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사람

“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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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음식 한류’ 바람 오영석 (주)영명 사장

모교에 장학금을 내놓을 여유가 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오영석 ㈜영명 사장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모교에 장학금을 내놓았다. 여느 기부자와 다른 점은 참으로 이상한 조건을 붙인 것이다.

[신동호가 만난사람]“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겁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못 하는 학생한테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겠습니다.”

추석 특집호에 누구를 인터뷰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를 만났다. 딱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외식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다. 일본에 한식당과 식품점 36개, 국내에 2개의 일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음식 이야기이니까 맛이 있고, 성공담이니까 드라마틱할 것이다.

‘공부 못 하는 학생을 위한 장학금’에도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하다. 공부를 잘하게 하는 교육, 성적 상위권 학생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학교와 학원, 그래서 성적 경쟁에서 밀린 이른바 ‘루저’를 양산하는 우리 교육에 대해 도발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그는 도쿄 시내에 김치박물관을 열어 한국 김치와 음식을 일본에 알리는 ‘한식 전도사’다. 사이카보(妻家房)라는 브랜드로 한국 전통 가정요리점을 개업해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에 21개 직영점을 갖고 있으며 연 30억 엔(한화 약 419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일본에 한국 김치와 한국 전통 가정요리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음식 한류’ 스타이기도 하다.

9월 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에 그가 운영하는 일식당 도쿄사이카보와 ㈜영명 사무실, 그리고 일본 식품 판매점인 춘하추동이 있었다.

일본에서 ‘김치 아저씨’ ‘김치를 디자인하는 남자’로 불린다면서요.
“원래는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거든요. 서울에서 의상실을 하다가 입체재단을 배워서 일류 디자이너가 되려고 일본 유학을 갔는데….”

오 사장의 ‘김치 인생’은 시작부터 엉뚱하다. 영남대 화학과를 다니다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고 중도에 그만두고 상경했다. 6년 동안 의상실을 운영하며 결혼하고 딸까지 둘을 낳았다. 국내 패션계에서 성공하려면 입체재단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김치와 전혀 상관없는 삶이었다.

“일본 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유통을 전공했어요. 가보니까 디자이너보다 그게 낫겠더라고요. 그 바람에 게이오백화점에 취직하게 된 거죠.”

그의 인생을 바꾼 대사건은 게이오백화점에서 여성복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중에 일어났다. 일본에서 얻은 막내아들 돌잔치에 직장 동료들을 집에 초대하면서였다.

“일본 사람은 한국 음식이라면 불고기밖에 잘 몰라요. 불고기를 일본에서 야키니쿠(燒肉)라고 하지만 우리 불고기와 다르죠. 싼 내장이나 갈비, 족발 등 대부분 굽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집에 와서 잡채라든가 파전, 제육보쌈과 같은 가정요리를 대하고는 깜짝 놀라버리는 거예요. 한국에도 이런 요리가 있었냐고요. 너무 맛있게 먹는 겁니다.”

막내아들이 계기를 만들자 부인 유향희씨가 ‘일’을 저질렀다. 일본인들이 극찬하는 요리 솜씨를 상품화한 것이다. 1993년 유씨는 도쿄 요츠야에 김치와 젓갈 등을 파는 반찬가게를 열었다. ‘처가방’ 1호점이다. 유씨는 일본식 기무치나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퓨전 김치가 아니라 정통 한국 김치로 승부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일본인도 차츰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김치사업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백화점에까지 입점했다.

백화점에 진출할 때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게이오백화점에서 김치 코너가 필요했어요. 그때 백화점 트렌드가 차별화와 프라이빗 브랜드(PB)였거든요. 남한테 없는 것, 온리원(Only One)이 그 당시 유행어였습니다. 1992년 일본 경제 버블이 일어나고 1년밖에 안 되던 해라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고비를 넘겨야 될지 몰랐어요. 리모델링, 리엔지니어링, 차별화라는 말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김치도 다른 백화점에는 없는 걸 내놓자고 해서 게이오백화점에서 우리 집사람을 추천하게 된 거죠.”

한국 김치가 백화점에서도 통했습니까.
“게이오백화점에 처가방 2호점이 들어가자 옆에 있는 만두집이 ‘오지 마라’고 그래요. 왜 그러느냐니까 만두에 김치 냄새가 밴다는 거예요. 만두에도 마늘을 넣으면서 말이에요. 그 정도로 김치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라 쉽지 않았죠.”

