앞에 서 있다. |레프트21 제공

김예슬씨가 피켓을 들고 고대 정문 앞에 서 있다. |레프트21 제공

실제로 그랬다. 김예슬씨가 고려대 교정에 대자보를 붙인 지 한 달쯤 지난 4월 8일 오전. 중앙대 이사회는 단과대 통폐합과 모집단위 광역화를 뼈대로 한 ‘학문단위 재조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같은 날 이 학교 독문과 3학년생 노영수씨(28)는 두산중공업이 건설하고 있던 중앙대 R&D센터 공사 현장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는 “구조조정 최종안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고 “학내 민주주의가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두산중공업은 그를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이 무렵 중앙대 관계자는 「Weekly경향」과의 전화통화에서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영수씨는 한 달 뒤인 지난 5월,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노씨 이외에 이 학교 학생 2명이 더 구조조정안에 반대하다 퇴학처분을 받았다. 지난 7월에는 ‘노영수 관련 동향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을 갖고 있던 두산중공업 직원이 집회장소에서 학생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학측은 “노씨가 퇴학 후에도 학교 명예와 위신을 손상하는 행위를 하고 향후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을 공언하고 있어 노씨의 활동을 파악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또래보다는 기성세대 반향 커
노씨는 지금 업무방해건과 퇴학처분건을 포함해 3개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노씨도 김예슬씨의 선언문을 봤다. 그 뒤에 나온 김씨의 책도 읽었다. 그는 “전에 없던 방식의 문제 제기였다. 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다만 대안이나 구체성은 조금 떨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고뇌한 점은 너무나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져서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김예슬씨는 대학 체제에서 “(자기) 몫의 돌멩이” 하나를 빼어버림으로써 여론의 호수에 작은 동심원을 일으켰다. 그 동심원은 냉소와 감동 사이에서 요동쳤지만 김예슬을 만들어낸 오늘의 대학 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2, 제3의 김예슬이 나오면 달라질까.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또 다른 김예슬이 나오기를 바라는 건 허무맹랑한 생각”이라면서 “이것은 대학 안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예슬씨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대학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자기 실천의 욕망은 다른 학생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김예슬씨가 대학을 거부한 것은 개인적 차원의 결단이다. 인격적 완성이나 자기애의 발로라고 볼 수도 있다. 현실과 이상이 괴리되었을 때 대학을 나가버림으로써 그 분열을 봉합해버린 것으로, 또래들보다는 기성세대의 반응이 컸다. 기성세대에게는 그런 식의 저항의 서사가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주체들이 ‘선언’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개인 김예슬의 삶은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일 테다. 김예슬씨는 지난 10월 19일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선언 이후에 일어난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본연의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면서 “요즘은 박노해 작가의 사진전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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