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지대 인천, 소녀들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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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거리>와 <고양이를 부탁해>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비슷한 말이지만 개념상 차이가 있다. 공간이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반면, 장소는 개인의 기억과 흔적이 남아있는 특정한 곳을 가리킨다. 대개 현대의 대도시는 공간이지 장소가 아니다. 시간의 때가 묻은 장소는 누추한 청산 대상으로 전락해 개발과 재개발의 거센 물결을 피할 수 없다. 기억과 흔적이 담긴 집과 골목, 거리가 사라진 공간에는 성냥곽 같은 아파트나 세계의 도시를 비슷비슷해 보이게 만드는 초고층 건물들이 들어선다. 근대화 자체가 장소 상실의 역사이며,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해 점차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는 첨단의 삶은 장소의 실향민을 만들어낸다.

[명작의 재구성]경계지대 인천, 소녀들의 성장기
인천의 명물인 ‘차이나타운’의 옛날과 현재 모습. 항구이자 공장이 밀집한 인천은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경계지대이다.

인천의 명물인 ‘차이나타운’의 옛날과 현재 모습. 항구이자 공장이 밀집한 인천은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경계지대이다.

현실에서 사라지는 장소는 예술 속에서 기억된다. 예술은 시간을 보존하며, 장소의 아우라를 간직한다. 사진과 미술도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예술은 공간에 깃든 당대의 생활상을 기록해 놓은 일종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정희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1979년)와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년)는 인천이란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소녀들의 성장기인 두 작품에서 인천이란 다층적인 공간은 다양한 이야기의 결을 제공하면서 ‘장소 특정적’인 예술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이 이야기들은 인천이란 도시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차이나 타운으로 이사온 실향민 가족
<중국인 거리>는 발표 시점보다 훨씬 이전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 6·25 전쟁 직후의 이야기다. 인천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작가 오정희는 차이나 타운의 모습과 그곳 사람들, 냄새와 분위기를 기억해 성장소설을 썼다. 10살짜리 소녀인 ‘나’는 실향민 아버지가 친구 소개로 석유소매업소 소장 자리를 얻으면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어딘지 모를 시골에서 새벽밥을 해먹고 이웃과 인사를 나눈 뒤 이삿짐을 실어줄 트럭을 기다리던 가족은 그날 밤 늦게야 도착한 트럭을 얻어 타고, 다음날 새벽 중국인 거리의 끝자락에 있는 허름한 적산가옥에 도착한다. 중국인 거리는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부두로 이어진다.

나에게 중국인 거리는 특별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부두 끝까지 들어오는 탄차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시커먼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산다. 집 짓는 데 필요한 해인초 끓이는 냄새는 배고픈 아이들의 회를 동하게 만들어 속을 뒤집어놓는다. 중국 사람들은 무섭고 지저분하다. 어른들이 애써 못본 척하는 중국인들은 '밀수업자, 아편쟁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는 쿠리,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간을 내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으로 아이들에게 각인됐다. 여기에는 또 양공주가 살고 있다.

나는 치옥이란 친구를 사귄다. 치옥네 이층에는 양공주 매기언니가 검둥이 미군, 백인 혼혈인 딸 제니와 함께 살고 있다. 계모에게 매를 맞는 치옥은 정신지체인 제니를 인형처럼 갖고 놀면서 자기도 크면 양갈보가 되겠다고 한다. 나와 치옥에게 동경의 대상인 매기 언니의 방에는 미제 비스킷과 향수병, 페티코트, 속눈썹, 유리알 브로치, 세줄짜리 진주목걸이 등이 있다.

매기와 상반되는 지점에는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이 있다. 어머니는 중국인 거리로 이사를 올 때 일곱째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여덟째를 임신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으면 죽을 것처럼 보이는 데도 수채구멍에 거꾸로 엎드려 심한 토악질을 한다. 할머니는 엄마의 가까운 친척이다. 시집간 지 석달 만에 남편이 자기 여동생과 바람이 나자 집을 나와 조카딸에게 얹혀 살면서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거들어준다. 할머니가 냉정하고 야멸찬 이유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기 때문이란다.

