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1세기 움트는 씨알 ‘함석헌 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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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함석헌학회 출범…사상 재해석 청년세대와 소통 목표

4월 5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 일단의 노학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4월 16일 발족하는 한 학회의 준비모임이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함석헌(1901~1989)이다. 이영수 교수신문 발행인(경기대 명예교수)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젊은 사람들이 함석헌 사상을 잘 모릅니다. 함 선생의 뜻이나 사상을 젊은이들에게 알려 보자, 그게 취지입니다.” 이 교수는 교수신문에 함석헌의 지근거리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는 연재를 실었다. 그 결과물은 <내가 본 함석헌>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지난 2006년에 출판됐다.
 
이 교수는 “일제시대부터 광복을 맞은 시기, 6·25와 4·19, 5·16, 박정희 독재기간까지 함석헌처럼 일관되게 젊은이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 사람이 없다”면서 “그런 분들을 기리고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이 모임의 취지”라고 덧붙였다.

한국 민주화운동 주도한 사상적 뿌리

동서양의 사상을 망라해 독특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한 함석헌. |경향신문

동서양의 사상을 망라해 독특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한 함석헌. |경향신문

1960~1970년대의 반독재민주화투쟁 현장에는 함석헌이 선두에 있었다. 두루마기와 고무신, 하얗게 자란 수염. 상징처럼 각인된 그의 외모였다. 그가 가는 곳에는 구름 같이 군중이 모여들었다. 구금과 단식. 서슬 퍼런 독재에 맞선 그의 모습은 두드러졌다. 1980년대, 군사 쿠테타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맞선 재야의 투쟁 현장에도 백발이 성성한 그가 앞장섰다. 그는 단지 운동가만이 아니었다. 사상가였다. 일제강점기, 그가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나중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으로 개작됨)는 문제적 저작이었다. 그가 끊임없이 천착한 ‘씨알사상’은 1970~1980년대 한국민주화운동을 이끈 이념인 민중론의 사상적 뿌리다. 김경재 한국신학대 명예교수는 “오늘 이 시대를 이끌고 가는 깨어 있는 사회지도자치고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21세기. 함석헌의 사상은 잊혀졌다. 도대체 왜일까?

함석헌학회를 주도하고 있는 이는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다. 그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것은 1965년. “대학을 거의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중앙신학대에 들어갔어요. 안병무 선생에게 배우려고 갔다가 함 선생을 만났어요.” 미국 유학시절에 그는 국무부 초빙으로 방문한 함석헌과 다시 조우한다. 함석헌은 유신독재시절, 거의 개인 잡지에 가까운 <씨알의소리>를 창간하지만 폐간당했다. “제가 귀국하니 1988년에 복간한 <씨알의소리>의 편집위원을 맡아 달라는 겁니다. 그때 제가 가장 젊은 편집위원이었어요. 계훈제, 김동길, 한승헌, 김경재, 김용준, 안병무 박사 등이 그때 함께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복간호에서 함 선생을 인터뷰했는데 그게 생전 마지막 인터뷰였어요.” 함석헌은 1989년에 소천했다. 다시 함석헌이 이후세대, 구체적으로 386 이후세대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우리 사회, 민족이 안고 있는 갈등을 레닌주의나 사회주의로 풀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고 풀이했다. 당시 젊은 층이 주창하던 ‘사상의 과학화’는 곧 마르크시즘적 사고 확립을 의미했는데, 동·서양사상과 기독교사상·톨스토이·아널드 토인비 등을 망라하는 함석헌의 사상과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는 것. 김영호 교수는 “당시 내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함 선생은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했는데, 그것도 당시 젊은 층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헌학회의 총무를 맡은 황보윤식 선생이 한마디 거든다. “사실 당시 내가 그런 비판에 선두에 섰습니다.”

