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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사회과학서점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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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으로 ‘서점살리기’ 노력에도 대부분 문 닫아

아직 간판은, 있었다. 서울 신촌 연대앞 굴다리 골목에 자리잡았던 ‘오늘의 책’ 간판 위에는 ‘문화적 울림의 역사를 이어 갑니다’라고 적혀 있다. 흐름이 끊긴 지도 10년이 넘었다. 1994년 ‘ 서림’이 문을 닫은 뒤 이곳은 서울 서부지역에 있는 유일한 사회과학서점이었다. 관련 대책위가 꾸려지고 문화공간이 만들어지는 등 살리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을 닫았다.

문 닫은 지 근 10년이 되는 서울 신촌 연대앞 인문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 간판만 남아있다.

문 닫은 지 근 10년이 되는 서울 신촌 연대앞 인문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 간판만 남아있다.

오늘의 책이 처음부터 골목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오늘의 책은 연대앞 신촌로타리로 향하는 도로변에 있었다. 뒷문의 ‘약속’ 판에는 매일 밤 수백 건의 약속메모가 붙었다. ‘삐삐’가 보편화되고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약속쪽지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책 자리는 SK텔레콤으로 넘어갔다. 기자가 찾아간 10월 7일, SK텔레콤은 ‘T브로드밴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건재했다.

지난 4월 <고대신문>에는 한 칼럼이 실렸다. 고려대학교 앞에 자리잡은 ‘동방서적’이 문을 닫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의 칼럼이다. 동방서적은 최종적으로 8월에 문을 닫았다. 이 서점은 소위 말하는 사회과학서점이 아니었다. 고려대를 대표하는 서점은 ‘장백서원’, 그리고 ‘황토’ 등이었다. 장백서원은 지난 2001년 문을 닫았다. 당시 ‘장백서원 살리기 대책위’도 만들어졌다. 인터넷에는 대책위의 ‘활동’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있다. 진보넷에 개설되었던 이 서점 대책위는 사라졌다. 몇몇 게시판에 남아있는 서점 살리기 일일주점 게시글에 남겨져 있는 휴대전화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번호’라는 안내메시지만 나올 뿐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빌리자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진 것이다.

전성기때 사회과학서점 140여개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사회과학서점은 몇 군데나 있었을까. 1982년부터 건국대학교 앞에서 운영해온 ‘인서점’의 심범섭 대표(70)는 143개로 기억한다. 인서점과 광화문에 있던 ‘논장’ 등은 전문 사회과학서점을 표방했던 최초의 서점이기도 하다. “정확한 숫자를 헤아려본 적은 없다. 다만 1990년대 말 서울지역 인문사회과학서점 모임이 있었는데, 그때 참여했던 서울지역의 서점은 12개 정도다.” 서울대 앞 서점 ‘그날이오면’을 운영해온 김동운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와 유정희씨(전 관악구의회 의원) 부부는 지난 1993년부터 이 서점을 운영해왔다. 전성기 시절, 서울대 앞에는 5개의 사회과학서점이 있었다. 서점이 많다보니 서점별로 색깔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정파별로 출입하는 서점도 갈렸다. ‘열린 글방’은 PD(민중민주)쪽 학생들이 애용했고, ‘전야’는 NL(민족해방) 계열 학생들의 아지트였다. “‘오월서점’은 처음은 잘모르겠고, 중간에 유은희라는 분이 운영을 했어요. 그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맡았었고….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김 대표는 “낙성대 쪽에 있던 ‘아침이슬’은 해직교사 출신이 운영했던 것으로 아는데, 복직되면서 없어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치범 전 환경부 장관이 운영하던 ‘전야’는 1991년 정현곤 전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사무처장이 넘겨받았다.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던 정 전 처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치범 선배가 다른 것을 하고 싶다고 해서 받았는데, 그때가 끝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듬해 5월까지는 굉장히 잘됐습니다. 인수하고 겨울이 지나니 쭉 빠지기 시작했어요.” 서점의 운영은 당시 학생들이 맡아 했다. 이름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그 중 한 학생이 경영학과 88학번으로 기억하는데 외국 나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7년 전쯤 만났는데….” 사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각 대학 앞에 존재했던 사회과학서점을 누가 운영했고, 언제쯤 사라졌는지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 인서점 심 대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형사들이 오면 저금통장이나 외상장부, 전화번호부 같은 걸 들고 갔어요. 저금통장을 들고 간 건 혹시 불순한 자금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생각해서라고 추측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진 같은 것도 찍기 꺼려 했고, 또 그러다보니 장부도 가짜이름으로 적거나 전화번호도 숫자를 하나 둘 더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름도 대부분 가명을 썼다. “예를 들어 고려대학교 다니는 사람도 자기가 광주의 무슨 학교다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게 일반적인 문화다보니 다시 묻지도 않았습니다.”