중국인 거리에서 보낸 3년여의 시간 속에서 나의 주변 여성들의 삶은 점차 변화해 간다. 검둥이와 결혼해서 미국에 가게 됐다고 좋아하던 매기 언니는 검둥이에 의해 이층 베란다에서 길바닥으로 던져져 숨을 거두고, 제니는 고아원으로 간다. 치옥은 아버지의 다리가 잘린 뒤 부모가 타지로 떠나면서 미장원에 맡기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지친 표정으로 파마약을 섞는다. 할머니가 빨래하다가 갑자기 쓰러지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의 끝에 “늙마에는 영감님 곁이 최고”라는 말과 함께 할머니를 택시를 태워 그 집으로 보낸다. 할머니의 반닫이에서는 줄여 입던 아버지의 헌 내의, 몸뻬, 항라와 숙고사, 동강난 비취 반지, 녹슨 구리 버클, 왜정 때의 백동전, 색실 등이 나온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면서 여덟째를 낳는다. 그리고 열기와 어지럼증, 묵지근한 기운을 느끼던 나는 초경을 한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화자의 시선에 늘 어른거리는 건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 덧창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젊은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다. 무표정하고 노란 중국 남자의 얼굴은 삶의 비애와 공허를 담고 있다. 전쟁 직후의 폐허,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인천 차이나 타운을 배경으로 작가는 1950년대를 살았던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수놓듯이 꼼꼼하게 묘사했다. 비유와 상징, 복선, 공감각을 동원한 작가의 단단한 문체는 마른 미역이 물에 풀리면서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처럼 단편의 짧은 분량이면서도 당대의 모습을 독자의 머리 속에 풍성하게 풀어놓는다.

소설 <중국인 거리>에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겹쳐지는 건 인천이라는 배경과 소녀들의 성장기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두 작품 속 이야기는 50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고, 글과 영상이라는 매체의 차이도 있다. 그럼에도 인천이라는 도시는 두 작품을 연결해준다. 일제의 수탈정책에 따라 항구이자 공단으로 개발된 인천은 중국과 가까워서 공산화 이후 많은 중국인들이 건너와 차이나 타운을 형성했다. 이곳은 기회와 일자리를 찾아온 뜨내기, 이방인들의 땅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교차한다. 항구와 신공항이 자리잡은 인천의 이미지는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출발지이자 경계지대이다.

여상 졸업생 5명의 좌충우돌 이야기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의 한 여상을 갓 졸업한 스무살짜리 다섯 친구의 이야기다. 혜주(이요원 분)는 ‘빽’으로 서울 강남의 한 증권회사 사환으로 취직했다. 유리창을 깨뜨려가며 싸우던 부모가 이혼하면서 집에서 독립한 혜주는 고시원을 거주용으로 개조한 원룸에 입주해 드디어 ‘서울특별시민’이 된다. 태희(배두나 분)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에서 일한다. 그녀는 또래의 정신지체 시인의 구술을 타이핑해주는 자원봉사를 하는데 아버지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봉사냐”며 딸을 깔아뭉갠다. 태희는 아버지의 강요로 가게에서 개량한복을 입어야 한다. 지영(옥지영 분)은 인천의 슬럼가에서 병석에 누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다. 그녀의 집 지붕은 조금씩 내려앉지만 주인은 눈도 꿈쩍 않는다. 학교 성적이 좋았음에도 아무 자격증도, 신원 보증을 해줄 부모도 없는 지영은 취직길이 막혔다. 그리고 이들의 친구인 중국인 쌍둥이 온조와 비류가 있다. 이들은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길에서 판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유가 교차하는 스무살 여성들의 심리를 그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유가 교차하는 스무살 여성들의 심리를 그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혜주의 스무번째 생일에 모인 그녀들은 즐거운 시간을 지낸다. 마음껏 술과 담배를 즐기고, 검정색 립스틱과 뽕브라를 선물로 주고받으면서 제도권 교육을 벗어난 자유를 만끽한다. 지영은 거리에서 주운 새끼고양이에게 티티란 이름을 붙여서 혜주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키울 자신이 없는 혜주는 다시 지영에게 고양이를 돌려준다. 혜주는 서울에 취직함으로써 퇴근길 인천행 지하철에서 아저씨들이 풍기는 돼지갈비 냄새를 벗어나 신분상승을 이룬 것으로 착각한다. 착한 남자친구 대신 회사의 남자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동대문시장에서 옷을 사고, 라식 수술을 받는다.

