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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선진국의 ‘가난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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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부족으로 수령시기 늦춰져 소득없이 몇 년간 지내야

오늘날 지구 북반구는 유례없이 거대한 ‘장수촌’이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영양상태의 개선 덕분에 선진국의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30년쯤 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일본(31.8%)을 비롯해 한국(24.3%), 프랑스(23.4%), 영국(21.9%) 등이 진입한다. 5명 중 1명이 노인이 되는 것이다.

미국인 노부부 한쌍이 서로 손을 잡고 웃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등에서 불거지고 있는 고령화에 따른 연금 재정 문제는 노인들의 이같은 편안한 노후를 위협하고 있다. |경향신문

미국인 노부부 한쌍이 서로 손을 잡고 웃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등에서 불거지고 있는 고령화에 따른 연금 재정 문제는 노인들의 이같은 편안한 노후를 위협하고 있다. |경향신문

하지만 경제적 대비 없이 맞게 되는 말년은 서글픈 계절일 뿐이다. 비교적 복지정책이 잘 갖춰졌다는 나라들에서조차 노인들을 부양할 ‘연금’이 난제로 떠오르고 있다. 게다가 전세계적인 경기불황 속에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노인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이같은 고령화사회의 풍경은 우리에게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은 2060년에 국민연금이 모두 소진될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올해 현재 노인인구의 45.1%, 곧 2명 중 1명꼴로 빈곤상태라는 국민연금연구원의 조사 결과가 있다.

향후 노령인구의 부양 문제는 한정된 세수 재원을 놓고 그 규모가 갈수록 커지는 ‘실버’ 유권자와 정치적 발언권이 크지 않은 어린 세대 간의 대립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연금문제는 정치적 이슈가 될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은퇴 미루고 연금수령 때까지 일해야
유럽국가 중에서도 가장 상황이 안좋다는 영국에서도 한국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생명보험회사 아비바는 이달 발표한 분석자료를 통해 수백만명의 영국인이 가난 때문에 은퇴하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결혼 평균연령이 늦어지고 자녀 부양기간이 길어지면서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취약한 것으로 지적됐다. 게다가 55세 이상의 조사대상 인구 5명 중 1명 꼴로 평균 약 6만 파운드(1억800만원)의 주택구입대출 상환금액이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은커녕 채무를 진 채 은퇴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의 소비자금융보호단체(CCCS)는 “(부동산 등) 자산은 많지만 현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늦은 나이에 낳은 자녀들의 대학 뒷바라지까지 하다보면 은퇴연령이 되도록 자신의 노년을 위한 저축을 할 수 없어 곤란해진다”면서 최근 노인들의 상담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책임은 무겁다. 영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영국인 59%가 노년기 경제적 보장을 정부가 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2008년 현재 연금생활자 3명 중 1명이 국가가 제공하는 연금이 유일한 소득인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영국인들의 저축률은 약 40년래 최저 수준이다.

아비바의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연간 연금부족액은 3180억 파운드(575조원)로, 2011~2051년 은퇴 예정자인 영국인 3100만명이 1인당 매년 평균 1만300 파운드(1865만원)씩 저축을 해야 겨우 적자를 면하게 된다. 독일(9700 파운드)이나 아일랜드(7600 파운드), 또 연금개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프랑스(6600 파운드)보다도 심각한 수준인 것이다.

미국의 노인들에게도 ‘따뜻한 남쪽 플로리다에서 골프치며 즐기는 여유로운 노후생활’은 옛말이 되고 있다. ‘제2의 대공황’에 비유되는 경기침체로 인한 폐업과 감원 한파로 정년은 위태해지고 재취업도 어려워졌다. 미국 노동통계국(BLS) 자료에 따르면 55세 이상 실업인구는 2007년의 2배가 넘는 7.3%로, 조사가 시작된 1948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미국의 노인빈곤율은 25%로, 4명 중 1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준비를 제대로 하고 노년기를 맞이하는 이들의 숫자는 매우 적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국 은퇴연구센터의 캐터린 콜린슨도 “많은 미국인들이 노후에 대비하지 않은 채 정년을 맞이한다”면서 “은퇴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충분한 돈을 저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인 연금권리센터(PRC) 등의 지난 9월 15일 발표에 따르면,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전미 가구가 은퇴 이후 적정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재 6조6000억 달러(약 7662조원)가 부족한 상황이다.

물론 미 정부가 66세 이상 노인에게 제공하는 사회보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수혜연령이 되기 전에 직업을 잃는 경우에는 생계를 꾸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된다. 일자리가 줄어든 미국에서 고령의 노동자는 재취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고령화 선진국의 ‘가난한 은퇴’

육체노동자의 경우에는 더욱 불리하다. 올해 58살로 오하이오주의 타이어공장에서 일하는 잭 하틀리는 “개당 10~20 파운드(5~9㎏)짜리 타이어를 매일 300개씩 옮기고 다듬는 작업을 하는데, 쉰 살일 때부터 벌써 무릎, 허리, 팔꿈치,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는 66세까지 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58살 이상의 노동자가 전체노동자에서 3명 중 1명 꼴이다.

게다가 가계대출 규모가 사상 최대인 미국에서는 6만~7만 달러 정도 채무를 진 채 퇴직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 주(州)가 운영하는 공적연금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노령인구는 증가하는데 최근 금융위기로 투자손실이 발생해 기금부족에 직면한 캘리포니아연금공단(Calpers)은 최근 약 6억 달러를 주정부에서 지급하도록 요청한 바 있다. 뉴저지주의 경우 연금운용 상태에 대해 잘못된 회계정보를 제공하며 가입자들을 오도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이같은 미국 공공연금의 문제는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데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리처드 리오던 전 로스앤젤레스 시장은 9월 15일자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주정부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 부족한 연기금 규모가 1조 달러에 달한다. 많은 지자체들이 연금 지급 의무에 따라 연 예산의 4분의 1을 사용할 것이고 이에 따라 공원, 도서관, 도로정비와 치안에 사용될 재원이 부족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래 일하고 늦게 수령’ 연금제도 개선
결국 연금제도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게 각국 정부의 판단이다. ‘더 오래 일하고, 더 늦게 수령하는’ 방식이다. 미국 약 20개주는 2008년부터 현직 종사자 및 은퇴자를 대상으로 연금 수혜를 축소하거나 그같은 정책을 추진 중이다.

사회보장이 튼튼한 프랑스에서도 연금개혁 법안이 노동계와 야권의 반대에도 불구, 이달 하원에서 통과됐다. 2018년까지 정년은 현행 60세에서 62세로, 연금수령 연령은 65세에서 67세로 늦춰 연간 적자 500억 유로가 예상되는 연금대란 사태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프랑스는 지금까지 55세에 퇴직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영국은 2046년까지 은퇴연령을 현 65세에서 68세로 늘리는 쪽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한발 더 나아가 70세까지 늦추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은 노인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자칫 삶의 질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저출산으로 갈수록 공급이 부족한 노동시장에 노인들을 활발하게 참여시킬 수 있는 방안이 더불어 모색되지 않으면 거대한 노인 빈곤층을 부양할 수도, 경제규모를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구경제학의 권위자인 마쓰타니 아키히코는 저서 <고령화 저출산 시대의 경제공식>에서 “고령화에 따라 경제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하다. 경제가 축소될 때는 현재까지의 경영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축소되는 경제에 맞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최민영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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