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

광화문 광장에서 되새겨보는 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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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민주염원 ‘시민 권력’은 어디에…

<Weekly 경향>은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짚어보는 2010년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를 연재한다. 2·28 대구 의거와 3·15 마산 의거가 불씨를 지핀 혁명의 기운은 마침내 1960년 4월 19일 혁명의 불길로 치솟았다. 50년 전 그날 학생과 시민으로 이뤄진 시위대는 세종로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정권으로 하여금 결국 시민권력의 힘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박태균 교수가 조선 시대 이래 권력의 공간인 동시에 민중적 저항이 분출된 공간이기도 했던 광화문을 찾아 4·19혁명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역사적 의미를 반추했다. <편집자주>

광화문 앞 세종로는 도도한 권력의 공간이자 민중의 함성이 터져 나온 공간이었다.

광화문 앞 세종로는 도도한 권력의 공간이자 민중의 함성이 터져 나온 공간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섰다. 50년 전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4월 함성이 울려퍼지던 그곳이었다. 자주 지나가는 길이었지만 쳐다보기만 했을 뿐 광화문 광장에는 발을 딛지 않았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그곳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공간은 결코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다른 나라의 광장과는 너무나 달랐다. 스키 점프대를 만들어 쇼까지 벌이면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하는 것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막으려면 도대체 이런 광장은 왜 만들었을까. 그래서 시민보다 더 많은 경찰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광화문 광장을 둘러싼 권력의 실체들
광화문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향한 곳은 경복궁과 청와대가 있는 북쪽 방면이었다. 앞으로는 위엄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고, 그 뒤로 최근 만들어진 세종대왕 동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이 머무른, 그리고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이 보였다.

그런데 광화문 광장의 북쪽에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권력의 실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렇구나. 대한민국의 권력은 바로 이것이구나. 오른쪽으로 교육과학기술부·통일부·외교통상부가 있는 정부 청사를 비롯해 문화 권력의 상징인 세종문화회관, 한국 기독교 감리교 본부, 조선일보 본사, 4·19 혁명 당시 국회의사당이던 서울시의회 건물이 보였다. 왼쪽의 권력 또한 오른쪽 못지 않았다. 앞으로 대한민국 역사관이 될 문화체육부 건물 옆으로 군사 정권 시절에 현대판 ‘총독부’라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닉네임까지 붙여졌던 주한미국대사관 건물, 현재 4·19 혁명의 자유·민주·정의의 정신을 후퇴시키고 있다는 방송통신위원회, 현대 금융 자본주의의 꽃들이 모인 보험회사와 파이낸스센터, 조선일보사와 함께 창사 90주년 기념 현수막이 걸려 있는 동아일보 본사, 서울시청이 자리잡고 있었다.실로 광화문 광장의 남쪽에서 바라보는 북쪽의 전경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면 북쪽 끝에서 바라보는 남쪽의 전경은 권력의 구성과 그 실체를 보여 주고 있다. 중앙 행정부의 관권뿐만 아니라 문화권력, 언론권력, 종교권력, 자본권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 중요한 자리에 한국 현대사를 좌지우지한 외부의 권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함성의 형상화 왜 어려운 것일까
본래 광화문 광장이 있는 세종로는 서울이 수도가 된 15세기부터 이 땅의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조선의 모든 핵심 권력 기관이 세종로의 양쪽에 들어섰다. 세종로의 정점에는 경복궁이 있었고, 조정의 각 기관을 지나가면 오른쪽으로 덕수궁이 위치했다. 세종로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한성부의 가장 큰 거리인 종로가 있었고 경복궁의 오른쪽에는 사직, 왼쪽에는 종묘가 각각 위치했다. 그래서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세계 열강들의 대사관과 영사관도 세종로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박태균 교수가 50년 전 4·19혁명의 현장인 광화문 광장을 걷고 있다.

박태균 교수가 50년 전 4·19혁명의 현장인 광화문 광장을 걷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강점기 역시 광화문을 중심으로 권력이 계속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소위 보호정치가 시작됐을 때 통감부는 남산 근처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당시 한성의 남쪽에서 북쪽의 경복궁을 감시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강제 병합이 이뤄진 이후 설립된 총독부는 곧 경복궁 앞으로 옮겨졌다. 거대한 규모의 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경복궁을 그 뒤로 감춘 것이다. 총독부 건물 앞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약간 오른쪽으로 서울역, 왼쪽으로 경성부 건물과 조선은행, 그리고 미쓰코시 백화점 너머로 조선신궁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광화문 광장 부근은 많은 시민과 국민으로부터 우러러 보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권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자리였다. 16세기 말 일본이 침략했을 때 권력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경복궁이 불에 탔으며, 19세기 말 민족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이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식민권력에서부터 이승만 정부 시기에 이르기까지 강압적 권력은 더 이상 시민의 힘이 이곳에 미치지 못하게 했지만 그 힘은 1960년 4월 혁명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시민의 힘은 1964년에도 또 한 번 일어났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협상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밀실야합을 통해 국가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권력에 대한 항의였다. 그 힘은 1987년과 2008년에 다시 한 번 타올랐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은 1987년 또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막힌 곳이며, 2008년에는 시민들의 행렬을 막기 위해 컨테이너 산성까지 쌓은 곳이다. 그리고 지난해 노무현·김대중 두 전 대통령의 운구가 출발한 곳이기도 하며, 2002년과 2003년의 촛불시위가 있던 광화문 우체국 앞이 지척에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광화문 광장의 어디에서도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시민 권력’의 힘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시민권력의 대척점에 있는 권력기관들의 한가운데에 두 동상만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이들 두 분은 백성을 이해하려고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한 분들로 기억되고 있지만 웬일인지 광화문 광장에 있는 두 분의 동상은 군림하는 분들이지 결코 함께하는 분들로 보이지 않는다.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해 그 혁명의 자리에 서서 과거의 목소리를 듣고자 이 자리에 섰지만 이 자리에서 과거의 함성을 형상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왜 그런 것일까.

<글·박태균 서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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