지영은 돈을 빌리기 위해 혜주를 찾아가는데 한시간동안 기다리다가 허탕을 친다. 대신 태희에게 돈을 빌린 지영은 핸드폰을 산다. 그녀의 꿈은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그녀는 이웃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신공항 식당의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다. 다섯 친구의 두번째 모임에서 잔뜩 멋이 든 혜주와 가뜩이나 위축된 지영은 말다툼을 벌이고 서먹한 사이가 된다. 태희는 지영과 혜주를 화해시키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지영에게 연락이 안되자 태희는 지영의 집을 찾아가고, 비로소 지영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비류와 온조의 자취집에서 세번째 모임을 갖던 날, 그녀들은 옥상으로 몰려나갔다가 문이 잠겨서 열쇠수리공이 오는 아침까지 밤새 추위에 떤다. 다른 친구들이 늦잠을 자는 사이, 먼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 지영은 자신의 집 지붕이 무너졌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깔려 죽은 것을 알게 된다. 사건 진술을 위해 경찰서로 가던 지영은 태희에게 고양이를 맡긴다. 지영은 “네가 바라던 대로 귀찮은 노인네들 죽었으니까 잘 됐지”라는 형사의 말에 진술을 거부하고, 그로 인해 소년원으로 간다.

혜주는 혜주대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증권사의 유능한 여성팀장은 혜주가 야간대학을 다닐 생각이 없다고 하자 “평생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거냐”고 핀잔을 준다. 미모와 발랄함으로 인기가 높던 그녀는 대졸 여사원들이 들어오자 찬밥 신세가 된다. 혜주는 한 번도 어울리지 않았던 여직원회에 나간다. 대졸 여사원과 달리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는 그들은 “장이 안좋으면 우리는 (스트레스 받는 직원들에게) 계속 커피를 타줘야 하는 자판기”라고 자조하면서 낄낄 대고, 혜주는 정신 없이 취한다.

자신의 꿈과 취향이 무시되고, 딸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던 태희는 집을 나가서 온 세계를 떠돌면서 사는 것을 꿈꾼다. 그녀는 가족들 몰래 짐을 싸고, 찜질방에서 일한 일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집에서 훔친 뒤 자신이 키워오던 지영의 고양이를 비류와 온조에게 맡긴다. 지영이 출소하던 날, 문 앞에서 기다렸던 태희는 함께 외국으로 떠나자고 한다. 신공항 출국장에 선 두 사람의 얼굴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

고양이 같은 스무살, 그녀들의 비밀암호
영화 속의 차이나 타운은 과거와 달리 화려하고 번듯해졌다. 비류와 온조는 중국인 꼬마들과 중국어로 대화를 나눈다. 국제여객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보다 큰 보따리를 들고 드나든다. 선원을 알선해주는 직업소개소에는 동남아인들이 득시글거린다. 인천은 여전히 거쳐가는 곳이고,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곳이다. 이런 도시에서 소녀시대를 마감하고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딛는 그녀들은 독립적이면서 불안하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고양이 같은 스무살, 그녀들의 비밀 암호’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호기심 많고 수줍어하면서 독립성이 강한 고양이는 젊은 여성의 상징이다. 지영의 고양이는 혜주에게서 다시 지영에게로, 태희에게로, 비류와 온조에게로 간다. 고양이는 이들의 자아이자 미래에 대한 꿈이다.

영화는 스무살 여성의 일상과 문화를 경쾌하게 보여준다. 핸드폰 문자, 디카, 술과 담배, 동대문 패션타운의 야간쇼핑, 달밤에 입에다 칼을 물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미래의 남편이 보인다는 놀이까지 세부를 쌓아올려 작품을 완성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이들의 삶을 떠나지 않는 소외와 고통을 보여준다. 태희는 가족사진에서 자신의 얼굴을 잘라낸 채 집을 나온다. 지영은 면접을 보러 간 중소기업에서 “낮술은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혜주는 학력이란 장벽 앞에서 좌절한다. 중국인인 비류와 온조는 좀 웃기고 속을 알 수 없는 이방인이다.

이 영화는 인천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일부 시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로 꼽으면서 다시 보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경계지대로서 인천의 아우라가 오정희의 조숙한 소녀, 정재은의 고양이 같은 숙녀들을 탄생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명작의 재구성’연재를 마칩니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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