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도심 속 창작의 산실, 연희창작문학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연희문학창작촌 ㅣ 박경리문학관

환한 조명 아래 소설을 읽는 여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소금은 물속에서 존재할 때 스스로를 과감하게 버리고 망각한다. 버림으로써, 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진실 되게 드러낸다.”

[탐방]도심 속 창작의 산실, 연희창작문학촌

한 문장을 읽고는 여자가 멈춘다. 잠시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여자는 앞을 응시하며 조용히 숨을 고른다. 음악이 멎자 여자의 입이 다시 열린다. “나 자신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찾았다. …”

여자가 한 페이지를 다 읽자 무대가 침묵과 어둠에 잠긴다. 이번에는 시를 읽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명은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만을 응시한다.

“침대에서 어둠과 빛으로 뒤척인 우울의 날 / 붉은 장미가 몸을 뒤집고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났다.…” 목소리가 사라지자 현악사중주의 느린 선율이 흐른다. 여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시와 소설이, 침묵과 소리가, 인간의 목소리와 악기의 흐느낌이 서로를 휘감아 도는 모양새다.

여러 개의 목소리가 서로 꼬이고 겹치다가 다시 풀려나가면서 하나의 음악적 전체를 완성하는 대위법적 구조의 합창곡을 연상시킨 이 무대는 한 시간쯤 계속됐다. 지난 6월 24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문학창작촌 야외무대의 풍경이다.

연희문학창작촌은 매달 넷째 주 목요일 저녁에 ‘연희목요낭독극장’을 열어 왔다. 이날 각기 자신의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와 소설 <물>의 몇 대목을 낭독한 시인 고형렬씨와 소설가 김숨씨는 올해 2월부터 시작한 낭독극장의 다섯 번째 손님이다.

목요낭독극장은 기획과 연출을 작가들이 직접 한다. ‘물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날 무대는 시인 김정환씨가 연출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로는 문단에서 손꼽히는 작가인 김씨가 연출한 때문인지 밴드나 인형극, 연극이나 플라멩코 공연을 하기도 한 이전 낭독극장과 달리 ‘물의 날개’는 음악으로만 채워졌다. 낭독극장은 연희문학창작촌이 작가와 독자 간 소통을 위해 열리는 행사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곳에 와서 작가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소나무 숲 아래 마련된 객석에서 한 시간 동안 낭독극장을 지켜본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배현진(25)씨는 “삶에서 나오는 고통과 괴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 그동안 혼자 꾸준히 시를 써 왔다.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작가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연희동 주택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연희문학창작촌은 지난해 11월 5일 개관했다. 대지면적 6915㎡ 터에 연면적 1480㎡ 규모의 건물 4개 동이 들어서 있다. 본래 이곳은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있던 자리였지만 시사편찬위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10년 가까이 방치돼 있던 것을 서울시 아트스페이스가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했다. 연희문학창작촌은 각기 ‘끌림’ ‘홀림’ ‘울림’ ‘들림’이라는 이름이 붙은 4개 건물에 모두 20개의 집필실을 마련하고 있다. 이 가운데 17개 실은 한국작가들을 위한 공간이고, 3개 실은 외국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스다.

입주 작가 선정은 매년 한 차례 이뤄진다. 올해의 경우 3월 2일 공고를 내 3월 26일 결과를 발표했다. 입주 작가 선정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입주 기간은 평균 3개월이다. 첫 입주는 올해 1월부터 시작됐다. 1월부터 3월까지 20여 명, 4월부터 6월까지 20여 명 등 40여 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머물렀다. 7월에 입주한 작가 17명은 9월까지 있게 된다. 한 해 동안 머물 입주 작가 신청을 연초에 모두 받아두었기 때문에 창작실은 내년 3월까지 예약이 끝난 상태다.

연희문학창작촌은 원주 토지문화관이나 인제 만해문학관과 달리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주택가에 터를 잡아 여느 시골 못지않게 조용하다. 방 크기에 따라 매달 3만~9만원의 관리비를 받고, 식사는 따로 제공되지 않는다. 작가들은 각 건물에 마련된 공동 주방 또는 개별 주방에서 자기 스케줄에 맞게 식사를 직접 해결한다.

“도심 속 창작 공간에서의 작업은 지방의 외진 곳에서 작업하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밀도감이 있다.” 4월부터 6월까지 이곳에서 생활한 시인 손택수씨의 말이다. 시업만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시인이 그러하듯 그 또한 따로 직장을 다니고 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창작촌에서 시작에 집중했다. 일상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일상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그가 지난 석 달 동안 이곳에서 작업한 시들은 올 가을 <나무의 수사학>이란 제목의 시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왼쪽부터 연희문학촌 입구, 문학촌 내 미디어랩, 작가들의 집필실인 ‘홀림’동. |정원식 기자

왼쪽부터 연희문학촌 입구, 문학촌 내 미디어랩, 작가들의 집필실인 ‘홀림’동. |정원식 기자

손씨와 같은 기간에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생활한 소설가 김애란씨는 “시골에는 시골만이 주는 집중력이 있고 도시에는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식사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게 어찌 보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 신체 리듬이 달라지는 작가들의 습성을 생각해 보면 시간을 좀 더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희문학창작촌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시인 안현미씨는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 희곡작가 등 다양한 문인들이 서로 어울리며 새로운 문학적 시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6월 26일 오후 분지 특유의 열기와 습기가 몸을 섞고 있는 원주시의 하늘 아래 서자 긴 장마가 시작된다던 전날 밤의 일기예보가 무색해졌다.

