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모란공원은 ‘민주열사들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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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이후 공권력에 희생 당한 열사들 하나 둘 영면

고 이상림, 고 양회성, 고 한대성, 고 이성수.
지난 1월 9일 용산참사 희생자 5명의 유해가 사건 발생 1년 만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치됐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열사의 성지로 불린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했거나 자기 목숨을 던진 이들이 ‘민주열사’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

2009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39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연설하고 있다. <전태일 기념사업회 제공>

2009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39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연설하고 있다. <전태일 기념사업회 제공>

민주열사 묘역은 사설공원 묘지인 모란공원의 일부에 불과하다. 모란공원은 1966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매장이 가능해진 것은 1969년 무렵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1만2000여 기 가운데 110여 기가 민주열사들의 묘다. 사설묘지인 데도 유가협과 개별 기념사업회들이 추모비를 세우고 묘역 안내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란공원 측의 협조를 얻어 가능했던 일이다.

문익환 목사·박종철 열사도 잠들어
민주열사 묘역의 출발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과 관련한 보훈사업을 하는 민간단체 추모단체연대회(이하 추모연대)의 이형숙 사무처장에 따르면 “당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정부는 장례위원회를 꾸리고 장지를 물색했다. 모란공원이 장지로 결정된 건 정부가 서울에서 떨어진 곳으로 장지를 선택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대문에는 모란공원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민주열사들의 유해가 하나 둘 모란공원으로 왔다. 이 사무처장은 “고인들이 전태일 열사 옆에 묻히고 싶다고 뜻을 밝힌 경우도 있고, 고인과 함께 운동한 이들과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전태일 열사 묘지 근처로 자리를 잡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박계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전태일 열사의 상징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1월 12일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박종철 열사 부친인 박정기씨 등 유족과 시민사회 인사 50여 명이 ‘민주열사 박종철 21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8년 1월 12일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박종철 열사 부친인 박정기씨 등 유족과 시민사회 인사 50여 명이 ‘민주열사 박종철 21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묘지에 안장된 민주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곳이 왜 민주열사의 성지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통일운동의 대부 문익환 목사(1918~1994), 서울대 3학년 재학 중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다가 고문으로 사망해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1965~1987), 1960년대 교원노조를 결성하고 장준하·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계훈제 선생(1921~1999), 박정희 정권 시기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기록된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1932~1973), 197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좌장으로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 교수직 박탈·수감·복직을 거듭한 안병무 선생(1922~1996), 1979년 박정희 정권 붕괴의 서곡이 된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투쟁에서 사망한 김경숙 열사(1958~1979), 한국 비판사회학의 1세대로 민중운동에 헌신했던 김진균 전 서울대 교수(1937~2004), 1991년 5월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당시 성균관대 재학생 김귀정 열사(1966~1991),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대표적인 인권법률가 조영래 변호사(1965~1990) 등 군사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이름들이 이 묘역의 묘비 아래 묻혀 있다.

시민단체 추천 얻어야 갈 수 있어
민주열사 묘역에는 군사정권이 종식된 이후에도 ‘열사’들의 유해가 안치됐다. 1996년 청구성심병원 노조위원장으로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2006년 8월 위암으로 사망한 이정미씨, 2005년 11월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시위 도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전용철씨,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 분신한 허세욱씨도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기륭전자 권명희 조합원도 투병과 투쟁을 나란히 치르다가 결국 2008년 9월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안내도. <추모단체연대회의 제공>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안내도. <추모단체연대회의 제공>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열사’들의 유해가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현재 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리는 추모제나 행사와 관련된 단체는 추모연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가협 등 3개 단체다. 이들 단체는 민주열사를 재야열사, 의문사, 노동열사, 학생열사의 범주로 구분한다. 이 세 단체는 지난해 공동으로 자료집을 발간했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묻혀 있는 민주열사는 110여 명이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단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추산하고 있다. 홍용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팀 과장은 “단체마다 입장이 조금씩 달라 정확한 숫자에는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민주열사 묘역에 묻히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는 않다. 이형주 사무처장은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가려면 단체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면서 “용산참사는 공권력 남용과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범대위의 추천과 유족 동의를 거쳐 희생자들의 유해가 민주열사 묘역으로 가게 됐다”고 전했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바쳐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 자의 빛이요 볕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 지어니.”

1997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이 세운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추모비에 적힌 문구다. 해마다 민주주의의의 참뜻과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되묻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민주열사 묘역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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