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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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아내가 결혼했다>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레테(망각의 강)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 강 건너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오직 그 새로운 사랑만으로 남은 삶을, 그 꿈과 기억들을 채워가야 한다.”

이문열의 연애소설 <레테의 연가>(1983년)를 상징하는 도입부의 한 구절이다. 드물게 쓴 연애소설에서 작가는 결혼에 대해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의무를 부과한다. 잡지사 여기자인 희원이 우연히 옛 교사 시절의 동료이자 화백인 민승우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10살 이상 연상인 유부남과의 사랑이 순탄할 리 없다. 심한 가슴앓이를 하던 끝에 승우는 희원을 자신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한다.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세태를 풍자한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아내가 결혼했다>(아래)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세태를 풍자한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아내가 결혼했다>(아래)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희원은 “그 (레테의) 강가에서 나를 건너 줄 사공을 기다리고 있으며” “강 이편의 그 무엇에도 연연함이 없이” “홀가분한 출발을 위해 지난 세월과 마주하고” 서 있다. 작가는 “지성이나 문화의 탈을 쓴 채 갖가지 형태의 성적 부패를 부추기는 주장들이 무성한 시대의 억균제”(머리말)로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육체적 순결, 결혼생활의 성실성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의 보루였다. 

그러나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만큼 빠르게 달라졌다. 세기말에 나온 이만교의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0년)는 대담하면서 다소 과장되게 세태의 변화를 그렸다. 결혼이 ‘레테’가 아니라 ‘미친 짓’이 된 이유는 더 이상 어떤 억균제도 욕망의 감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쾌락과 물질적 풍요를 향한 세속적 추구는 도덕이나 관습의 심리적 제재를 훌쩍 넘어선다.


사랑과 결혼의 이데올로기 급변
대학 시간강사인 ‘나’는 친구 규진의 결혼식 사회를 봐주는 대가로 신부의 친구인 ‘그녀’를 소개 받는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나타난 그녀와 나는 정해진 순서대로 영화를 보고 스테이크를 먹은 다음 차를 마신다. 그리고 전철이 끊어질 시간이 되자 자연스럽게 여관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결혼 상대로 다섯 명의 남자를 놓고 고민 중이다. 첫째는 다소 못생기고 시댁 식구들의 높은 콧대를 견뎌야 하는 의사, 둘째는 보잘 것 없지만 귀여운 연하의 샐러리맨, 셋째는 일류대 출신에다 분양받은 아파트가 있으나 고지식한 샐러리맨, 넷째는 전원주택과 고상한 취미를 가진 편모 슬하의 연구원, 마지막으로 솔직하고 호남형이며 테크닉이 뛰어난 반면 기약 없이 셋방살이를 해야 할 것 같은 대학강사, 즉 주인공 ‘나’다. 결국 그녀는 의사를 택한다.

그러나 결혼한 지 두어 달만에 그녀는 “나, 결혼한 것처럼 보여?”라고 물으면서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나의 자취방에 나타난다. 그녀는 아침상 차려주고 “다녀오세요” 한 다음에 오전엔 헬스나 승마, 그리고 오후엔 쇼핑하고 돌아와서 저녁상 맛깔스럽게 차려놓는 게 하루 일과인 의사 부인이다. 동시에 나를 끌고 백화점과 마트를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을 알뜰살뜰 사들여 자취방에 또 하나의 신혼살림을 차린다. 

격주로 찾아오던 그녀가 3주째 연락이 없다. 나는 그녀가 진짜 연인처럼, 신혼부부처럼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으로 만든 앨범을 보면서 자신들의 행위가 현실을 견디고 싶어하는, 안간힘으로서의 ‘드라마 요법’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때 그녀일지도 모를 초인종이 울린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남녀 주인공이 보여주는 연애와 결혼은 냉소적이고 타산적이다. 냉소란 세계와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다섯 남자를 놓고 결혼 상대를 저울질하자 남자는 “일단 나를 비롯해서 가난한 자식들은 빼!”라고 하며, 그녀의 남편에 대해 일말의 질투도 느끼지 않는다. 여자는 철저히 이중적이다. 그녀에게 결혼은 연인과의 만남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결혼은 소비사회 욕망의 연장선상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소설의 문체는 시종일관 ‘쿨’한 척하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정상’을 벗어난 사회적 심리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소비사회가 현대인들에게 불어넣는 가짜 욕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욕망이 뭔지 알지 못하고 물질만능주의에 휘둘린다. 여기에다 미디어는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을 만들어낸다. 현실감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마치 연기하듯이 살아간다. 그 결과는 획일화다. 각자 개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정교하게 주어진 메뉴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데 불과하다.  

[명작의 재구성]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 방정식

이 시대의 결혼은 이런 소비사회의 욕망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편안하게 사는 것은 지상과제다. 이것이 채워주지 못한 나머지 욕망은 가난한 애인과의 소꿉놀이 같은 살림에서 충족시킨다. 이런 이중성에는 아무런 내적 갈등이 없다. 분열된 정체성이 필요에 따라 연기하는 복수의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파와 포르노를 오간다. 이런 사회에서 결혼이란 남자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범죄”이며 “그 자체로 간통미수죄”인 것이다.

욕망이 속박을 벗어난 시대에 일부일처제 결혼이 성립하기 힘들다는 증거는 박현욱의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2006년)에서 명백하게 제시된다. 이 작품에서 아내는 한 남자와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해 다른 남자와 간통하는 ‘고전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의 이해를 구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중혼생활을 유지한다. 