다석 류영모 사사 사상체계 확립
함석헌 사상의 핵심은 흔히 ‘씨알사상’이라고 말한다. ‘씨알’의 다른 말은 민중이다. 바닥이자 가장 낮은 곳에서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자 주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의 요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대골 목사는 “함석헌은 1960년대까지는 민중이라는 말을 썼다”면서 “1970년대 들어서 역사의 주인으로 민중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씨알’이라는 말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함석헌의 ‘씨알’ 개념은 그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한자 ‘민(民)’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두고 류영모가 생각 끝에 만들어낸 독창적 개념이다. 함석헌과 류영모의 ‘씨알’ 개념은 미묘하게 서로 다르다. 류영모 사상을 연구해 온 다석의 제자 박영호는 “함석헌의 사상을 민주·평화의 사상이라면 류영모는 진리·신앙의 사상이다”라고 정의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뿌리에 열린 두 열매”로 비유했다. 사실 함석헌·류영모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미묘하게 나뉘어 있다. 김영호 교수는 “류영모의 철학적 입장에 깊이 심취하는 입장도 있고, 두 선생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있다”면서 “함석헌의 경우 사회적 행동과 실천을 통한 ‘함께 살기’를 강조했고, 그런 취지를 따라 평화운동이나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프로그램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우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상은 ‘씨알’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나 기존의 진보사상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고대사에 대한 관심 등에서 오히려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지적된다.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선의를 갖고 독재에 맞서는 민중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민중의 삶과 대치되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사는 “오히려 함석헌의 ‘민중론’보다는 현대사회나 물질문명·사회의 모순이나 억압성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을 반독재운동과 결부시키려는 모색이 더 큰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고 부언했다. 성서한국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구교형 목사는 “함석헌은 당시 압제와 핍박을 받는 조국의 현실을 긍정하는 일종의 메시아 사역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면서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민족주의자이고 항일운동을 했다고 강대국을 꿈꾸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영호 교수는 “함 선생은 물질주의가 팽배해 가는 현실 속에서 정신적 가치를 강조했다. 학회를 만들고자 한 것은 종교·인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도 함석헌의 재발견을 시도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헌학회는 앞으로 대중적으로 함석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잡지도 펴낼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함석헌기념사업회는 4월 23일 잡지 <씨알의소리> 창립 40주년 행사를 가지는 한편 8월에는 ‘전국씨알대회’를 열어 함석헌 사상의 대중화를 꾀할 계획이다. 씨알평화 사무총장 김진 목사는 “지금 당장 내놔도 문명이나 평화·종교·기독교비판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은 통용될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철저하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뿌리에서 사유했다는 점이 함석헌으로부터 가장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함석헌 연보
1901.3.13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출생
1916 양시 공립보통학교 졸업 및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1921 오산학교 편입. 오산학교에서 이승훈·류영모의 영향을 받음
1924.4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1부 입학
1928 귀국해 모교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1932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쓰기 시작
1938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 거부. 오산학교 사임 당함.
1940.8 도쿄에서의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대동경찰서에 1년 동안 구치
1942.5 서울에서 ‘성서조선’사건으로 1년 동안 복역
1945.8.15 광복을 맞아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1945.11.23 신의주 학생사건 책임자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돼 구금
1947.3.17 월남.
1948 서울에 도착, 매주일 YMCA 강당에서 일요종교집회
1950.6 6·25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란
1958 <사상계>에 투고한 ‘생각한 백성이라야 산다’로 20일 동안 구금
1961.6 5·16을 비판하는 ‘5·16을 어떻게 볼까?’를 발표
1962 미 국무성 초청 3개월 동안 미국 여행. 10개월 동안 퀘어커 학교에서 공부
1970.4.19 잡지 <씨알의 소리> 창간호 냄
1970.5 <씨알의 소리> 2호 정부인가 취소 통고 받음
1971.11.13 전태일 1주기 추도회 및 강연회
1976.3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
1979 노벨평화상 후보로 피천
1979.11.23 명동YMCA 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15일 동안 구속
1983.6 단식을 시작해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줌
1988.9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 제창
1988.12.1 폐간 8년만에 <씨알의 소리> 복간호 발행
1989.2.4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뜸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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