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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낚시통신>과 <제49호 품목의 경매>

변화의 조짐은 작은 단서로부터 온다.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몰고 온다는 카오스이론의 비유처럼 새로움의 시작은 소박하다. 윤대녕의 단편 <은어낚시통신>(1994년)은 나비의 날개짓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신선하면서 시적인 문체, ‘은어낚시모임’이라는 소외된 자들의 비밀조직,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듯한 환상성, 모든 체제의 억압을 거슬러 생명의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인해 높은 평판을 받았다.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 주인공 에디파 무스의 심경을 대변하는 그림. 스페인 출신의 망명 작가 레메디오스 바로가 그린 ‘지구의 덮개를 수놓으며’(1961년)에서 원형탑 꼭대기에 갇힌 연약한 소녀들이 짜는 태피스트리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 주인공 에디파 무스의 심경을 대변하는 그림. 스페인 출신의 망명 작가 레메디오스 바로가 그린 ‘지구의 덮개를 수놓으며’(1961년)에서 원형탑 꼭대기에 갇힌 연약한 소녀들이 짜는 태피스트리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생물학적 본능
게오르그 루카치의 문학관에 의지해 문학세계를 일궈온 평론가 김윤식씨는 이 짧은 소설을 놓고 공산주의 붕괴 이후 자신의 가치관 혼란과 지향점의 상실을 보충해준 소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모천회귀 본능을 가진 은어라는 존재를 통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이성도 의지도 아닌 생물학적인 본능에 있다고 말하는 점 때문이다. 인간이 지고의 존재라고 생각해온 가치관은 윤대녕의 소설을 통해 ‘인간은 벌레다’라는 가치관으로 변화한다. 여기에 생태주의, 포스트휴머니즘 같은 새로운 가치들이 들어 있다.

<은어낚시통신>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작품을 시작하면서 은어낚시와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소개한다.

“내가 태어나던 1964년 7월 12일에 아버지는 울진 왕피천에서 은어낚시를 하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그는 왕피천과 호산 기곡천, 그리고 양양에 있는 남대천으로 계류낚시를 즐기러 가곤 했다. 그리하여 그날 칠월의 무더위 속에서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서 나를 낳았던 것이다. 그날따라 조황이 좋았던지 아버지는 바구니 가득 은어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강보에 싸인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이놈이 크면 함께 은어낚시를 가야지. 나는 그 소리에 잠이 깨 마구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런 서른 살의 나는 삶에 지쳐 있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다. 예술사진으로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한 후 광고사진을 몇 년 하다가 그것도 지겨운 생각이 들던 차에 평소 안면이 있던 신문사 사람의 제안으로 전국의 낚시터를 안내하는 ‘길 따라 물 따라’라는 연재기사를 쓰면서 풍경사진으로 진로를 바꾸던 중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아파트 우편함에서 발신자가 ‘은어낚시통신’이라고 찍힌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밤 11시쯤, 한 낯선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그것이 “은어낚시모임에서 보내는 초대장”임을 알게 된다. 봉투를 뜯자 거기에는 커티스의 ‘호피인디언’이란 사진 작품을 복제 인쇄해서 만든 엽서가 있고, 뒷면에 화자를 께름칙하게 만드는 문구가 쓰여 있다. 

“지난 여름 귀하께서 신문에 게재하신 은어낚시 기사가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귀하를 우리 모임에 참석시키자는 제안을 하도록 했습니다. 귀하께서는 수년 전 한 여자와 만나고 또 헤어진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만일에 그 사람을 기억하시게 되고 더불어 만나고 싶으시다면 아래에 적힌 날짜와 시간에 지정된 장소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암호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 익명의 지하집단입니다. 은어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장(紋章)입니다.”

새벽에 잠을 깬 나는 오래 전 어느 날 커티스의 사진집을 선물했던 모델 청미를 떠올린다. 광고사진을 찍던 시절, 아직 날씨가 쌀쌀한 초봄에 제주도 성산포에 수영복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 두 사람에게 “바다는 차라리 사막처럼 건조해 보였다.” 돈벌이로 광고사진을 찍던 나도 그렇거니와 청미는 억지미소를 지으면서 차가운 바닷물에 수없이 드나들었고 저녁이면 술시중까지 들었다. 

<은어낚시통신>의 무대가 된 홍대앞 카페.

<은어낚시통신>의 무대가 된 홍대앞 카페.

