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신한 라응찬 신화 ‘영예와 치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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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3인방 내분 동반사퇴 압박… 20년 장기집권 ‘덫’

라응찬 신한금융그룹 회장의 ‘20년 장기집권’이 덫에 걸렸다. 신한은행이 전 은행장이자 현 지주회사 대표이사인 신상훈 사장을 배임과 횡령 혐의로 고소하자, 신 사장 역시 라 회장과 이백순 현 신한은행 행장의 ‘공동 책임론’을 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 ‘금융권의 이병철’로 불리며 신한은행의 역사를 써온 라 회장은 결국 법정 진실공방을 피할 수 없게 됐고, ‘50억원 차명계좌’ 의혹까지 불거져 벼랑 끝에 선 모양새다. 라 회장이 안정적 장기집권을 위해 던진 초강수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는 게 금융권의 분석으로, ‘3인 동반 사퇴’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9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신한은행 본사에서 이사회를 마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굳게 입을 다문 채 차에 앉아 있다. 이날 신한금융 이사회는 신상훈 사장의 직무정지를 의결했다. |연합뉴스

9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신한은행 본사에서 이사회를 마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굳게 입을 다문 채 차에 앉아 있다. 이날 신한금융 이사회는 신상훈 사장의 직무정지를 의결했다. |연합뉴스

신한금융 성공 이끈 수뇌부 분열
신한은행은 지난 9월 2일 신 사장 등 신한은행 전·현직 임직원과 부당대출을 받은 K사 대표이사 등 7명을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신한은행은 보도자료를 통해 “최근 은행에 ‘신상훈 전 은행장’의 친인척 관련 여신에 대한 민원이 접수되어 조사한 결과, 950억원에 이르는 대출 취급과정에서 배임 혐의가 있었고, 채무자에 대해서는 횡령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은행 내 루머 확인 차원에서 밝혀진 또 다른 15억여원의 횡령 혐의를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신상훈 사장은 “불법대출이나 자문료 횡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신 사장은 “친인척이 아닌 고향 선배의 회사이며, 은행장의 위치가 마음대로 대출을 할 수 있지도 않다”면서 “금융사에 유례없는 일로 참담하다”고 말했다. 또한 15억원에 대해서는 “절반은 이희건 명예회장,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라응찬 회장과 이백순 행장이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결국 신한사태 당사자들은 현해탄을 건너가 최대 주주인 재일교포 주주들에게 해명해야 했고, 이후 신한금융 이사회에서는 신 사장에 대해 직무정지를 의결했다.

금융권에서는 혐의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이번 신한사태에 대해 라응찬 회장, 이백순 행장 두 사람과 신상훈 사장 사이의 후계구도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해석이 많다. 신 사장의 임기가 내년 3월이면 끝나는 데도 신한은행이 초강수를 둔 배경에는 그룹 내 ‘넘버 1(라 회장)’이 ‘넘버3(이 행장)’를 내세워 ‘넘버2(신 사장)’를 내친 게 아니냐는 관측이다. 횡령 등 내부 문제에 대해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는 금융권의 보수적인 경영 행태로 보았을 때 최근 신한사태는 극히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신한사태는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서울 태평로2가 본점에서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박민규 기자

신한사태는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서울 태평로2가 본점에서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박민규 기자

신한금융 경영진은 라응찬 회장-신상훈 사장-이백순 행장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로 구성돼 있다. 이 서열은 후계구도와도 맞물려 있는데, 금융권에서는 라 회장의 금융지주 회장 4선 선임을 앞둔 올 초부터 삼각편대 내부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장기집권’에 대한 정부 당국의 비판적 시각이 있어 일각에선 라 회장이 1년 정도만 회장직을 맡다가 신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라 회장은 오히려 더 활발한 행보를 펼쳤다.

