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은행 ‘장수 CEO’ 화제 ‘권불십년’ 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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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금융 라응찬-하나금융 김승유 회장 CEO만 10년 이상 훌쩍

최고경영자(CEO)의 장수DNA는 있는 것일까. 보통사람이라면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잘 버티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다. 권력자에게도 ‘권불10년’이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오너가 아닌 사람이 20년 넘게 CEO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면 분명 그의 ‘장수’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2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이사회에서 주요 은행장들이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 선출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왼쪽부터 윤용로 IBK기업은행장, 김정태 하나은행장, 민유성 산업은행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강정원 KB국민은행장, 김태영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이사. |연합뉴스

지난 1월 2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이사회에서 주요 은행장들이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 선출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왼쪽부터 윤용로 IBK기업은행장, 김정태 하나은행장, 민유성 산업은행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강정원 KB국민은행장, 김태영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이사. |연합뉴스

최근 은행권의 ‘장수CEO‘가 화제다. 여기서 장수CEO는 나이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권좌를 오래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20년 가까이 CEO로 활동하고 있는 은행권의 장수CEO는 신한금융지주의 라응찬 회장이 대표적이다. 20년까지는 아니지만 하나금융지주의 김승유 회장 역시 CEO로 15년 가까이 은행의 수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씨티은행의 하영구 행장 역시 4연임에 성공하며 장수CEO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경우 지난 2월 26일 열린 이사회에서 상근이사로 재추천되며 금융권 최초로 ‘4연속 연임’에 성공했다. 1938년생인 라 회장은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농업은행에 입행, 대구은행을 거쳐 1982년 신한은행 탄생 당시 상무이사로 금융권 임원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라 회장은 1991년 신한은행 행장이 된 이후 8년 재임, 2001년 신한금융 회장 9년에 이어 오는 2013년 3월까지 3년의 임기를 더 채우게 되면 한 금융회사에서 총 20년을 CEO로 보내게 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라 회장의 4연임 비결은 신한금융 내부의 ‘절대적 카리스마’와 ‘탁월한 경영능력’, 대주주들의 ‘두터운 신임’이라는 게 중론이다. 라 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장 기업이자 은행권의 맏형이던 조흥은행을 인수한 데다 LG카드까지 잇따라 인수하면서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신한맨들의 자부심을 높였다. 이 결과 라 회장의 CEO 재임 기간에 신한은행은 1982년 창립 당시 점포 3개, 자본금 250억원, 임직원 279명의 미니은행에서 자산 304조원, 임직원 1만8000여 명의 초대형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상대 동기동창인 하나금융지주 김승유 회장은 라 회장과 함께 금융권에서 손꼽히는 대표 장수CEO 가운데 한 명이다. 김 회장은 1997년 하나은행장을 맡으면서 현재까지 하나은행의 수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라 회장이 신한은행의 창립멤버로서 지금까지 수장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김 회장도 하나은행의 ‘창립멤버’로 시작해 오늘날까지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김 회장 역시 그동안 서울은행과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하나은행을 ‘은행 빅4’로 성장시킨 경영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대주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김 회장은 현 정부와도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현 정부에 미소금융의 아이디어를 내며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으로 뛰고 있다.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4회 연임
한국씨티은행장으로 4연임이 사실상 확정된 하영구 은행장도 국내 대표적인 장수CEO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유력한 초대 금융감독원장 후보로도 거론된 하 행장은 1981년 미국 시티은행에 입사한 이후 씨티은행 한국 소비자금융그룹 대표를 거쳐 2001년 한미은행장으로 선임됐다. 2004년에 한미은행과 통합으로 출범한 한국씨티은행의 초대 행장으로 선임됐고, 2007년 연임에 성공했다. 하 행장의 연임 성공은 뛰어난 실적과 함께 조직 통합에 힘쓴 공로가 높게 인정됐기 때문이라는 게 전반적인 금융권 안팎의 평가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은행권의 장수CEO 출현에 대해 장단점을 동시에 지적한다. 회사의 수장이 오래 재직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고 직원들의 근무기강도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1인 지배체제’의 구축이 불러들이는 폐해 또한 크기 때문에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내·외부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왼쪽부터_ 국내 최장수 은행권 CEO인 라응찬 신한금융지주회장, 김승유 하나금융지주회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왼쪽부터_ 국내 최장수 은행권 CEO인 라응찬 신한금융지주회장, 김승유 하나금융지주회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CEO의 장기 재직에 대한 장점을 꼽는다면 장기적 관점에서 경영하기 때문에 시스템 위험이 줄어든다는 점”이라면서 “단기 업적에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연임을 위해 지나친 팽창정책은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 교수는 “반대로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격언처럼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면서 “이 때문에 CEO를 견제하는 내·외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대다수 은행들은 소유가 분산돼 주주에 의한 경영 감시, CEO에 대한 감시가 미약한 상황”이라면서 “우리나라 은행 CEO들의 재임기간이 길어진 것은 능력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경영진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시장 압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면 내부의 지배구조인 이사회를 개선하거나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진 기관투자가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인 중심체제 견제장치 마련해야”
은행권 수장들이 이처럼 최장수 기록까지 갈아치우며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는 반면에 사외이사들은 ‘교체’의 회오리 한가운데에 있다. 지난해 말에 터져나온 KB금융지주 회장 선출 사태는 관치금융의 부활이라는 논란과 함께 국내 은행권의 사외이사제도에 대한 재정비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후 금융당국은 사외이사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에 들어갔고, 은행연합회는 지난 1월 25일 임기 제한과 사외이사의 자격 요건 강화를 골자로 하는 ‘사외이사 모범규준’을 만들어 1월 26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에 제정된 ‘사외이사 모범규준’은 제정 이후 오히려 관치가 강화됐다는 지적이 많다. 규준이란게 본래 은행업계 자율규약의 성격을 띠지만 사실상 금융 당국의 의중이 많이 반영되면서 금융권에서는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라는 자조 섞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 형식상 규준은 은행연합회가 만들었지만 금융 당국이 주도한 이 규준을 은행 정관에 제대로 반영해 지키지 않으면 금감원의 경영실태평가 때 불이익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규준에는 사외이사의 요건을 강화하면서 6조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에서 금감원 출신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수 있도록 끼워 넣어 금감원 출신 낙하산 인사들이 전 금융권 감사 자리를 휩쓸다시피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 사외이사 자리에까지 제 식구를 보내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거기에도 모자랐는지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 17일 ‘사외이사 모범규준’을 아예 법률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금융위 홍영만 금융서비스국장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통해 “그동안 감독 규정을 통해 행정지도를 해 왔지만 이번에는 은행법을 개정하겠다”면서 “사외이사 모범 규준을 규정으로 올리고, 은행업의 겸영 및 부수업무 등을 알아보기 쉽게 자본시장법에 맞춰 체계적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은행권은 서슬이 시퍼런 금융위의 엄포에 즉각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KB·우리·신한 등 3곳은 최근 잇달아 이사회를 열어 지난 1월에 제정된 ‘은행권 사외이사 모범규준’을 적극 반영하는 한편 사외이사 후보 선임을 마쳤다. 이에 따라 4대 금융지주사와 은행의 사외이사 64명 가운데 3분의 1인 20명 가량이 3월 말 주총을 통해 교체될 전망이다.

