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북한·남한의 경계인 ‘자이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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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와 <우리 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원정 16강 기록을 세운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국민들의 관심이 정대세 선수에게 쏠렸다. 박지성, 이청용, 이정수의 멋진 슛만큼이나 정대세의 눈물은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재일 한국인 3세로 태어나 북한 국가대표축구팀 선수로서 경기장에 선 정대세는 브라질과의 경기에 앞서 북한 국가를 부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면서도 분단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일 한국인 정대세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 서 있는 것일까.

재일 조선인 출신 북한 국가대표 축구팀 정대세가 월드컵 브라질전에 앞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재일 조선인 출신 북한 국가대표 축구팀 정대세가 월드컵 브라질전에 앞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재일 한국인의 기원은 한일병탄이 이뤄진 1910년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직접적으로는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됐다. 이 조약 이후 일본 정부는 국적 선택 자유의 원칙이라는 국제법상의 상식을 존중하지 않은 채 옛 식민지(조선) 출신자들의 일본 국적 상실을 일방적으로 선고했다. 1965년 한일협정이 맺어지면서 60만명에 이르는 재일 조선인의 반 수 이상이 협정에 따른 영주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한국적을 거부하고 광복 이전의 조선적을 유지한 자들은 영주권을 부여받지 못함으로써 불안정한 지위로 남게 됐다. 이들은 한일협정 이전까지 한국 정부가 재일 조선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은 것과 달리 북한은 자신들의 존재를 적극 포섭함으로써 친북적 성향을 띠게 했다. 

‘소수자’ 위치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
협정 이후에도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거주·교육·연금·취업 등 각 분야에서 제도적·법적 차별을 받았다. 더욱이 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일 조선인은 이중의 배제를 받는 소수자의 위치로 살아가게 된다.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의 기류가 높아지던 1960~1970년대를 거치면서 재일교포와 조선민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의 정치적 대립은 점점 심해진다. 분단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 정권의 대리전을 치른 셈이다. 그러나 2세대와 3세대로 내려오면서 각자 조국으로 생각하던 남한 또는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대신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일본에서 이민자로서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된다. 한국인과 조선인의 구분 대신 ‘자이니치’(在日)란 용어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들은 외국인의 지문 날인 거부나 참정권 투쟁을 벌이는 등 일본사회 내에서의 권리 투쟁을 강화해 나간다.  

이런 자이니치의 삶과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영화로 <박치기>(감독 이즈쓰 가즈유키, 2005년)와 <우리 학교>(감독 김명준, 2007년)가 있다. 일본 내의 한류 열풍에 부응해 만들어진 <박치기>는 일본인의 관심을 자기 주변에 늘 존재했으면서도 무관심한 존재인 재일 조선인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또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일본사회에 동화하는 대신에 여전히 ‘조선’이란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조선족 학교의 모습을 통해 민족과 국경이 사라져 가는 세계에서 정체성이 갖는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재일 조선인 청년들의 꿈과 좌절
<박치기>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1968년 교토다. 프랑스 68혁명이 일어난 1968년은 전 세계에서 기성의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보수화한 진보 세력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과 열기가 피어오르던 때다. 일본에서도 미국의 일본 점령과 계속된 주둔에 반대하는 전공투의 투쟁이 극점에 다다랐다. 한편에서 재일 조선인은 한일협정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소수자로 일본에 남느냐, 북송선을 타고 ‘조국’ 북한으로 돌아가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살던 교토·오사카·고베 등 간사이 지역에서 한국인은 멸시와 동정의 대상이 됐으며, 주류 사회로의 진입이 좌절된 젊은이들은 주먹세계에 발을 들이고 야쿠자 조직에 휩쓸리는 일도 많았다. 

1968년 일본 교토를 배경으로 재일 조선인 청년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영화 <박치기>.

1968년 일본 교토를 배경으로 재일 조선인 청년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영화 <박치기>.