그런데 어떻게 백화점에서 살아남았습니까.
“결국 맛으로 승부하는 것 아니겠어요? 집사람이 처음에 한국 소금을 사 오라고 해요. 일본 소금은 짜기만 하고 배춧잎을 상하게 만든다면서요. 우리가 한 달에 30㎏자리 6포대를 쓰는데, 컨테이너에는 600포대가 들어가요. 그놈을 수입 안 했습니까. 창고에 쌓아놓으니까 철이 녹슬잖아요. 그걸 둘러메고 팔러 다니는 거야. 그 덕에 소금장수가 됐죠. 근데 그 소금 갖고 만드니까 정말 음식이 맛있는 거예요. 소금이 오늘의 처가방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사장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는 식재료다. 김치는 소금 간을 해서 잘 절이고 내용물이 좋아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즉 좋은 식재료를 선별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는 한국적인 맛을 살리기 위해 부안 곰소 소금, 광천 새우젓갈, 청송·영양·영주의 고추, 서산 마늘 등 최고급 한국산 재료를 들여와 쓴다.

“저희 어머니가 시루떡을 잘 만들었어요. 옛날에는 집안에 큰일이 아니면 떡이 없잖아요. 어머니는 시루떡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4등분해서 이웃에 다 돌린 뒤에 남은 부스러기를 우리에게 줬어요. 남한테 선물할 때 제일 좋은 걸로 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이 늘 떠오릅니다. 그게 오늘날의 오영석을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고의 재료로 최선을 다하면 고객도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아내 유씨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업이 커졌다. 1995년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김치사업에 뛰어들었다.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영원히 접고 김치에 인생을 건 것이다.

[신동호가 만난사람]“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겁니다”

음식점보다 김치박물관을 먼저 냈더군요. 특별한 까닭이나 계기가 있었습니까.
“저희가 판 김치가 썩었다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깍두기인데 보통보다 많이 익었더군요. 집사람이 더 맛있게 하려고 양파를 갈아서 넣었던 게 여름이라 보글보글 거품이 난 거죠. 그걸 보고 썩었다는 거예요. 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본인이 김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단순히 상품만 팔아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치의 특성, 나아가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음식점은 교포 1세 분들이 생계형으로 시작한 게 대부분이에요. 자식한테 ‘여기 오지 마라, 공부 열심히 해서 김씨가 아니라 가네무라(金村), 가네다(金田)라는 이름으로 살아봐라’고 하고…. 마늘도 금요일에만 먹으라고 해요. 월요일에 회사에 출근할 때는 마늘 냄새가 안 나야 되니까요. 더 이상 한국 음식이 아무도 지키는 사람 없이 천덕꾸러기가 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 김치박물관이었어요.”

오 사장이 처가방 1호점 안쪽에 일본 최초의 김치박물관을 연 때가 1996년 10월이었다. 작은 규모지만 성공적이었다. 김치에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는 일본인이 생각보다 많았다. 일본 언론에 소개되고 김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자 부인 유씨가 ‘김치교실’을 열었다.

오 사장도 김치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김치가 입맛을 돋워주는 것은 물론 비타민, 무기질 등 영양소가 풍부하고 다이어트와 항암 효과까지 있는 ‘식탁 위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치박물관의 성공은 오 사장의 사업 영역을 넓혀주었다. 손님들은 보고 냄새를 맡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맛을 보기를 원했다. 그는 무릎을 쳤다. 한국 가정식 전문 음식점을 내면 고객의 오감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 김치박물관 2층에 ‘한국 전통 가정 음식점 처가방’이 문을 열었다.

“처가방이라는 이름 그대로 콘셉트를 가져가기로 했어요. 신랑·신부가 결혼해서 처가에서 피로연을 갖는 신(scene)을 만들자는 거죠. 거기 나오는 음식이 뭡니까. 잡채, 제육보쌈, 지짐(부침개), 갈비 같은 거잖아요. 거기에 순두부찌개와 김치떡만두와 같이 우리가 늘 생활 속에서 접해왔던 걸 가지고 만들어보자는 거였죠.”