한 도시의 문화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그 도시를 규정하면 원주는 소설가 박경리씨의 도시다. 시외버스 정류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 ‘박. 경. 리’ 이름 석 자를 대면 운전사는 대뜸 “단구동으로 갈까요, 매지리로 갈까요?”라고 묻는다. 단구동은 1980년 이후 박씨가 살던 단구동 집터에 세워진 토지‘문학공원’이 있는 곳이고, 매지리는 회의와 창작 공간으로 쓸 요량으로 세운 토지‘문화관’이 있는 곳이다. 물론 박씨의 흔적은 단구동에도 있고 매지리에도 있다. 그러나 그가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오묘한 생각 품은 듯 청결하고 / 젊은 매같이 고독해 보인다”고 묘사한 “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매지리로 가자”고 말해야 한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는 말 그대로 산골이다. 시내를 빠져나와 충주 방향으로 20여 분을 달리면 오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토지문화관을 만난다.

초여름에 문화관에서 맞은편 백운산을 바라보면 숲은 물감을 쏟아낸 듯 흐드러진 초록빛으로 출렁이는데, 백운산 산등성이와 하늘이 만나는 선을 따라 그 빛에 시선을 맡기면 온몸이 자연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박경리씨가 이곳에 토지문화관을 연 것은 1999년 6월이다. 처음 그는 이곳이 생명과 환경에 대한 사유와 토론을 나누는 생태담론 생산의 장이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2004년까지는 주로 문화 예술 환경에 관한 심포지엄을 여는 장소로 사용됐다. 2004년 이후부터는 작가들을 위한 무료 창작 공간을 지원했다. 그 뒤부터 갈수록 창작 공간을 찾는 이가 늘어 지금은 귀래관과 매지사라는 이름의 창작 공간 건물이 들어서 있다.

생전에 박씨는 심포지엄과 창작 지원이라는 설립 목적을 철저하게 지켰다. 권오범 토지문화관 사무국장은 “선생은 이곳에 당신 작품을 두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도서관 한 쪽에 비치돼 있던 <토지> 한 질을 발견하고는 ‘다 치우라’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 소설가 박경리를 기리는 공간이 아니라 활발한 생태담론을 생산하는 곳이자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곳으로만 사용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토지‘문학관’이 아니라 토지‘문화관’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토지문화관에서 창작의 열정을 불태운 이들은 문인 350여 명과 예술가 180여 명, 해외작가 30여 명 등 560명이 넘는다. 초기에는 시인과 소설가 등 문인에게만 입주 자격을 주었으나 점차 연극, 사진, 미술, 음악 등으로 분야를 확대해 지금은 거의 모든 분야 예술인에게 개방돼 있다.

토지문화관 예술인들에게 있어 고독은 일상이다. 입지부터가 그렇다. 박경리씨가 문화관을 세울 터를 찾을 때 세운 원칙 가운데 하나가 ‘외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지문화관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전부다. 3월에도 오후 5시만 되면 사방이 깜깜해지고 건물 안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조명이 없는 토지문화관에서 휴대용 랜턴은 입주 예술가들의 필수품이다. 낮밤 구분 없이 시종일관 토지문화관을 감싸고도는 것은 수도원을 방불케 하는 정적과 평온의 기운이다.

6월 말 토지문화관에서는 16명의 예술가들이 창작에 몰입하고 있었다. 도심의 번잡함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서 예술가들은 창조력의 폭발을 경험한다. 4월부터 머물고 있는 소설가 송기원씨는 “60편 가까운 시를 썼다. 시상이 마구 쏟아진다”고 말했다. 한 달 가까이 생활하고 있는 소설가 오을식씨도 “글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25일 동안 단편 하나를 완성하고 장편 원고를 500장 썼다. 신기할 정도로 작업이 잘된다”고 말했다.

토지문화관은 무엇보다 박경리씨의 아우라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의 육신은 2년 전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아우라는 문화관 곳곳에 문학의 깊은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절감한다.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는 외국 작가들조차 여기서 어머니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나 자신도 어머니의 넉넉한 숨결을 호흡하고 있다.”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의 말이다.

손수 재배한 과일이며 채소로 입주 예술가들의 찬거리를 만들어 주던 고인은 유고시집에서 “우습게도 나는 / 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 / 모이 물어다 먹이는 / 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고 썼다. ‘어미’의 심정으로 예술가들을 바라보던 그는 이제 없다. 그러나 박경리라는 한국문학의 자궁 속에서 예술가들의 꿈은 여전히 무성하게 영글고 있었다.

연희문학창작촌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03-1

전화번호 02)324-4600

www.yeonhui.seoulartspace.or.kr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