영화는 이런 배경에서 조선인 청년들과 가족, 이웃 일본인들 사이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코미디와 멜로가 섞인 청춘물의 형식에 담아낸다. 도입부에서 교토의 조선고 학생들은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이 여학생 경자(사와지리 에리카 분)를 괴롭히자 이들과 난투극을 벌인다. 엉겁결에 그 싸움에 말려든 주인공 고스케(시오야 분)는 자신이 다니는 히가시고와 조선고 사이의 친선축구를 성사시키기 위해 조선고를 찾아간다. 그는 조선고 학생들이 연주하는 ‘임진강’ 멜로디에 이끌려 음악실을 기웃거리다가 경자를 만나게 되며, 한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경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던 고스케는 동네 술집청년 사키자키(오다기리 조 분)로부터 노래 ‘임진강’에 얽힌 사연을 듣는다. 북한 국가를 만든 박세영이 작사하고 고종환이 작곡한 ‘임진강’은 임진강을 바라보면서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남쪽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재일 조선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당시 인기밴드인 ‘더 포크 크루세이더’가 일본어로 번역해 불렀지만 북조선 노래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자유분방한 무정부주의자인 사키자키는 고스케에게 재일 조선인의 역사와 일본의 과오를 들려준다.

한편 경자의 오빠 안성(다카오카 소스케 분)은 교토에서 제일 가는 싸움꾼이다. 그는 축구를 잘하지만 일본에서는 대표선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북조선으로 가고자 한다. 공원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모여 안성의 환송식을 열어주던 날 그는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잘하겠습니다”라고 서툰 한국어로 인사하고, 고스케는 조선인들 앞에서 경자와 함께 ‘임진강’을 부르며 가까워진다. 

안성은 북한으로 떠날 결심을 한 뒤에도 끊임없이 폭력에 말려든다. 안성과 재덕 등 그의 친구들은 히가시고의 가라테 부원들과 날마다 싸우고, 오사카에서 온 깡패들까지 맞이한다. 이들의 싸움은 청춘의 열기를 발산하는 수단이나 이유 없는 반항의 표지처럼 경쾌하게 그려지지만 싸움의 밑바닥에는 한·일 간의 민족감정, 소수자로서의 삶에 대한 울분이 깔려 있다. 안성이 모르는 사이 그의 여자 친구인 볼링장 직원 모모코는 안성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고스케가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노래경연대회에 ‘임진강’으로 출전하기로 한 날이 다가온다. 그런데 안성의 친구 재덕이 오사카의 깡패들에게 당한 뒤 교통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조선인들은 모두 모여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중년의 한 조선인은 문상 온 고스케에게 일본인에 대한 민족감정을 드러내면서 “서류 한 장으로 이곳에 와서… 나마구 동굴을 누가 지었는지 알아? 국회의사당의 대리석, 누가 가지고 와서 누가 쌓아 올렸는지 알아?”라며 울부짖는다. 

화가 나고 슬퍼진 고스케는 거리를 헤매다가 방송국 노래경연에 지각한다. 그 사이 방송국 간부는 ‘임진강’이 금지곡임을 들어 출전을 방해하지만 “이 세상에 불려져서는 안 될 노래는 없다”는 담당 PD의 고집으로 ‘임진강’은 전파를 탄다. 고스케가 1절은 일본어, 2절은 한국어로 부르는 ‘임진강’이 울려 퍼지는 동안 안성과 친구들은 다시 일본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모모코는 안성의 아이를 낳는다. 이로써 고스케는 재일 조선인 사회에 한 걸음 다가서고, 안성은 북한행을 포기한 채 아버지가 된다.

<박치기>의 감독은 이즈쓰 가즈유키이지만 제작자는 재일 한국인 이봉우씨(씨네콰논 대표)다. 이씨는 <쉬리> <봄날은 간다> <공동경비구역 JSA> 등 한국영화를 수입해 일본에서 한류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감 어린 관심에 부응해 그는 한 세대 전 재일 조선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영화를 통해 일본 관객들은 재일 조선인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을 보게 된다. 무관심과 편견 속에 잊힌 그들의 삶을 재발견하는 건 수입 영화를 본 한국 관객도 마찬가지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는 한국의 말과 글, 역사를 지키려는 홋카이도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의 눈물겨운 싸움을 담았다. 사진은 영화에서 고급부 학생들이 배를 타고 북한으로 졸업여행을 떠나는 장면.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는 한국의 말과 글, 역사를 지키려는 홋카이도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의 눈물겨운 싸움을 담았다. 사진은 영화에서 고급부 학생들이 배를 타고 북한으로 졸업여행을 떠나는 장면.