식당은 한 곳을 성공시키기도 쉽지 않을 텐데 짧은 기간에 직영점 20여 곳을 성공시킨 것이 놀랍습니다.
“물건이든 뭐든 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겁니다. 처가방이 오늘날까지 빠른 속도로 커온 요인이 우선 거기에 있고요. 그 다음은 운이 좋았어요. 2002년 한·일월드컵과 2003년 <겨울연가>가 방영되면서 일기 시작한 한류 붐 덕이죠. 월드컵 때 왜 한국 축구가 강한가를 분석하면서 일본인이 마늘과 고추를 주목하게 된 겁니다. 마늘에는 알리신, 고추에는 캡사이신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걸 얘기하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그러니까 나물을 많이 쓰는 한국 음식이 거기에 너무 맞는 거죠.”

처가방 음식점을 모두 직접 운영하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체인보다 직영이 더 맞아요. 일본에서 체인점을 해서 덕본 데가 1997년까지는 사실 많이 있었어요. 그 뒤부터는 슬로푸드다, 로하스다 하는 얘기가 나오면서 그게 별로 먹히지 않아요.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고 하잖아요. 말하자면 그런 게 될 수 있는 거죠.”

오 사장은 지난해 8월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외식사업가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도쿄사이카보’를 개업하면서 한국으로 역진출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본의 식당에 데려갈 좋은 요리사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내에 식당을 낼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지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패션 유통업자로서 한·일 간 패션 교류를 추진했던 경험을 살려 일본의 좋은 음식을 한국에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종목을 일식으로 정하고 회와 초밥 중심에서 벗어나 일본 전통 요리와 가정요리를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

일본에는 ‘음식 한류’를, 한국에는 ‘음식 일류’를 전하는 셈이군요.
“(오 사장 기사가 실린 <슈칸마이니치(週刊每日)>를 보여주며) 여기 ‘김치에 보답한다’는 기사가 났어요. 일본이 저한테 김치를 팔게 해줬으니까 거꾸로 저는 일본 요리를 한국에 선보여주겠다는 거죠.”

앞으로 한국과 일본에 음식점을 더 낼 계획입니까.
“일본에는 더 확장하려는데, 우선 후쿠오카에다 낼 겁니다. 시모노세키하고 가깝잖아요. 건물에 조선통신사 그림을 걸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한국에도 조금 더 내야 안 되겠습니까.”

오 사장은 본업 외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신주쿠지부 단장, (사)한국기독실업인회 도쿄지회장 등을 맡아 사회활동에도 열심이다. 민단 산하의 최대 지부 가운데 하나인 신주쿠에서 교포나 그 후세가 아닌 유학생 출신 단장이 선출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처가방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을 포함해 50여명의 종업원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기도 하다.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하면서 공부 못 하는 학생에게 주라고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제가 공부를 못 했어요. 어머니가 네 살 반에 저를 학교에 보냈거든요. 젖을 더 먹어야 할 나이에 두세 살 위의 형들과 어울리다 보니 공부가 뒤떨어지고 늘 얻어터졌어요. 공부에 통 취미가 없었죠.”

고교 시절 그는 ‘불량학생’이었다고 한다. 성적은 340여명 중에 260등 정도였고, 권투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권투를 배우면서 선배들 등 너머로 춤을 배워 나중에 춤 선생 노릇도 했다. 이런 과거 때문에 그는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에게 ‘성적은 꼴찌라도 언젠가 그 무언가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장학금이 전달됐습니까.
“장학금 받은 학생한테 편지를 받았습니다. 선배님 때문에 자기는 앞으로 인생을 다르게 살기로 했다고요. 꼴찌인 자기가 수혜자가 된 것이 놀라웠는데, 그보다 부모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는 겁니다. 그걸 보고 자신도 생각이 달라졌고, 목표와 꿈을 갖게 됐다며 고맙다는 뜻을 전해왔어요.”

오 사장께서는 사업가로서, 또는 자연인으로서 어떤 포부를 갖고 있습니까.
“10년 전에는 신격호씨를 따라잡는 것이었는데, 현실을 보니 조금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되네요.(웃음) 제 대에 일본에서 100억 엔(한화 약 1400억원)을 팔고 싶어요. 일본에다 50만평(165만㎡) 정도의 농장을 만들 겁니다. 거기에 김치박물관을 만들고 우리 한국의 고추장·된장을 만들어 팔고 싶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어요. 양로원을 만들어 어른들 섬기면서 채소밭에서 소일하며 함께 삶을 영위하는 거죠. 아, 또 하나는 일본에다 한국 음식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그게 저의 평범한 꿈입니다.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못 할지 모르지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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