KB금융지주는 3월 3일 이사회를 열고 전체 9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3명을 교체했다. KB금융지주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이날 조담 이사회 의장과 김한·변보경 이사의 후임으로 이경재 전 기업은행장, 고승의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이영남 이지디지털 대표 등 3명을 신임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했다. 반면에 임기가 만료된 KB금융지주 최대주주인 ING그룹의 자크 켐프 이사는 연임 의사를 밝혀 사외이사 후보로 재추천됐다. 이들은 오는 3월 26일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로 확정된다.

사외이사 주총 앞두고 대폭 교체
신한금융지주는 2월 26일 이사회를 열어 사외이사 12명 가운데 8명을 내보내고 4명을 올해 주총에서 새로 뽑기로 했다. 사외이사 수는 12명에서 8명으로 줄어든다. 3월 2일 이사회를 연 우리금융지주는 7명의 사외이사 전원에 대해 1년 연임시키기로 결정했다. 하나금융지주도 사외이사 3명을 퇴임시키고 2명을 새로 선임했다. 하나금융지주는 3월 9일 이사회를 열어 정광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와 최경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를 신임 사외이사로 결정했다. 전체 사외이사 수는 10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한편 우리·신한·하나 등 CEO인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겸해 온 금융지주사는 두 자리를 분리하는 방안을 향후 주주총회에서 확정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이팔성 우리지주 회장, 라응찬 신한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지주 회장은 이달 주총 이후 이사회 의장직을 내놓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금융지주 수장이 비록 ‘이사회 의장직’은 내놓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위상은 더욱 확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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