한편 <우리 학교>에는 <박치기> 이후 한 세대를 건너뛰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들의 삶과 생각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김명준 감독이 일본 ‘혹가이도 조선 초중고급학교’에서 3년 5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우리말과 민족의식을 지키려는 조선 국적 학생, 교사, 학부모들의 치열한 삶을 담아낸 장편 다큐멘터리다. 원래 이 영화를 기획한 것은 김 감독의 아내인 조은령 감독이다. 칸 영화제 단편 부문에 처음 초청된 <스케이트> 등으로 주목받던 조 감독이 갑작스런 사고로 숨진 뒤 촬영감독이자 남편인 김 감독이 제작을 승계한 것이다.  

우리말과 조선 의식을 지키려는 학교
2년 이상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4년 1월부터 2005년 3월까지 조선학교의 사계절을 담아낸 이 영화는 폭설 때문에 개학이 하루 늦어지는 데서 시작해 고급부 3학년생 22명의 졸업식으로 끝이 난다. 노래경연, 운동회, 전국체전, 조국(북한) 방문여행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1년 ‘학사 일정’은 여느 학교와 같을 수 없다.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보내는 것은 정치·경제·사회적 불이익은 물론 우익으로부터의 신변 위협까지 감내해야 하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1세들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잊지 않기 위해 사비를 들여 곳곳에 조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자이니치 60만명 가운데 아이를 조선학교에 보내는 가족은 약 4만명(학생수 1만4000명)에 불과하다. 한때 540여 개나 된 학교가 80여 개로 줄면서 통학이 불가능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데다 학비는 일반 학교의 5배(교사 월급은 5분의 1)다. 이상한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날이면 학교문을 굳게 닫아 걸어야 한다. 입시경쟁과 동떨어진 교과 과정을 공부하기 때문에 주류사회 진입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도 굳이 조선학교를 택하는 건 국적을 밝히는 순간 집단따돌림(왕따)으로 전락하는 일본 사회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오토상·오카상이 아니고 아버지·어머니라고 부를 때부터 조금 남하고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언제 처음 깨닫게 됐는지 질문에 조성래 학생(고급부 3년)이 한 대답이다. 추운 날씨에도 치마저고리를 입는 이유에 대해 오려실 학생(고급부 3년)은 “뭔가… 조선사람으로서의 의식이 커진다고 할까, 나에게 용기를 준다고 할까…”라고 말한다.  

‘우리 학교’의 삶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부모와 떨어진 어린 학생들은 선생님 품에서 잠이 들고 언니와 오빠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교내합창대회를 앞두고 선생님은 “1세 동포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고 한다. 일본인 축구 코치는 “지금까지 해 온 세계와는 영 다른 세계가 있어서” 이 학교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만경봉호를 타고 ‘조국’을 방문하는데 이 역시 남북관계의 기류에 따라 민감한 영향을 받는다.

이런 우리 학교에서의 삶을 거쳐 아이들은 자신을 완전한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소년원에 있을지도 모른다” “남조선에서는 내면적인 것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되지만 재일동포들은 내면에서 지키고 있어도 외면으로 나오지 않으면 결국 일본 사람같이 된다”는 학생들의 말은 그들이 갖가지 어려움에도 ‘우리 학교’를 고수하는 이유를 대변한다. 

다시 정대세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경북 의성이 고향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 국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 우리말을 할 줄 알며 민족정신을 잃지 않게 하겠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북한 대표선수를 꿈꾸게 됐다. 그 꿈을 이룬 그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소속팀을 일본 가와사키 프론탈레에서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으로 이적했다.
 
“나의 국적은 한국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자이니치”라고 밝힌 그의 인생은 재일 한국인사를 축약해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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