늦은 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나와 청미는 삼척에서 포항까지의 바닷길과 은어낚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아무 뉘우침도 약속도 없이” 하나가 된다. 서울에 온 뒤에도 형식적인 만남이 이어졌지만 청미는 나에게 “사막에서 사는 사람, 상처에 중독된 사람, 감정에 나약한 척하면서 사실은 무모하고 비정한 사람, 무서운 사람”이란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은어낚시모임’이 지정한 약속시간이 되자 나는 광화문의 카페 ‘텔레폰’으로 나간다. 그리고 같은 여자의 전화를 받고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에서 그녀의 빨간색 스포츠카에 탄 뒤 서대문, 공덕동 로터리, 서강대 앞을 지나서 홍대앞 어두운 카페촌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기묘한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모임 구성원이 모두 64년 7월생 동갑내기임을 알려준 그녀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회귀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또 무명배우, 잡지기자, 대학강사, 화가, 건축가, 수련의, 언더그라운드 가수, 시인 등으로 구성된 자신들의 모임에 대해 말해준다.

“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요. 하지만 역시 삶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아무튼 우리는 한두달에 한번쯤 은밀히 모였다가 헤어지곤 해요. 어떻게 보면 두 겹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죠. 현실적인 삶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는 살아지지 않으니까. 우리가 은어를 문장으로 한 것도 다른 뜻이 아녜요. 말하자면 우린 여기서 거듭나기 연습을 해요.”

모임이 열리는 폐점 카페에서 나는 십여 명쯤 되는 64년 7월생들이 수십 개의 촛불을 켜놓은 채 술잔을 들고 누워 있거나, 반라가 되어 서로 껴안고 있거나, 기타를 치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각자 제각각 풀어져 있는 모습을 본다. 저마다 피스(peace), 피스라고 뇌까리는 그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풀잎 타는 냄새가 떠돌고 있다. 그곳에서 몇 년 만에 청미와 마주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란 중인 은어처럼 입을 벌리고 무섭게 몸을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 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간다.

언더그라운드 문화, 자연으로의 회귀
이 소설은 민주화라는 목표를 상실한 1990년대 한국의 청춘들을 사로잡았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게 한다. 로큰롤, 술, 대마초, 섹스, 그리고 평화는 분명 존 레넌이 베트남전에 대립했던 1960년대 미국식이다.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자연으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 역시 낯설지 않다. 작가는 이런 히피즘의 분위기를 양양의 남대천과 홍대앞 카페의 밤, 그리고 당시 새로운 소통방식으로 각광받던 PC통신에 빗댄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제목 아래 묶어냄으로써 한국 청년문화의 변화를 증언한다. 

<은어낚시통신>을 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세계적인 명작은 토마스 핀천의 장편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1966년)다. 다소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인 이 작품에서 에디파 무스라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주부는 유언장의 형태로 피어스 인버라리티라는 옛날 애인의 호출을 받고 자신이 몰랐던 이면의 세계를 탐구하는 정신적 여행을 떠난다. 1960년대 진보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버클리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전역을 오가는 오디세이를 통해 그녀는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수백년간 관통하면서 정부의 공식 우편제도와 별개의 지하 우편제도인 ‘트리스테로’를 운영해온 소외된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닫혀 있던 자아를 깨닫고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이론’을 끌어와 점점 동질화하는 세계의 변화를 촉구한다. 

터퍼웨어 파티에 다녀온 에디파에게 사망한 피어스의 변호사 메츠거로부터 공동 유산관리인으로 지정됐다는 편지가 온다. 에디파의 남편인 무초 마스는 중고자동차 영업을 하다가 혼란을 느끼고 KCUF(거꾸로 하면 욕설이 된다)란 방송국의 DJ로 일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던 에디파는 피어스가 살았던 LA 근처 샌나르시소로 떠나기에 앞서 자신이 첨탑에 갇힌 라푼첼이고,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 피어스를 향해 금발의 긴 머리채를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해골 모양의 벽보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북동쪽 패서디나 52번 고속도로변에 붙어 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해골 모양의 벽보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북동쪽 패서디나 52번 고속도로변에 붙어 있다.