이 때문에 라응찬 회장이 자신이 금융실명제법 위반으로 구설에 오르게 된 배경에 신 사장이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신 사장을 ‘아웃’시키기로 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라 회장은 지난 2007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50억원을 전달한 것과 관련해 이 돈이 다른 사람 명의의 계좌에서 인출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실명제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현재도 정치권의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 불거진 ‘50억 차명계좌’
사실 신한금융에서 라 회장의 입지는 그룹 총수에 버금간다. 1938년생인 라 회장은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농업은행에 입행, 대구은행을 거쳐 1982년 신한은행 탄생 당시 상무이사로 금융권 임원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이후 라응찬 회장은 창업자도, 대주주도 아니지만 20년 동안 신한은행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켜오면서 ‘금융권의 이병철’로 불리게 됐다. 라응찬 회장을 신한금융그룹의 오너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신한금융=라응찬’이라는 인식은 공식처럼 여겨졌다.

이 같은 승승장구는 라응찬 회장의 ‘능력’이 큰 배경이다. 업계 최하위권에 있던 신한카드는 카드 업계의 1위 LG카드를 흡수하여 동양 최대의 카드회사가 되었고, 역시 업계 하위권이었던 신한은행은 오랜 역사의 조흥은행을 흡수하여 명실 공히 대형은행이 되었다. 또한 신한증권은 중견 증권회사를 흡수 합병하여 몸집을 키웠다.

신한금융지주 라응찬 회장(앞)과 신상훈 사장이 9월 9일 일본 나고야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재일교포 주주들과 사외이사들을 상대로 열리는 ‘신한사태’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고야 공항에 도착해 공항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신한금융지주 라응찬 회장(앞)과 신상훈 사장이 9월 9일 일본 나고야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재일교포 주주들과 사외이사들을 상대로 열리는 ‘신한사태’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고야 공항에 도착해 공항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지난 6월부터 지속되고 있는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 문제는 그의 발목을 확실히 잡을 것으로 보인다. 라 회장의 실명제 위반 혐의는 지난해 검찰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비자금 사건을 수사할 때 불거졌다. 2007년 2~3월 라 회장이 50억원을 박 회장에게 준 것이 확인됐는데, 문제는 이 돈이 라 회장의 개인계좌가 아니라 은행 임직원 등 다른 사람 명의의 계좌에서 인출된 것이라는 점. 검찰은 애초 라 회장이 박 회장에게 준 50억원의 성격을 의심하고 내사했지만, 라 회장이 개인 자금으로 골프장 투자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소명하자 수사를 조기에 종결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이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을 확인한 것으로 최근 드러나면서 금감원이 라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조사를 재개하고 나섰다.

금융기관의 수장으로서 자격에 논란이 인 것은 당연. 여야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회 기획재정위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는 이용섭 의원은 최근 CBS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보다도 금융실명법을 지켜야 할 은행장 출신이고, 현재 은행의 회장인 사람이 금융실명법을 위반해서 50억원을 차명계좌로 관리하고 탈세를 저질렀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금융권 안팎 ‘3인 동반 사퇴’ 목소리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이번 신한의 이전투구를 두고 ‘3인 동반 사퇴’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세 사람 모두 내부 권력 다툼으로 조직에 혼란을 주고 주가를 떨어뜨렸다는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동반 퇴진할 경우 신한 사태는 조기에 마무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9월 중순 문화일보가 산업계·금융계·학계·연구기관의 경제전문가 1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국내 경제전문가 중 62%는 최근 발생한 ‘신한사태’는 라 회장·신 사장·이 행장 등 수뇌부 3인에게 동반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이어 라 회장(15%), 신 사장과 이 행장(각 2%)을 지목했다. 이에 따라 신한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도 ‘3인 동반사퇴’(42%)를 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 신한은행노조 또한 최근 “사태가 수습되면 관련 당사자 모두는 검찰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용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는 등 사실상 경영진 3명의 동반퇴진을 요구했다.

라 회장은 추석을 앞둔 지난 9월 17일 자신의 명의로 “고객 여러분의 용서와 신뢰만이 새출발하는 신한금융그룹을 지켜줄 것으로 믿으며, 저와 임직원들은 이에 보답하여 역사와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 금융회사로 거듭날 것을 약속드린다”는 광고를 일간지에 내며 진화에 나섰지만, 퇴진 압력은 점점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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