지방 각 대학 앞에 있던 사회과학서점의 역사는 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사회과학서점과 관련한 ‘역사’가 알려지게 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서점 주인이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과거 전력을 밝힐 때이고, 또 하나는 서점이 문을 닫으면서 지역신문들이 그 서점의 역사를 탐문하는 경우다.

서점 ‘역사’가 알려지는 두가지 길
전주에 있던 ‘새날서점’의 경우에는 후자다. 서점을 운영하던 박배엽 시인이 요절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북지역에서 최초의 사회과학서점은 ‘금강서점’이다. 서점 주인이었던 노동길씨는 참여정부 출범당시 대통령직인수위 자문위원을 역임한 뒤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금강서적은 노씨의 동생이 인수해 종합서점으로 확장했지만 2008년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1987년을 전후로 전북지역 곳곳에 사회과학서점이 생겨났다. 

익산의 원광대 정문에는 ‘황토서점’이 있었다. 이 서점을 운영했던 김형근씨는 “사람들에게 사상문화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의식 때문이었지, 당시도 사회과학서점은 굶어죽기 딱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조금 버틴 셈”이라고 말했다. 전교조 교사였던 그는 지난 2008년 이른바 ‘빨치산 추모제 참가’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올해 8월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제는 사라진 대학가 사회과학전문서점들. 왼쪽부터 고려대학교 앞 ‘장백서점’, 성균관대 앞 ‘논장’, 전북대 앞 ‘새날서점’. |경향신문

이제는 사라진 대학가 사회과학전문서점들. 왼쪽부터 고려대학교 앞 ‘장백서점’, 성균관대 앞 ‘논장’, 전북대 앞 ‘새날서점’. |경향신문

충북지역의 ‘1호’ 사회과학서점은 ‘무심천 서점’이었다. 한때 이 서점의 운영을 맡았던 김문종씨는 현재 이시종 충북도지사의 정책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다. 대전에는 충남대학교 앞 ‘창의서점’이 거의 유일한 사회과학서점이었다. 선병렬 전 의원이 만들었고, 그 뒤를 임일씨(52·보험업)가 맡았다. 임씨는 자신이 운영할 당시 사상서로는 <세계철학사 Ⅰ, Ⅱ, Ⅲ>(녹두), 시집으로는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소설로는 <태백산맥> 등이 많이 팔린 책이었다고 기억했다. 경찰은 수시로 서점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에 가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책장사 하는 사람이 책이 수만권인데, 어떻게 다 읽느냐고요.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용을 모른다고 잡아 뗐지요.”
2호인 ‘민사랑’은 현재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몇 안되는 사회과학서점 중 하나다. 그렇다고 사회과학만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자구책으로 일반종합서적도 취급한다. 서점 대표 최맹섭씨는 지난달 한 대표적인 사회과학 출판사로부터 직거래를 정리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씁쓸하죠. 그렇다고 출판사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의 논의를 거쳐 수지타산을 고려한 결정이니….” 그는 “지금 당장 전망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나름대로 고심해 자구책을 내놓고 있지만 ‘오프라인’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성대 앞 ‘풀무질’은 인근에 자리잡았던 ‘논장’이 결국 문을 닫았지만 지금까지 버텨온 인문사회과학서점이다. 다른 서점들이 후원회 등을 조직해 버텨왔지만, 풀무질은 가족 노동의 힘으로 지금까지 이어왔다. 은종복 대표는 “학기 초 수험서·교재 판매로 1년 매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사실 그게 창피하고 부끄러워 될 수 있으면 사회단체 등에 기부를 많이 하려 한다”고 말했다.

