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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선거방해위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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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지방선거 투표독려 활동한 인사들에 ‘선거법 준수 촉구 공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갈지자’ 행보가 눈총을 받고 있다.
선관위는 2008년 4월 총선에서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투표 인센티브’를 도입했다.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에게 국·공립시설 이용료를 면제해주는 제도를 추진하고, 투표율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2010년 8월 선관위는 기존 입장을 뒤집었다. 6월 지방선거에서 투표 독려 운동을 했던 문화예술인들에게 ‘선거법 위반’이라는 이중 잣대를 적용했다. “선관위가 투표 독려 운동을 하면 괜찮고, 일반인이 투표 독려 운동을 하면 안되느냐” “선관위가 선방위(선거방해위원회)냐”는 비난을 듣고 있다. 선관위는 이런 모순된 판단 때문에 정치적 중립성까지 의심 받게 됐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투표 참여 홍보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선관위는 트위터에서 투표 독려 운동을 했던 문화예술인들에게 ‘선거법 위반’으로 행정조치를 내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줘 비판 받고 있다. |경향신문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투표 참여 홍보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선관위는 트위터에서 투표 독려 운동을 했던 문화예술인들에게 ‘선거법 위반’으로 행정조치를 내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줘 비판 받고 있다. |경향신문

8월 25일 이기선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트위터를 통해 투표 독려 운동을 했던 이들을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임옥상 화백, 탁현민 한양대 겸임교수, 소설가 박범신, 배우 권해효,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 이창현 국민대 교수 등을 포함한 23명이었다.

선거법 230조 ‘이해유도죄’ 위반 해석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트위터에서는 투표 독려 이벤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임옥상 화백은 “투표에 참가한 20대 선착순 1000명에게 판화를 보내겠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고, 탁현민 겸임교수도 “20대 투표율이 10% 이상 올라가면 누구나 무료입장 가능한 콘서트를 연출하겠다”는 약속을 트위터에 올렸다. 임 화백은 약속대로 투표를 한 20대에게 판화를 전달했다. 이 외에도 투표를 한 사람들에게 음반, 책, 공연 초대 등의 선물을 주겠다는 문화예술인의 약속도 이어졌다.

선관위는 ‘20대’ 투표 참여를 독려했던 임옥상 화백과 탁현민 교수의 경우 공직선거법 230조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선관위가 말한 것은 선거법 230조 제1항 ‘이해유도죄’다. 이 조항은 ‘투표를 하게 하거나 하지 아니하게 할 목적으로 선거인 등에게 금전, 물품, 향응 등 그 밖의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거나 제공을 약속한 자는 5년 이하 징역,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나와 있다. 상당히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선관위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20대’를 특정해서 선물을 주겠다고 했던 임옥상 화백과 탁현민 겸임교수에게 ‘선거법 준수 촉구 공문’을 보내기로 했다. 연령대를 특정하지 않은 21명에 대해서는 ‘선거법 안내문’을 보내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고발이나 수사 의뢰를 할 정도로 선거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연령대를 특정했느냐, 특정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촉구’냐 ‘안내’냐는 차이가 발생했다.

“선거법 준수 촉구와 선거법 안내문의 차이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선관위 관계자는 “선관위의 의지가 다른 것”이라며 “준수 촉구는 좀 더 강하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다음번에 그런 사안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 20대를 대상으로 하는 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20대의 투표율이) 높아지면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0대’를 위한 투표 독려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선거법 준수 촉구’ 공문을 받게 된 임옥상 화백(왼쪽)과 탁현민 한양대 겸임교수(오른쪽).

‘20대’를 위한 투표 독려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선거법 준수 촉구’ 공문을 받게 된 임옥상 화백(왼쪽)과 탁현민 한양대 겸임교수(오른쪽).

선관위의 해명에 대해 행정처분을 받게 된 이들은 강하게 반박했다. 탁현민 겸임교수는 “선관위가 정략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20대를 특정한 것은 20대의 투표율이 가장 떨어졌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높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투표 독려 운동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냐”면서 “나는 투표 독려 운동의 원칙을 이야기하는데, 선관위는 정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임옥상 화백도 “선관위가 트위터와 같은 SNS를 검열하겠다는 뜻”이라면서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의 방침에 대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서는 안될 일”이라고 비판했다.

선관위의 판단에 또 다른 허점이 있다. 20대가 아닌 30대, 40대 등의 특정 연령대를 대상으로 투표 독려 운동을 하는 것은 괜찮으냐는 의문이 나온다.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경우에 따라서 다를 것”이라며 “아직 애매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선관위의 해명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런 기준을 만드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박했다.

조국 서울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관위가 행정지도에 그친 것은 투표 독려 운동을 처벌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대 투표율을 높여야 하는 것도 선관위의 임무”라며 “선관위에서 투표 독려 운동을 한 이들에게 오히려 상을 줘야 한다. 특정 연령층을 기준으로 투표 독려 운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것은 법의 범위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20대 투표율 높이는 것도 선관위 임무”
선관위의 행정조치도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선관위의 행정조치는 크게 두 가지다. ‘선거법 준수 촉구’를 받은 임옥상 화백과 탁현민 겸임교수는 선관위 직원의 직접 방문이나 선관위의 공문을 받게 된다. 이 외 21명도 선거법이 명시되어 있는 선관위의 공문을 이메일로 받게 된다.

‘선거법 안내’ 조치를 받게 된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은 “경상남도 선관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투표 독려 운동이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으니까 선거법 안내문을 문서로 보내겠다고 했다”면서 “선관위에서는 다른 조치는 할 계획이 없고, 그냥 읽어보면 된다고 해서 이게 무슨 (웃기는) 상황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9월 2일 현재) 아직 공문은 받지 못해서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김경수 사무국장은 트위터를 통해 투표를 한 이들 중 10명을 추첨해 오리쌀로 만든 누룽지 10박스를 보내준다는 약속을 했다.

선거법 준수 촉구 조치를 받게 된 임옥상 화백과 탁현민 겸임교수도 아직 선관위로부터 별다른 공문을 받지 못했다. 임옥상 화백은 “선관위에서 나를 방문해 선거법 교육을 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그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면서 “그 이후에 공문이나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탁현민 겸임교수 역시 선관위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별다른 공문을 받지 못했다. 선관위의 행정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선관위도 이 사안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이에 비해 투표 독려 운동을 벌였던 이들은 선관위의 조치에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 임옥상 화백은 “9월 9일 환경재단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이번에 선거법 위반 행정조치를 받은 23명과 법률가, 문화예술가 등이 참여할 예정”이라며 “선관위 관계자도 이날 나와서 무엇이 선거법 위반인지를 밝혔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선관위가 투표율이 높으면 한나라당이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논란을 벌이는 것”이라며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이 많이 허물어진 것 같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선관위의 행태에 대해 지적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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