영업관리자인 ‘나’는 프로젝트 때문에 외부업체의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인 그녀(인아)를 만난다. 레알 마드리드의 팬인 나는 그녀가 FC 바르셀로나의 팬임을 알게 되고, 신나게 축구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진다. 프로젝트가 끝난 날, 두 사람은 회식 자리에서 축구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인아의 집까지 가게 된다. 

나와 인아는 환상적인 연인이 된다. 그런데 인아가 때때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마다 술자리에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듯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그런 의심이 진짜로 밝혀지자 나는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곧 그녀에게 굴복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아내로서 인아는 완벽한 여성이다. 알뜰하고 상냥하고 살림과 요리솜씨도 뛰어나다. 술자리가 있는 날 연락이 안 되는 것만 뺀다면. 어느 날 아내는 경주에 1년짜리 프로젝트가 있어서 가야겠다고 나선다.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주말부부로서 반년간은 그럭저럭 행복했다. 그런데 아내가 폭탄선언을 한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녀의 요구는 이혼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머독이라는 인류학자가 전 세계의 각기 다른 인간사회 238곳을 조사한 결과 일부일처제를 유일한 결혼 제도로 채택하고 강요하는 사회는 겨우 43곳뿐이라고 했다는 근거를 들이대면서. 아내가 사랑하는 연하남 역시 “독점욕이나 질투심을 버리고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면 누구나 가능하다”면서 폴리가미(일처다부제)를 옹호한다.


아내를 잃기 싫은 ‘한 지붕 두 남편’
이번에도 나는 아내에게 굴복한다. 아내를 잃는 것보다는 반쪽이라도 갖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부터 아내는 주중에는 경주에서 연하남과, 주말에는 서울에서 나와 두 집 살림을 시작한다. 나는 복잡한 심경이지만, 아내는 두 남편과 두 살림, 두 시댁을 챙기면서 부지런하고 정열적으로 살아간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삼각구도가 낳은 비극을 담은 영화 <줄 앤 짐>, <글루미 선데이>.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삼각구도가 낳은 비극을 담은 영화 <줄 앤 짐>, <글루미 선데이>.

드디어 아내가 임신을 한다. 누구 아이인지 따져 묻는 나에게 그녀는 자신의 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내가 두 집을 공평하게 오가면서 출산과 산후조리를 한 뒤 나와 아내의 남편은 아내는 물론 아이의 사랑을 얻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벌이는 처지에 놓인다. 육아문제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자 아내는 세 사람이 한 집에서 같이 살자고 조른다. 아예 사람들의 눈길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자고 한다. 이번에도 나는 아내의 제안에 또 다시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이야기는 <아내가 결혼했다>가 처음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도 소개하듯이 영화 <줄 앤 짐>(감독 프랑소와 트뤼포, 1961년)이나 <글루미 선데이>(감독 롤프 슈롤, 1999년)에서는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가 펼쳐진다. 

<줄 앤 짐>의 무대는 1차 세계대전 직전의 파리. 독일인 줄과 프랑스인 짐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매력적인 여자 카트린을 동시에 사랑한다. 남자가 많았던 카트린은 순진한 줄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줄과 짐은 서로 적군이 되어 전장에 나갔다. 전쟁이 끝난 뒤 재회했을 때 줄은 짐에게 뜻밖의 부탁을 한다. 카트린의 정부인 알베르가 카트린과 결혼하려고 하니, 제발 그가 카트린을 빼앗기 전에 짐이 카트린과 결혼해 자신까지 함께 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짐은 줄의 집으로 들어가서 셋이 함께 산다. 그러다가 짐은 회사일 때문에 파리로 돌아갔고 사소한 오해가 생기면서 카트린과 헤어지기로 한다. 줄과 달리 짐은 카트린을 포기한 것. 그러나 짐이 옛 애인 질베르트와 결혼할 계획임을 안 카트린은 짐을 자동차에 태우고 끊어진 다리로 뛰어든다.

<글루미 선데이>의 삼각관계도 비극으로 끝난다. 193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선량하고 마음씨 좋은 레스토랑 주인인 유태인 자보에게는 아름다운 애인 일로나가 있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안드라스라는 새 피아니스트가 고용되고, 일로나는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안드라스는 일로나의 생일에 ‘글루미 선데이’란 곡을 만들어 선물한다. 두 사람이 밤을 보내고 돌아오자 밤새 일로나를 기다렸던 자보는 침통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완전히 가질 수 없다면 반쪽이라도 갖겠어.” 그 때부터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다. 어느 날 레스토랑을 방문한 빈의 음반 관계자는 ‘글루미 선데이’의 음반 제작을 제안한다. 음반은 크게 히트하고 레스토랑도 날로 번창한다. 그러나 이 음악을 들은 사람들이 계속 자살을 하자 안드라스는 괴로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설상가상으로 자보도 일로나를 좋아하던 독일 장교 한스의 모략으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다. 

어느 경우에나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는 완전히 잃어버리느니 반쪽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에서 불안정하게 유지된다. 그 자체는 만족이나 기쁨이 될 수 없으며,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인내와 희생에 바탕을 둔 배려일 뿐이다. 인아가 아무리 일부일처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결혼제도라고 주장해도 사랑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은 이미 사람들의 본능 속에 뿌리내린 만큼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쉽거나 자연스러운 일이 못된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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