은 대표는 최근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써놓은 글들을 묶은 것이다. 그는 인문학 공부모임을 상황 돌파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다. 확실히 세대 차이는 존재한다. ‘오늘의 책’에서 총무를 역임했던 이김춘택씨는 “인문사회과학서점을 경험했던 이전 세대에게는 어쨌든 그런 공간이 나름으로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뒤의 세대에겐 아예 그런 공간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자체를 못느끼는 것이 솔직한 상황”이라며 “만약 지금 다시 그런 것을 만든다면 왜 있어야 하는지 존재 이유부터 다시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온 인문사회과학서점의 활로는 없는 것일까.

김지원 광주·전남 문화연대 사무국장은 요즘 시내에 서점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 전남대 앞에 있던 ‘청년글방’을 옮기기 위해서다. 지난 1988년 생긴 이 서점은 그동안 몇차례 경영위기가 오면서 이 단체가 위탁운영해왔다. 김 국장은 “과거 대학가 세미나 모임 및 교재 납품으로 사회과학서점이 명맥을 이었다면 인터넷서점과 더이상 경쟁이 안되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서점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위상을 재정립할 시점에 도달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인천에서 함께살기도서관을 꾸리고 있는 최종규씨는 “인터넷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책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일면적인 평가”라며 “과거에는 서점을 운영하다가 사회운동으로 가면서 닫는 경우가 많았는데, 결국은 어떤 노하우를 가지고 운영해왔는지가 관건이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날이오면 김동운 대표
“사회과학서점 ‘불씨’ 보존이 우리의 역할”

[커버스토리]그 많던 사회과학서점은 어디로 갔을까

서울대 앞에 자리잡은 ‘그날이 오면’은 다른 서점들이 자구책으로 종합서적 형태로 전환한 데 비해 1980년대부터 이어온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의 형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김동운 대표는 1993년부터 ‘그날이 오면’을 맡아 운영해왔다.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이 지적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직도 인문사회과학 전문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려움이 1, 2년 된 것도 아니고 워낙 오랫동안 쌓여진 일이다. 어려운 것을 아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름의 틈새를 모색하고 있고, 또 그것이 의미가 있고 운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다.”

많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은 후원회 등을 조직해 생존을 모색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우리 경우는 2006년도에 후원회를 만들었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본 끝에 만든 것이다. 현재 약 200여명이 CMS를 통해 후원을 하고 있다. 그게 서점의 유지에 있어서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과학서점이 사라지게 된 데에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영향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인터넷서점으로부터의 위협도 클 것 같다.
“사실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쟁을 할 수 없다. 똑같은 조건에서 책을 할인하거나 마일리지 적립 등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된다. 자본이 위주로 되는 유통질서에서 인터넷으로의 진출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워낙 돌파구가 없으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서점의 위기라고 하지만 잘 활용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요즘 CEO인문학이라고 인문학 공부 바람도 불고 있는데.
“우리가 말하는 인문사회과학은 물질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힘을 만드는 것이다. 변화를 위해 필요한 이론과 지식, 실천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흔히 말하는 ‘인문학’은 결과적으로 지금 현재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장식물이다. 자본 중심의 잘못된 사회질서에서 오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한, 그런데 필요한 인문학이라고 할까.”

결국 인문사회과학서점의 돌파구는 없는 걸까.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항상 그런 희망을 갖고 산다. 역사는 동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반복되거나 비슷한 유형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비록 어려운 여건이라도 그런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나름대로 보존하고 이어가는 것이 우리 같은 이들의 역할일 것이다. 만약 이런 흐름도 결국 끊기면 그건 정말 암울한 세상이지 않겠나.”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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