샌나르시소에 도착한 에디파는 변호사 메츠거, 모텔 관리인인 마일스와 그가 참여하는 록그룹 파라노이스 멤버들을 만난다. 모텔방의 텔레비전에서는 메츠거가 베이비 이고르란 이름의 아역배우로 출연했던 영화가 나오는데 이때부터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샌나르시소는 피어스가 만들어내다시피 한 도시다. 그곳에는 그가 절반의 주식을 소유한 요요다인 항공우주회사와 필터공장 등이 있고, 에디파는 피어스의 유산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에디파가 예민해지기 시작한 것은 메츠거와 함께 스코프란 낯선 술집에 갔을 때부터다. 요요다인 직원인 듯한 사람들이 W.A.S.T.E.란 이름의 사설 우편제도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본 에디파는 그들의 문장(紋章)으로 사용되는 약음기가 달린 나팔을 발견한다. 이어 피어스가 개발사업을 벌였던 팬고소 호수에 간 에디파와 메츠거는 호수에서 건져낸 사람들의 뼈를 목격한다. 이들은 랜돌프 드리블레트란 사람이 연출한 ‘전령사의 비극’이라는 잔혹한 시대극을 보러가는데, 이 연극에는 일군의 경비병들이 살해돼 호수에 던져진 장면과 ‘트리스테로와 밀약을 맺은 사람들’이란 대사가 나온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의 비밀이 자신을 첨탑에서 꺼내줄 것이란 느낌을 갖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추적을 시작한다. 연극의 원작인 화핑거 희곡집을 찾아내지만 원본에는 트리스테로란 말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다시 찾아간 팬고소 호수의 안내판에는 ‘1853년 웰스 파고 앤 컴퍼니(우편회사) 직원 열두명이 기이한 검은 제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약탈 무리와 용감하게 싸웠다’는 설명이 들어 있다. 에디파는 죽은 피어스가 남긴 우표를 관리해온 젱키스 코헨을 만나서 W.A.S.T.E.란 문구가 들어있는 우표의 존재와 1300년께 유럽에서 생겨났다가 비스마르크 정부로 흡수된 민간 우편배달 조직인 툰과 탁시스, 위조우표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에디파가 알아낸 사실은 이렇다. “트리스테로는 유럽에서 툰과 탁시스 우편제도와 대결했으며, 그 상징은 약음기가 달린 우편 나팔이다. 1853년 이전 미국에 등장했고, 검은 옷을 입은 무법자나 인디언으로 가장해서 포니 익스프레스, 웰스 파고 앤 컴퍼니 등의 공식 우편제도와 맞섰다. 지금은 기묘한 성적 취향을 지닌 사람들과 맥스웰의 수호정령의 존재를 믿는 발명가들 사이의 정보 소통 수단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살아남아 있다.”

팬고소 호수에서 발견된 뼈는 트리스테로의 우편배달부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맥스웰의 수호정령’은 또 무엇인가. 술집 스코프에서 약음기가 달린 나팔을 그리던 요요다인의 엔지니어 스탠리 코텍스로부터 거기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 고안해낸 맥스웰의 수호정령은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이론)에 예외를 제공하는 것이다. 에너지의 변형과정에서 엔트로피(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양)가 늘어나면 그 체계는 파멸되지만, 맥스웰의 수호정령이란 가상의 존재가 동질화(변형)를 막음으로써 파멸을 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동질화에 대한 비판적 의미로 쓰인다.
 

미국 중산층의 불안감과 허위의식
에디파의 여정이 계속되는 사이에 남편인 무초는 LSD에 빠지고, 공동 유산관리인 메츠거는 한 소녀와 눈이 맞아 도망치며, 에디파의 정신과 의사는 아예 미쳐버린다. 주변 남성들의 파멸과 달리 에디파는 피어스의 유산을 추적하는 가운데 모든 단서들이 트리스테로의 비밀을 전승하는 데로 모아지며 W.A.S.T.E.의 의미가 ‘우리는 고요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We Await Silent Tristero's Empire)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유산처리를 위해 피어스의 수집 우표를 경매에 부치기로 한 날, 제49호 품목으로 지정된 위조우표를 사러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트리스테로의 역사를 좇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에디파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 중산층의 불안감과 허위의식, 그들을 지탱해온 유럽과 미국의 주류 역사에서 무시되고 소외된 이들의 존재, 대안적 세계를 꿈꾸는 저항성 등이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지점이다. 현실의 장막을 들추고 숨겨진 세계의 비밀을 들여다보면서 생물학·물리학의 용어를 빌려 기성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은어낚시통신>과 공명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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