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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한자교육 또 도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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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교장 재량권 주어지자 한글단체서 반발

올해부터 전국 초등학교에서 교장 재량에 따라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한자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관련 근거가 마련됐다. 그러나 한글 관련 단체에서는 이를 백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자교육 관련 단체에서는 정식교과 채택 및 교과서 한자병기까지 주장하고 있어 후폭풍이 심각하다. 광복 이후 계속돼 온 한글과 한자의 대립이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서당에서 한자와 예절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모습. |경향신문

서당에서 한자와 예절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모습. |경향신문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말에 발표한 ‘2009 개정 교육과정’ 총론 가운데 ‘초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중점’이란 항목에서 ‘정보통신활용교육, 보건교육, 한자교육 등(전체 38개)은 관련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체계적인 지도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고 규정했다.

교사·학부모는 찬성 비율 높아
이전까지 초등 교육 과정에 언급되지 않았던 한자교육을 공식화한 것으로 1~2학년은 2011년, 3~4학년은 2012년, 5~6학년은 2013년부터 각각 적용된다.

교육부는 지난해 초 한자교육 관련 단체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이해찬·한명숙·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의 서명이 담긴 ‘초등학교 한자교육 촉구 건의서’를 민원 형태로 청와대에 제출한 뒤 교육과정평가원에 의뢰해 3~8월 한자교육 방안에 대한 용역을 실시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만큼 이 용역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다가 한글단체들의 요구에 따라 공개됐다.

용역에 따르면 국가 교육 과정에는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학교 현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되고 있다. 2000~2008년에 16개 시·도 교육청 가운데 8곳에서 49종 212권의 초등한자 인정도서를 발행했고, 지역 교육청에서는 해당 지역 내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강화하고자 온라인 프로그램과 책자를 개발하기도 했다. 학교 단위에서는 아침자습, 재량활동, 특별활동, 방과후, 드물게는 교과수업시간을 활용해 한자교육이 이뤄졌다.한자교육 특성화 학교인 서울 도봉구 한신초등학교의 경우 매일 한 글자를 10번씩 6년 동안 쓰도록 만든 워크북을 만들고, 3학년 이상 국어과 ‘읽기’ 교과서를 발달 단계에 따라 한자를 혼용한 별도 교과서로 제작해 수업에 활용했다.

평가원은 이 같은 현황조사와 함께 전국 220개 학교의 교사 및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도 실시한 결과 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한자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교사의 77.3%, 학부모의 89.1%가 찬성했다. 초등학교 한자교육의 이점으로는 교사의 43%가 어휘력 신장, 학부모의 29.6%는 교과의 주요 개념 이해라고 각각 답했다. 또 바람직한 최초 한자교육 시기에 대해 교사는 초등학교 3학년(30.1%)과 1학년(24.3%) 순, 학부모는 1학년(37.9%)과 3학년(22.1%) 순으로 각각 답했다는 것이다.

한글 관련 단체 대표들이 지난 2월 8일 교육과학기술부를 방문해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창의적 체험활동 교육 과정에 넣은 데 대해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봉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장,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김동원교육과학기술부 교육과정기획과장, 고경희 한글문화연대 대표, 송현 한글문화원장, 오동춘 짚신문학회장. |한말글문화협회 제공

한글 관련 단체 대표들이 지난 2월 8일 교육과학기술부를 방문해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창의적 체험활동 교육 과정에 넣은 데 대해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봉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장,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김동원교육과학기술부 교육과정기획과장, 고경희 한글문화연대 대표, 송현 한글문화원장, 오동춘 짚신문학회장. |한말글문화협회 제공

한국한문교육학회·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한중문화교류회·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등 관련 학회·단체에서는 한글 단어의 70% 이상이 한자로 이뤄졌다는 점, 우리나라가 한자문화권인 데다 동북아 경제 교류의 증가로 한자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는 점, 7개 공인한자급수시험의 한 해 응시자 150만명 가운데 60%가 초등학생일 정도로 교육 수요가 높다는 점 등을 들어 한자교육 강화의 필요성을 계속 주장해 왔다. 현재 한자는 중·고교의 선택과목으로 돼 있다.

우리말 경시 풍조 확산 우려
교육부는 용역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11월 공청회를 거쳐 한자교육의 시행 근거를 마련했다. 주무 부서인 교육과정기획과 김동원 과장은 “전문가의 연구 및 교사·학부모의 의견 수렴을 거쳐 결정한 것”이라면서 “실제 채택 여부는 학교장 재량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한글기본법상의 기본정책에는 변화가 없으며, 초등학교의 국어교과 수업 시수는 총 1264시간으로, 전체 수업 시수의 21.7%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접한 한글 단체에서는 “1970년 한글전용화 정책이 시행된 지 40년만에 한글정책이 퇴보했다. 목숨을 바쳐 한글을 지킨 선열에 대한 배반이자 우리 역사의 후퇴”라고 성토하고 나섰다. 한글학회·한글문화연대 등 30여 개 한글 단체 대표들은 2월 1일 항의성명서를 발표한 데 이어 8일에는 교육부를 항의 방문하고 질의서를 전달했다. 또 19일에는 국회를 방문하고 20일에는 대책회의를 열어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논의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이들은 개정 교육 과정의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는 “한자는 우리말의 창조적인 생산성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어 왔다”면서 “영어 숭배 광풍이 일어나 우리말과 글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번져 가는 마당에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시행함으로써 사대모화사상이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한자교육 채택에는 한자학습지회사, 인증시험시행단체 등의 로비력이 작용했다. 자체 조사한 결과 교육열이 높은 서울 강남에서는 대부분의 학교가 한자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반면에 초등학교 한자교육 실시를 주장하는 일부 국회의원과 한자교육 관련 단체들은 교육부의 조치가 미흡하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 김세연의원실의 백한웅 보좌관은 “창의적 체험활동의 범위에 넣었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어렵다”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한자를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교과서에 병기해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밝혔다. 김세연 의원은 자유선진당 조순형 의원, 민주당 김부겸 의원과 공동으로 24일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관한 심포지엄’을 여는 등 추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 같은 양측의 논란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주부 홍유진씨(41·서울 양천구 목동)는 “지금도 한자공부를 시키고 있지만 비교과 과목으로 채택된 만큼 더욱 중요해진 것 아니냐”면서 “교육과 관련된 사안이 나올 때마다 입장 대립이 심각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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